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제 1 강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말씀/ 로마서 1:1-17
요절/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는 A.D. 58년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당시 3년 동안 에베소 개척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이를 통해 로마 선교에 대한 불타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행19:21) 그는 후진국 청년으로써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환상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환상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강렬한 영적 소원은 불후의 작품인 대로마서를 낳게 하였습니다. 영국의 시인이며 유명한 문학 평론가였던 콜리지는 로마서를 “세계 최대의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는 신약 성서의 중심부요, 순수한 복음이라고 했으며 칼빈은 성서는 로마서에 비춰볼 때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빛을 깨닫고 변화된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러했고, 루터가 그러했으며, 존 웨슬레가 그러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과 달리 문제 해결을 위한 서신이 아니라 복음의 진수를 조직적으로 쓴 교리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공부하게 되면 복음을 체계적으로 알게 되어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의 서론입니다. 본문에서 첫째, 복음에 대하여, 둘째, 복음의 종 사도 바울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한 분 한 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사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Ⅰ. 그 이름을 위하여 (1-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1)
1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서신 첫머리에서 먼저 자신의 신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종은 당시의 노예를 의미합니다. 노예는 주인의 마음대로 사고 팔고 할 수 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고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그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본래 자기 의가 강한 자로 누구에게도 자신을 굽힐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충성하고 예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면 어쩐지 얽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엇인가 얽매어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돈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섬기고, 세상 지식을 섬기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신음합니다. 이런 것들의 종이 될 때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만이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고 심령에 참 생명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길밖에는 자유로운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배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그 분만을 섬기고 그 분에게 충성하고 그 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입니까?
바울은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란 어떤 특정한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을 자란 뜻입니다. 여기서 사도란 예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를 말합니다. 당시 사도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그는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이 때 강렬한 빛이 그를 비추어 거꾸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는 이를 기초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도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대한 확신 때문에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고전15:9,10). 그리고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고전15:10).
또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택정함이란 어떤 특별한 일을 위해 구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당시 복음은 널리 전파되지 못하였고 또 복음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변명하고 확증하고 온 세상에 널리 전하는 사명을 맡은 것입니다. 그는 이를 위해 마음을 쓰고 자신이 배운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였습니다. 이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과학 문명과 자유주의 신학 사상, 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말미암아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십자가와 복음, 부활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순수 복음을 변명하고 확증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또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특수 사명입니다. 어떤 모임은 산업 전도를 위해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또 학생 복음 운동 단체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UBF는 세계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UBF는 꼭 대학생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가 의문을 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이 일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자신이 어떤 자이며 또 사명이 무엇인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는 확신이 있었고 분명한 인생 목적이 있었고 방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양마가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아 캠퍼스 복음화를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복음에 관하여 (2-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한 후 계속해서 이 복음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복음의 기원 (2)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 복음은 하나님이 ……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를 여자의 몸을 통해 허락하시겠다는 원시 복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창3:15). 또한 아브라함의 씨에서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여러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이란 복음 역사를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또 완성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복음은 머리 좋은 인간이 공교히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여기서 성경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5:39절에 보면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장소, 탄생 방법, 그의 생애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성경에 미리 예언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근거는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가지 통일된 메시아 사상이 줄기차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명백한 사실 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것입니다.
② 복음의 내용 (3,4)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첫째, 인간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왕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을 생각하고 예수 믿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흠모하는 왕으로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씨를 통해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약속된 메시아로서 다윗의 위를 물려받을 왕이심을 말해 줍니다 (눅1:32).
둘째,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결의 영이란 거룩한 영이란 뜻입니다. 인간적인 것과 대조하여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실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되고 선언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죽음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사망 권세에 굴복하여 왔습니다. 사망 권세는 인생들 위에 왕노릇하여 인생들을 허무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리고 모든 행복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의 가장 큰 원수는 사망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인생들에게 참된 희망과 승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할 메시아가 되십니다.
