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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

by Mark Yang   04/23/2022  

Question


사도행전 제 8 강

안디옥 교회

말씀 11:19-12:25

요절 11:26

I. 안디옥 교회 (11:19-30)

1.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까 (19-20)? 주께서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21)?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어떻게 지원했습니까(21)?

2.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23,24)? 그는 누구와 동역하여 무엇을 했습니까(25-26)?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어떤 새로운 두가지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26-30)?

3. 이상 안디옥 교회를 통해 부흥의 비결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II. 베드로의 출옥 (12:1-25)

1. 헤롯이 누구를 죽였습니까(12:1,2)? 또 왜 베드로를 옥에 가우었습니까(3,4)?

2. 교회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6-19)?

3. 헤롯이 왜 충이 먹어 죽었습니까(20-23)?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24)?

4. 이상에서 기도하는 교회를 툥해 헤롯의 권세를 물리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Message


사도행전 제 8 강

안디옥 교회

말씀/ 사도행전 11:19-12:25

요절/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탄생한 이방 교회인 동시에 이방 전도의 본부로서 선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챤이란 명칭도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으며, 또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임이 안디옥 교회와 같이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모임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안디옥 교회의 탄생 (11:19-30)

첫째, 무명의 용사들(19-21):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핍박자 사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사방으로 흩으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함으로 복음의 불길이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었으며, 또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아프리카에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환란으로 인해 흩으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함으로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순교를 세계선교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일어난 핍박으로 성도들은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사방으로 흩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처없는 나그네가 되어 장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슬피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신앙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으로 모든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메신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위대한 복음의 전진이었습니다. 여기서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으로서 수리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수리아 안디옥은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가는 도시로서 ‘동방의 로마’, ‘동방의 여왕’이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에 이방 선교의 본부가 세워진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유다이즘을 뛰어넘지 못하고 동족인 유대인에게만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사고가 비교적 개방적인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용기를 내어 밑져봤자 본전식으로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고 주께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그들의 믿음의 용기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믿음의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적, 외적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 자부심으로 인해 종교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와 같이 여기며 멸시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유다이즘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다이즘은 무의식 세계에 깊이 박혀 있어서 좀처럼 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부정한 음식은 결코 먹을 수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유다이즘은 이방 선교를 하는데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이었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은 지성을 최고의 덕성으로 삼고 이성을 중시하며 논리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사고방법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가 힘든 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그들에게 미련하게 여겨졌습니다(고전1:22,23). 그러나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은 복음의 우월성과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닫고 파멸해 가는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단순하게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음의 용기를 가진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외적 타이틀이나 직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 볼 때 하나님께서 타이틀을 가진 자들보다 오히려 이름 없는 평신도들을 더욱 귀하게 쓰셨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들은 사도나 직분을 가진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무명의 평범한 평신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의 용기를 크게 축복하사 안디옥 교회가 탄생케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를 귀하게 쓰시는 분이심을 배웁니다.

