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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21-4:25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로마서 제 3 강

믿음의 본질

말씀/ 로마서 3:21-4:25

요절/ 로마서 3:25a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우리는 지난 2강에서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있음을 배웠습니다. 인간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이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호화로운 맨션 아파트에서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들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암환자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과 절망 가운데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과 같이,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사형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절망 상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무서운 절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인간들에게 구조선이 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구원의 배에 오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들을 위해 놀랍고도 크신 일을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놀랍고 기이한 역사를 단순히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도리가 무엇인가?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믿음의 본질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구원의 도리 (3:21-31)

(1) 하나님의 의 (3:21-22)

3: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씀은 2강의 총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란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공로를 의미합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여 선행을 쌓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제는”이라는 말은 “그러나 이제는”(but now)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환점을 말해 줍니다. 이때까지 상술한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의 인식과 정죄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의 용서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구원의 희망이 있습니다. 율법의 세계에서 은혜와 사랑의 세계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전환은 암흑의 세계에서 밝은 빛으로의 전환이기에 위대한 전환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는 전혀 별도로’라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한 의는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지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증거를 받은 것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별도로 나타났기 때문에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아니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내리는 의롭다 하는 판정을 의미합니다. 즉 사형수에게 특별사면이 내려진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이 은혜는 모든 인류가 다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임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내려졌지만 이 선물은 환영하고 기쁨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만 임합니다. 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아프리카 사람이나, 또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빈부 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이 은혜가 임합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맑은 공기와 빛나는 태양 빛을 주셨습니다. 어둡고 꽉 막힌 방에는 공기가 탁하고 햇빛이 없기 때문에 육체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갖가지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율법의 방에 갇혀서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호텔에 불이 나면 시커먼 연기가 방안에 들어와 사람을 질식케 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죄의 오염된 공기로 인해 질식하여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선한 은혜의 공기와 밝은 생명 빛이 심령에 강렬하게 비치게 됩니다. 그때 심령은 소생하게 되고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죄의 세력이 힘을 잃게 되고 고통과 번뇌가 사라지게 됩니다. 심령에 역사하는 모든 운명과 슬픔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물러가고 말할 수 없는 희열과 환희와 감사와 찬송이 심령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혜지만 너무나 쉽고 단순합니다. 겸손하게 마음의 문만 열면 됩니다.

(2) 예수님의 피 (23-26)

그러면 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임하게 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은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죄란 화살이 표적을 빗나가듯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목적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또 영광이란 헬라어로 ‘독사(δόξα)’로서 무게(weight)란 뜻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저울대에 달아보니 근수가 모자란다 (다니엘 5:27)는 뜻입니다. 인간은 범죄한 결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저울대에 영적 무게가 나가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창1:31). 하나님은 인간을 동물과 달리 도덕적,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닌 차원 높은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고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전락한 인간의 모습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동물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된 인간을 보시고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창6: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인생은 하나님의 본래 목적에 어긋난 인생이요, 하나님의 절대 수준에 미달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도자기를 굽는 토기장이가 수준에 미달된 도자기는 부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다? 24,25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의를 구현시킨 중요한 세 가지 낱말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낱말은 두고 두고 매일 새롭게 마음에 되새기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A. 구속(救贖: Redemption)

구속이란 우리를 얽어매는 拘束이 아니라 반대로 얽어매는 데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두고 쓰여진 말입니다. 노예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반드시 누가 몸값을 지불해야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노예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예라고 해서 인간적으로 반드시 비참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호화 주택에서 벤츠를 굴리며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습니다. 여가를 이용하여 테니스, 등산, 스키를 즐기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출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절대적인 사명을 잃고 소시민으로 사는 생활은 성서적으로 볼 때 다 노예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사명의 소유자입니다 (창1:18).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사명이 있을 때 의미가 있고, 꿈이 있고, 생명이 약동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잃은 인생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이 방황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여 사명을 잃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8:34). 죄의 종된 자는 자기가 원치 않는 죄를 짓고 밤마다 악령에 시달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몸값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 (벧전1:18,19). 이는 실로 값비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B. 의롭다 함을 얻음(Being justified)

