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3 강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씀/ 사도행전 3:1-4:31
요절/ 사도행전 3:6
I.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 (3:1-11)
1. 베드로와 요한이 언제, 어디로 갔습니까(1)? 과거 이들의 생각과 생활을 비교해 보시오. (참조. 막10:35-41, 14:37-40)
2.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의 형편을 말해 보시오(2). 그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3-5)?
3.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6,7)? 일어나 걷게 된 그의 감격이 어떠합니까(8)? 여기서 사람을 돕는 바른 길에 대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4. 베드로는 무엇을 의지하여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6)? 이런 베드로는 과거의 그와 어떻게 다릅니까?(참조. 요한9:2)
5.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9-11)?
Ⅱ.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베드로(3:11-26)
1. 베드로는 모인 무리들이 관심을 누구에게로 돌렸습니까(12-15)? 또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았다고 증거합니까(16)?
2. 베드로는 어떤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14,15,18-26)? 예수님으로부터 축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19,26)?
Ⅲ. 공회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베드로 (4:1-31)
1.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왜 두 사도를 가두었습니까(1-4)?
2. 공회원들이 사도들에게 무엇을 따져 물었습니까(5-8)? 베드로는 누구의 이름 권세를 증거 하였습니까(8-12)? 이 이름 권세는 세상의 권세와 어떻게 다릅니까?
3. 공회원들이 사도들에 대해서 부인할 수 없는 점이 무엇입니까(13-16)? 또 어떻게 위협하며 경계했습니까(17,18)?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까(19,20)?
4. 사도들의 말을 들은 성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23,24)? 그들은 핍박 자들을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까(25-28)? 그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29-30)?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31)?
5. 이상에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한 능력의 역사를 정리해 보시오. 당신은 무슨 이름 권세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제 3 강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씀/ 사도행전 3:1-4:31
요절/ 사도행전 3:6
“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3-7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복음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스데반의 순교로 일단락 짓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부활 메시지로 초대 교회가 탄생되고 복음 역사는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이런 과정에서 외적, 내적 시련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교회는 더욱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견고케 되었습니다. 오늘 제 3 강에서는 Ⅰ. 예수님의 이를 권세와 Ⅱ. 사도들의 복음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앚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 (3:1-10)
1절을 보십시오.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신자들은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하루 세번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풍속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으로서 영원한 맞수요, 영원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들은 과거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심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날카롭게 경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뼈가 썩느 고통을 당했습니다. 또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로서 기도 시가만 되면 졸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도 한 시도 깨어 있지 못하고 코를 골며 졸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숙한 주님의 종들이 되어 주님의 역사를 위해 합심 동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쟁의 대상이었을 때는 서로 미워하고 시기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고 서로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역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서로 세워주고 귀히 여기고 또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힘있게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독불장군식으로 되지 않고 동역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특히 두사람의 합심 기도를 통해 역사가 창조됩니다. 에수님은 마태 18:19절에서 악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어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그를 메어다가 성전 미문에 두었습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과 앉은 뱅이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곳에 출근하여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자비심을 이용하여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이때까지 한 번도 걸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4:22절에 보면 나이가 40여세였으므로 그는 반 평생을 앉은뱅이로서 구걸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걸어다니는 사람을 보면 괜히 밉고, 뛰어 다니는 사람은 더욱 미웠을 것입니다.그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 자학하며 몇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적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앉은뱅이로서 구걸하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간조건은 비참하여서 누구에게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는 남의 도움을 받지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앉은뱅이라느 인간조건 때문에 영적으로도 앉은뱅이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인간조건을 살펴볼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로부터 도음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라고 해서 남을 의존하고 구걸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불행한 인간 조건 가운데서도 믿음을 역경을 닫고 인간승리를 하 사람이 많습니다. 88년 장애자 올림픽 때 성화봉송을 한 ‘케니’는 태어날 때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서 수술하여 잘라버렸습니다. 그는 상반신만으로 손으로 스켸이트 보딩을 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동네에서 가장 맑고 환한 이생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혜화동의 한 앉은뱅이는 열쇠 깍는 일을하여 돈을 벌어서 빌당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라는 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고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짐승과 달리 두 발로 걸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립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이란 두 발로 땅을 딛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자립적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자립적으로 살 때 삶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좀 어렵다고 해서 호흡이 코에 붙은 사람을 의지하고 도움을 바랄 때 비참하게 됩니다. 자립적인 사람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역경을 극복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 주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섬겨 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영적인 앉은뱅이는 매사에 남을 의존합니다. 또한 사랑 깡통을 차고 사랑을 구걸합니다. 또 제발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며 이해를 구걸합니다. 잘한 것은 없지만 인정해 달라고 하며 인정과 칭찬을 구걸합니다. 이런 자는 거지심정이 되어 항상 무엇인가 얻고자 합니다. 이 때문에 그 내면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이런 자의 심정은 비참합니다. 앉은뱅애의 또 다른 특징은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사람은 성장하는데 큰 기쁨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지 않는다면 부모에게 큰 염려와 슬픔이 됩니다. 사람은 키가 자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라나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나이는 많지만 정신연령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자라나야 됩니다. 또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신앙이 자라지 않는 다면 엉적인 앉은쟁이인 것입니다. (엡4:13, 15)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다르게 성장할 때 근본적으로 기쁨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부족함을 느끼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까? 어린아이의 특징은 인내심이 없고, 문별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어린아는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잘 받고 불평 불만이 많고 원망을 잘합니다. 이런 어린아리 상태에서 성장한다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남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고, 품고 섬기는 자가된다는 것입니다. 