셋째로, 주의 손이 함께 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허다한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이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섬기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노력으로 안되고 근본적으로 주의 손이 함께 하셔야만 됨을 말해 줍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할 때 따지기 좋아하고 인본주의적인 교만한 헬라인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러시아의 수많은 양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할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주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됨을 배웁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22-26a):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유능한 성경선생인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그들은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고 유다이즘을 뛰어 넘어 성령의 역사에 있는 곳에 성경선생을 파송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지원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심히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나바는 현재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뿌리를 내림으로 개인신앙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바나바는 사업적인 욕심을 가지고 그들을 푸시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을 자기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그들이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음으로써 개인신앙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바나바는 실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한 사람의 영향력은 큽니다. 영적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는 영적 기초를 든든히 놓게 되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이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개 수적으로 불어나게 되면 이에 말려들어 붕붕 뜨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로 이때 무엇을 했습니까? 25,26a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로부터 몇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바나바는 영웅주의를 극복했습니다. 대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함께 동역하기보다 혼자서 함으로써 영광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양을 칠 때도 내 혼자서 돌봄으로써 영광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웅주의라고 합니다. 이 영웅주의 때문에 우리는 동역을 잘 못합니다. 또한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역사에 끌어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그 그늘에 가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되는 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믿음으로 이런 영웅주의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또 양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훌륭한 바울을 역사의 무대에 끌어들임으로써 빛을 보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스타를 탄생시킨 감독과 같이 진정으로 위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영웅주의는 큰 원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영웅주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둘째로, 바나바는 역사가 부흥할 때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역사가 부흥하면 들뜨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로 이때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유능한 성경선생인 사울을 데리고 와서 일년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로써 그들의 신앙이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무리 중심에서 제자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나아가 13:1절에 보면 유능한 성경 선생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모임의 성장은 성경공부와 비례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말씀을 열심히 공부할 때 우리의 믿음은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동역의 중요성입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둘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역사는 베드로와 요한의 동역의 역사였고, 안디옥 교회의 역사는 바나바와 바울의 동역의 역사였습니다. UBF의 역사도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의 동역의 역사입니다. 두 사람의 합심동역 역사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마태복음 18:19절은 말합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또한 전도서 4:12절은 말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동역의 역사를 이루려면 한쪽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죽고 싶지 않고 상대방이 죽고 동역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동역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웅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동역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크신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의 특징(26-30): 26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특징을 몇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안디옥 교회는 말씀을 사랑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두 사도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칠 때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를 좇아 갔습니다. 이는 그들이 말씀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말씀을 상고함으로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뿌리를 말씀에 깊이 내리고, 말씀에 기초하여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역사관과 세계관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렸을 때 그들의 인생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늘 생명력이 넘쳤고 철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개인이나 모임은 언제나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고 반드시 성장하게 됩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지식이 쌓이면 바리새인과 같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공부를 이론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26b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당시 신자들은 제자들, 형제들, 또는 성도들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크리스챤이란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신자들을 조롱 비슷하게 부른 별명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예수쟁이란 뜻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말씀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챤이란 “a man in Christ"의 준말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처음에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었으나 후에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당시 크리스챤들은 이 이름 때문에 많은 핍박과 수모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챤으로서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이란 결코 값싼 이름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긴 참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무엇엔가에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은 돈 밖에 모르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합니다. 정욕에 미친 사람은 모든 것을 정욕적으로 생각합니다. 콤퓨터에 미친 사람은 자나 깨나 콤퓨터만을 생각하고 오로지 콤퓨터만을 위해 삽니다. 우리가 미쳐도 바로 미쳐야 됩니다. 세상에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불신자와 같이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습니다. 우리는 불신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불신시대요, 절대 진리를 상실한 상대주의 시대요, 물질과 쾌락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음란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영향력을 받고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크리스챤으로서 스피릿을 상실하고 맛잃은 소금과 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함으로써 불신 세상에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주는 정신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유대 형제들이 흉년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대로 부조를 하였습니다. 대개 개척기에는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척기에 다른 곳을 도와 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사업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하신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복음정신과 선교정신이 충만한 안디옥 교회를 크게 축복하사 세계선교의 발전소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Ⅱ. 베드로의 출옥 (12:1-25)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이때까지는 종교 지도자들이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정치권의 핍박이 가해졌습니다. 정치권의 핍박은 힘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는 속수무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헤롯왕은 아그립바 1세로서 헤롯대왕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야고보를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제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순교하고 또한 베드로마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들은 베드로를 구원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감옥을 습격하거나 아니면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주님께 있음을 믿고 주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헤롯의 무력 앞에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절망과 슬픔을 극복하는 힘이 있었고, 위기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삼중 사중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베드로를 옥에서 기적으로 풀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낙심이 되어 쇠사슬에 묶여 자고 있을 때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치며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너는 왜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느냐? 하며 깨웠습니다. 그러자 쇠사슬이 저절로 풀리고 옥문이 열려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음날 헤롯이 베드로를 찾아도 찾지 못하자 애매하게 파숫군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헤롯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교만하게 굴다가 주의 사자가 쳐서 벌레에 먹혀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은 결국 다 비참하게 멸망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였습니다(24).

결론적으로 우리의 모임이 안디옥 교회와 같이 말씀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참된 크리스챤이라 일컬음을 받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만민 구속역사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