(3) 은혜와 사도의 직분 (5-7)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엇을 받았다고 말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생 목적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말합니다. 즉 죄값으로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되는데 특별사면을 받아 구원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데 앞장 선 자였습니다. 그는 복음 역사를 훼방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하면 마땅히 사형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주시고 그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를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사도 바울은 또한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사명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덧입은 것과 동시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그릇으로 택함을 입었습니다 (행9:15). 우리가 은혜만 받고 구체적으로 할 일이 없다면 그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함과 동시에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받은 바 사도의 직분은 구체적으로 모든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을 섬기며 음란했습니다 (롬1:23-27, 행15:20). 또 영적으로 무지하고 자기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불순종과 반항심이 강했습니다. 이런 이들을 믿어 순종케 한다는 것은 마치 망치로 큰 바위를 부수는 작업과 같이 힘든 일입니다. 많은 영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양들의 죄악과 타협치 않았습니다.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믿어 순종케 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믿고 구원받고, 믿고 은혜 받고, 믿고 축복만 받도록 하고 무책임하게 끝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때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6: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허락하신 것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순종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는 인간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히5:8).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사 만민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그 이름을 위하여 감당했습니다. 바울의 인생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과거 자기 명예를 위해 살았습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사울로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이름을 본딴 것입니다. 그는 자칭 큰 자로 생각하고 한없이 교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스스로 작은 자가 되어 이름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케 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복음 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함으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 은혜와 사명을 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6,7절에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도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Ⅱ. 빚진 자 사도 바울 (8-15)
사도 바울은 먼저 로마 성도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째 감사 제목은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개척된 것이 아닙니다. 16장을 참조해 볼 때 로마 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로마로 이민해 온 자들로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거대한 로마에서 믿음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부와 권력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또 갖가지 미신과 이방 종교와 사상들이 범람하여 로마는 마치 온 천하 종교의 진열장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와 육신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분위기 가운데서 믿음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 성도들은 중심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에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는 여러 번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만큼 로마는 세계 선교 전략상 반드시 정복되어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진국 이스라엘 청년으로서 거대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이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에게는 로마 선교에 대한 불타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이 비전은 그의 심정에서 꺼지지 않는 활화산과 같이 타올랐습니다. 그는 이 비전 때문에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길이 막혔습니다. 그에게는 비자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 길이 막히면 낙심하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치 않고 하나님께서 좋은 길 열어 주시도록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까지 로마에 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들에게 영적 선물을 나눠주어 견고케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영적인 선물이란 15절과 연결시켜 볼 때 사도 바울이 간직하고 있는 복음의 비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계시로 받은 복음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로마 성도들은 믿음은 있었지만 평신도들의 모임이라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복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 문화에 말려들어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을 복음 위에 견고히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차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둘째는, 그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이 1:1 성경 선생이 되어 세계 선교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 가서 그들에게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좀 더 근본 이유는 빚진 자 심정 때문입니다. 다같이 14,15절을 읽어봅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헬라인이란 헬라의 문화와 사상을 알고 헬라어를 쓰는 지성인들을 말합니다. 야만이란 헬라어 외에 거친 외국어를 쓰는 자들을 말합니다. 또 지혜 있는 자는 교육을 받은 자요, 어리석은 자는 교양이 없고 무식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만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세상 만민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빚을 진 자는 갚아야 된다는 책임감과 안타까운 심정뿐입니다. 빚진 자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또 겸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무슨 빚을 그렇게 많이 졌기에 온 세상 만민을 향해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합니까? 바울이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 은혜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복음 역사를 훼방하고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전하는 사명까지 맡기셨습니다. 그는 일생 은혜의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 그의 심령은 감사의 눈물과 함께 사명감으로 불탔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심령으로 어찌하든지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18:24에서 우리는 주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일생 아무리 힘써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은혜의 빚을 갚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 놓고 값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값없이 받았으므로 값없이 전했습니다. 또 그렇게 많은 일을 해 놓고도 조금도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잘 것 없는 후진국 청년이 강대국 로마를 위시하여 온 세상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세상 만민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또 능력있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목자의 심정입니다. 이 빚진 자의 심정이 있을 때 사도 바울과 같이 열정(passion)이 있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Ⅲ. 복음의 능력 (16,17)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권세와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들이 처형 받는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고전1:23). 오늘날도 사람들은 고도의 과학문명을 자랑하고 부와 권세를 자랑합니다. 세상권세 잡은 자나 박사 학위나 엄청난 부를 소유한 자를 보면 예수 믿는 것이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떳떳이 나타내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움은 시대의 분위기보다 복음에 대한 확신의 결여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16).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하다는 성서적 인간관이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은 어떤 죄인이라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구원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만이 인생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됨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에 복음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어떤 몹쓸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것으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강도가 회개했을 때 그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복음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고, 탕자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이 되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에베소는 우상숭배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또 마술을 행하던 자들은 책을 모아 은 오만 어치나 되는 책을 불사르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우상과 구습이 타파되고 새 생명의 역사가 창조됩니다. 변하여 새 사람되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 캠퍼스의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능히 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교만과 섹스와 마리화나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미국 지성인들을 변화시키사 Full Time 목자의 인생을 살게 합니다. Bill Rankin 목자는 히피 출신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를 변화시키사 인디아나 대학을 개척하는 Full Time 목자가 되게 했습니다. O.S.U의 Teddy Hembekdides 목자는 레바논 부호의 아들로서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졸업 후 좋은 취직자리를 버리고 U.W. Madison 대학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변화되기 힘든 사람을 보면 소망을 두지 않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리 힘든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학사회의 정연영 목자님은 고집이 세고 반항적이라 변화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절대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연배 목자는 복음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변화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과연 그는 놀랍게 변화되어 이제는 평신도 목자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17).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에는 죄를 미워하고 불의를 용납치 아니하신 의로운 속성이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하시고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으로 죄인을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인에 대한 구속의 사랑이 조화되어 나타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간직되고,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 곧 신자를 말합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하박국 2:4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 세상은 불의하고 부정부패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욕심과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고 어리석은 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런 때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의미한 것같이 보입니다. 항상 손해만 보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하여 돈과 권세와 처세술대로 살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이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의인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 때만이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을 수 있고 (히11:6),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한1서5:4).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죄사함의 은혜와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