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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39-62

by Mark Yang   04/23/2022  

Message


누가복음 제 2부 24강

아버지여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누가복음 22:39-62
요절/ 누가복음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ㅅ;ㅇㅎㅂ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체포 당하시기 바로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확신있게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기도의 동산으로 가서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를 배워야 겠습니다.

I.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39-46)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감람산은 겟세마네라고도 하고 올리브 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올리브산이라고도 합니다. ‘습관을 좇아’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주 이곳에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영적인 쉼을 얻으셨습니다(21:37; 요 18:2). 그곳은 예수님께 있어서 소천국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평소 습관을 좇아 영적인 쉼을 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감람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의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실 뿐만아니라 제자들도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시련을 잘 아시고 기도로 영적 무장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앞으로 강한 회오리 바람이 휘몰아 불게 됩니다. 절망의 회오리 바람, 의심의 회오리 바람이 불게 됩니다. 이때 그들이 넘어지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잘 지킬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단의 세력을 파할 수 있는 힘과 지헤를 덧입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도록 하신 후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막 14:35).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경외심 있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히브리서 5:7절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으셨느니라.”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안장코를 후비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으실 리가 만문합니다.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서 기도하셨습니다. 대개 고통스러우면 마음이 완악해 져서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때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제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에수님께서 왜 이런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육의 소욕을 부인하시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챔피온이 받는 우승컵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소욕을 갖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세상을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살기를 원합니다. 오래 오래 영원토록 살기를 원합니다. 또 인간은 고생과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고생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죽을 때도 아무 고통이 없이 편안히 죽기를 원합니다. 또 수치과 멸시와 조롱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 받고 존경 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욕망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육의 소육 때문에 고통과 수치와 멸시의 십자가 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 번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뜻이면 할 수 있는대로 고통의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는 한 인간으로서 진실된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머무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 가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이는 자기에게서 하나님에게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위대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육의 소욕을 쳐 복종시키셨습니다. 기도한 육의 소욕을 쳐 복종시키는 위한 투쟁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어찌하든지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투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 뜻을 찾고 순종하고자 하기보다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만 일방적으로 청구만 합니다. 그리고 청구한 것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믿기 싫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기도는 하나님을 진력나게 합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 인생은 나의 것’하며 내 원대로 하고 싶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후회스럽지 않고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원대로 할 때 믿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없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투쟁할 때 내가 알지 못하던 놀라운 영적 축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자들입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도왔습니다(43). 예수님께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는 모든 고통과 수치를 감당할 영적인 힘을 얻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십자가에 대한 마음의 부담감과 슬픈 마음을 극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마음의 피곤과 연약함과 외로움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자기 자신을 이기시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어떠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시는 신앙적인 갈등을 하실 때 그들은 누가 크냐 하는 인간적인 갈등만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갈등과 장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슬픈 생각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습니다.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아예 코를 골고 침을 흘리며 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에 동참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기도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자 하면 눈꺼풀이 아래로 누르는 힘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46) 우리가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일어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유혹은 달콤하고 힘이 있습니다. 이 사단의 시험은 천하장사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봄에는 봄의 유혹이 있습니다. 봄의 유혹은 우리를 이상야릇하게 만들어 병들게 합니다. 우리가 봄 사단을 이길려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II. 체포 당하신 예수님 (47-53)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쓴 잔을 기쁨으로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고 그 모습은 당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시고 있는데 한 무리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이제는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나다니 참으로 기가막힌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아서 입맞춤으로 신호를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키스는 배반자의 키스였습니다. 예수님은 배반자까지도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검으로 싸우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충성은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싸워할 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혈과 육으로 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52-54절을 보면 이것까지 참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검을 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검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는 것까지도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감정을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저는 목자생활하면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은혜를 배반하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을 팔고자 입맞추는 가룟 유다를 참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로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손에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5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예수님은 빛 가운데서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행동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과거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때가 되었습니다.

III.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 (54-62)

가룟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의 심장을 찢도록 마음 아픈 일었습니다. 그런데 고의는 아니지만 또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제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 갔을까요?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히자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잡힐까봐 멀찍이 따라 갔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에는 내가 이때 잡히면 안된다는 변명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잡히지 않으려고 멀찍이 따라가자 원수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잡힐까 두려워서 멀찍이 따라가면 사단에게 목덜미를 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몸이 으스스 떨렸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떨렸습니다.  아니 온 전신이 떨렸습니다. 그는 몸을 녹이기 위해 불 곁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이때 한 계집종이 그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당황한 베드로는 손을 내저으며 이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는 온 몸에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조금후에는 다른 사람이 그를 자세히 보고 있다가 “너도 그 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전보다 더 강하게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강한 갈릴리 사투리 때문에 더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습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그는 점점 더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끝까지 이를 부인했습니다. “이 사람아 너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그가 방금 말할 때에 닭이 울었습니다. 닭소리는 베드로의 양심을 깨우쳤습니다. 또 동시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사랑의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잡혀가는 중에서도 자신보다 베드로를 더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베드로의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와 예수님의 사랑의 시선을 받자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밤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진실되게 회개했습니다. 그는 그후부터 새벽에 닭이 울면 이때 일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42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이 감람산 기도를 통해 만민 구속 사업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내 원대로 살 때 아무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원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만민 구속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