또 무책임한데서 책임성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이 되어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나다. 이렇게 성장할 때 신앙생활에도 은헤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한지 5년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영적 성장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자신도 항상 비참한 심정을 느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앉은뱅애를 어떻게 도왔습니까?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려 하자 앉은뱅애는 반사적으로 구걸을 하였습니다. “한 푼 줍쇼”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도우려면 가장 먼저 상대방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피상적으로 볼 때 상대방을 제대로 도울 수 없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주목하여 보고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무슨 수입이 생긴 모양이다 생각하고 깡통을 쳐들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걸하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6절을 모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 고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빼빼마른 그의 발과 발복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신기하여서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깡충깡충 뛰어 보기도 하며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는 최초로 aingspraition강사가 되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사람을 돕는 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복자는 사람을 돕는 자입니다. 저는 20여년 동안 목자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돕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선한 마음으로 돕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도와 주고도 원망을 등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자님 때문에 내가 망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는 목자 사표 내고 싶습니다. 사람을 돕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잘못 도울 때 병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바로 도울 수 있습니까? 현재 앉은뱅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은과 금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은과 금을 줄 때 시급한 현실 문제는 해결될지 모르나 그의 근본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돕는 바른 길은 현재 좀 아픔이 있지만 그가 그본적으로 자립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믿음을 심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앉은뱅애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심고 믿음으로 일어나 걷도록 도왔습니다.
우리는 양들을 도울 때 동정하여 양들을 앉은뱅이로 만들어 놓기 쉽습니다. 대개 앙들은 초기 단계에서는 목자와의 괸계성을 통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양들은 목자의 관심과 사랑을 목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아느 단게에 가서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을 갖고 영적으로 자립하도록 도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목자의 품속에서만 있도록 싸고 돈다면 영적으로 앉은뱅이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게 손을 떼라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듯이 양이 자립적인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려면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과거 자기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때 그는 번번히 실패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 수 밨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의 역사를 바라보고 깜짝 깜짝 놀라기만 했습니다. (막11:22) 그가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의지했을 때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있는 주님의 종이 되 었습니다. 그는 능력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초 당하시고 죽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근본적으로 못쓰게 만드는 죄와 사망 권세를 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 할 때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랄 수 있습니다.
Ⅱ.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베드로 (3:11-26)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백성들은 놀라 솔로몬 행각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 광을 내고 백성들로부터 제사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돌리고 적극적으로 에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조상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님을 부인하고 빌라도에게 넘겨 주어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들은 이 일의 증인입니다.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모세와 사무엘과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약속된 메시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애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을 통해 천하만민을 복주시고자 하십니다. 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돌이켜 그 악함을 버려야 합니다.(19,26) 그리할 때 죄사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남자만 약 오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4:4) 그가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권세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Ⅲ. 공회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한 베드로 (4:1-31)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와서 두 사도를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하는 것을 싫어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면 반드시 이를 시기하는 사단의 역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의 기둥인 두 사도가 갇힘으로 복음 역사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두 사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렸던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과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사도 를 한가운데 세우고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되면 오금이 떨리고 사지가 마비되어 함마디도 대답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이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먼저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이 에수님은 그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권세입니다. 이 이름 권세는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유일합니다. 석가나 공자와 같은 이름은 우리에게 이성과 양심을 깨우쳐 주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또 세상 권세는 사람을 짓눌리고 못쓰게 만들지만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사람을 살려 줍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정욕과 자의식과 운명의 노예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살리사 이 시대의 믿음의 아버지요, 기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살려 주시는 권세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할 때 살아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공회 앞에서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무식한 갈릴리 촌놈들인 줄 알았다가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 그돌은 결국 이후로는 에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앞에서 너희 말드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사람 앞엥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권세잡은 자들을 조금도 우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라씀을 등고 진리 편에 섰습니다. 그들에세는 하나남의 종으로서의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오히려 사도들의 용기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놓이자 성도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다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관원들의 핍박이 시편 2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허사를 경영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의 역사를 행하며, 백성들과 공회 앞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것을 살펴 모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불리워졌습니다. 이는 무시하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무시를 당햇습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살리사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 만민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의지함으로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