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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1-38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부 23 강 

            피로 세운 새 언약

말씀/ 누가복음 22:1-38
요절/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2-24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복음이 완성되고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최후만찬 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며 피를 흘리셔야 할 의미가 무엇인가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최후만찬에 참예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떡과 잔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유월절 최후만찬(1-23)

  1절을 보십시오. 때는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 기념일로 가장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 바로의 권세 아래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으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월 14일 저녁부터 7일동안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1월 14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15일부터 7일 동안은 무교절로서 이 기간은 애굽의 고난을 기억하게 위해 누룩없는 떡인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워 오자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로마 식민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출애굽의 은혜가 더욱 절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종교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을 묵상하며 백성들에게 전할 말씀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고 있었습니다(2).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대신 시기심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워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의논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좋은기회가 왔습니다. 배반자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륫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로 예수님과 함께 하며 가까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큰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 그가 선교사업 부장의 직분을 맡은 것을 보면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왜 사랑하는 스승을 원수들에게 팔아 넘기자 한 것입니까?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세상 욕심을 좇아 도망가는 것도 몹쓸 일인데 스승을 원수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기고자 하다니 천하에 이런 몹쓸 짓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사단이 들어가면 가능한 것입니다. 사단이 역사하게 되면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사단에게 사로 잡힌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았으나 예수님보다도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재정 실무자로서 이해타산에 빠르고 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입니다(딤전6:10). 그는 예수님을 통해 현실적으로 유익한 그 무엇을 얻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순수치 못하고 이중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고 복음역사가 성공적으로 일어날 때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점점 자신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온 세상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 같이 느껴졌을 때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지 않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사단에게 붙잡히고 만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발로 원수의 소굴에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 줄 방책을 의논했습니다(4). 그들은 심히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언약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만 엿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비판하지만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그와 같이 될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를지라.  무교절 일이 되면 유월절 양을 잡고 가족 단위로 유월절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유월절 의미를 심령에 새겼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유월절을 예비하도록 이상한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들이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를 따라가서 예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10-12). 이렇게 정확한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으신 것은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13).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언제든지 기쁨으로 순종할 절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유월절 식사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월절 식사를 통해 그들에게 고난의 의미를 심고 마음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랑을 믿는 믿음을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이는 지상에서는 마지막 유월절임을 말해 줍니다. 또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있을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상에서의 유월절 잔치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을 유월절 잔치의 그림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 1:29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 되사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9:9절에서 하늘 나라의 유월절 잔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늘 나라의 유월절 잔치에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월절 식순에 따라 잔을 나누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이 땅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슬픔과 근심에 찬 얼굴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되어가는 일을 볼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령은 어두웠고 얼굴은 근심의 빛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전히 구속받은 몸으로 어린 양의 유월절 잔치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희망입니까?

 예수님은 떡과 잔을 주시면서 이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받을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떡을 가져다가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들은 큰 빵을 서로 찢어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찢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절 말씀은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께 나아가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합니다(요6:35a). 예수님은 영적으로 굶주린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주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로 맺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인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를 지키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귀히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응답하여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아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관계가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견고케 하기 위해 짐승의 피로 인치도록 하셨습니다(출24:6-8).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짐승의 피를 뿌려 정결케 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하여 반복해서 범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함으로 이 언약을 스스로 파기하였습니다. 구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쳤기 때문에 불완전하였습니다. 짐승의 피는 근본적으로 죄를 속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순결합니다. 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항상 살아계시지 때문에 그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근본적으로 죄를 없이하며 사람을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추하고 더러운 삶을 청산하고 고상하고 순수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늘 실패합니다. 이는 죄로 더러워진 피 때문입니다. 피가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피검사부터 합니다. 이는 사람이 병들면 피가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생활습관과 추하고 더러운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피로 교환수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육체를 정결케 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9:13,14).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의 소욕과 죄악된 생각과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해 줍니다. 그때 우리는 점점 거룩함을 사모하게 되고 순수하고 고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새 언약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인쳤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 언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속함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믿는 순간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흉악한 강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시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새 언약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축복입니다. 예수님은 19절 말씀에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쉽게 잘 잊어버리는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아시고 이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행함으로 이를 기념해야 합니다. 또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이 은혜를 증거하는 생활입니다.


.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4-38)

  24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데도 그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다투기만 하였습니다.  또 라고 한 것을 보면 이번만이 아니라 틈만 있으면 헤게모니 쟁탈전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같이 주류, 비주류로 나누어 싸웠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을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당장에 기합을 주고 회개문을 써오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오래 참으시고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어떤 자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임으로 주관하고 다스리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히 세상의 가치관과 달라야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앉아서 섬김을 받는 자가 크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큰 자가 되기는 원하지만 섬기기는 원치 않습니다. 존경받기는 원하지만 낮아져서 희생하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입니다. 섬길려면 낮아지고 희생해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이 사람을 위대하게 하지 타이틀이나 지위가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요 스승이 되시지만 그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계셨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겸손이요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지만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섬기려면 아니꼬운 일이 많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아니꼬운 일을 많이 당하시고 많은 무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다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품고 그들을 babysitting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섬기는 사랑으로 제자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대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이 예수님을 본 받아야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후에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젊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젊은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큰 은혜를 주시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 겸손히 섬길 때 장차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는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과 함께 항상 먹고 마시며 또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된다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어떤 환난과 핍박과 유혹 중에도 끝까지 참고 믿음의 중심을 지키면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딤후2:11,12)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시험에 들 것을 아셨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후 제자들마저 없이 하고자 밀까르듯 하려고 그들을 청구할 것을 아셨습니다. 청구한다는 것은 찾아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하며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고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고 또 사단의 역사가 얼마나 강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베드로를 더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이 전대와 주머니와 검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예언의 말씀대로 체포되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셨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안 계시고 또 어두움의 권세가 판을 치는 세상이 오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35-37).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38).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