‘의롭다 함’은 로마의 법정 용어로서 ‘죄없다 함을 인정받음’, ‘형벌에서 사면 받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죄없다고 무죄 선고를 하시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죄를 용서해 주시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대우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물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환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온전히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한 번만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현재 분사로서 ‘언제나’, ‘항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항상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언제나 성결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때로는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여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유혹을 이기고 기쁨에 넘치지만, 때로는 유혹에 져서 비통에 처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지만 작심삼일 어느새 결심이 허물어지고 반복해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을 위선자로 보고 또 의지가 약한 자로 자학하게 됩니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 절망하게 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 무슨 염치로 나아갈 수 있을까 깊은 불의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한 번 두 번이지 반복해서 죄를 범할 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과 회의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반복해서 죄를 지을지라도 다만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새롭게 의롭다 해주십니다.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 죄를 지었을지라도 다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 되게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요한1서1:9).

C. 화목 제물(속죄 제물: expiation, sacrifice of atonement, propitiation)

화목 제물이란 구약의 제사 제도를 배경으로 두고 한 말씀입니다. 성막의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뿌림으로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하는 속죄 제물로 삼았습니다.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죄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속죄 제물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를 화해시키는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데는 반드시 희생의 피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반드시 피를 요구하십니까?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레17:11,14). 죄는 연탄가스와 같이 지독한 것이어서 생명이 희생되지 않고서는 사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히9:22). 그러나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그 효력도 제한적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못합니다 (히7:27,28). 이는 장차 올 완전한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히8:5).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들과 화목하시기 위해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요한1:29). 예수님은 고귀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온전하고도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히9:12). 이제는 더 이상 번거로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10:29). 이것은 실로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악된 속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5b,2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반드시 그 의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했습니다(1:22). 이로 인해 하나님의 체면이 깎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그의 거룩하신 이름이 짓밟혀 왔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로부터 높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들을 길이 참으신 이유도 그의 이름 때문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요,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8:9,1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게 된 것도 그를 통해 무너진 의와 공도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창18:19).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도 무너진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의 첫째 기도 제목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실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들은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 공의와 사랑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옛날 중국의 어떤 나라에 봄철이 되어 보리와 밀이 무르익어 갈 때 술마신 후 말을 타고 밀밭을 망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노발대발하여 그런 자는 두 눈을 뽑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임금의 명령은 법이 되어 어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잡혀 왔는데 공교롭게도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장차 대를 이를 황태자였습니다. 임금은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멸하지 않는다면 법이 서지 않게 되어 나라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또 아들의 두 눈을 뽑자니 아버지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임금은 부자는 한 몸이니 자기의 눈 하나와 아들의 눈 하나를 빼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써 공의와 사랑을 다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인생들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무서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미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못 본 척 지나쳐 버리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실 때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길이 참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3) 믿음의 보편성 (3:27-31)

사도 바울은 1:18-3:20절에서 죄의 보편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 때 그는 죄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받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는 믿음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왜 자랑할 것이 없습니까? 이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의 법 곧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기 때문입니다(27). 이 믿음의 법은 유대인과 같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으로”라는 로마서 주제를 강조하다 보면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법이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31). 이는 믿음으로 살 때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율법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었을 때는 우리를 얽어매고 죄의식을 심어 주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는 심령에 감사와 기쁨이 넘쳐 율법을 지킬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Ⅱ. 아브라함의 믿음 (4:1-25)

이때까지 사도 바울은 심오한 구속의 비밀을 짧고도 단순하게 단숨에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구원의 비밀을 이 정도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든지 이해를 돕기 위해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구약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이미 증거를 받은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1) 믿는 자의 행복 (4:1-12)

A.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 (1-3)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조상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그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3) 이 말씀은 창세기15: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신앙적으로 큰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믿고 신앙 생활했으나 10년이 다 되어도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하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하늘의 뭇 별을 바라보게 하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말씀하셨습니다. 현재 딸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 말씀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라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양을 많이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허물과 실수투성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B. 다윗의 행복론 (4-8)

다윗은 율법 시대에 살았으나 사죄의 은혜를 덧입은 대표자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의 훌륭한 인간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기초로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자는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아니하고 죄만 지은 자에게 품삯을 준다면 이는 순전히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는 믿는 자의 행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7,8) 다윗은 위대한 장군이요, 정치가요, 시인이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아무 죄없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도 시를 읊고 비파를 뜯었습니다. 그가 비파를 뜯으며 노래를 부를 때는 악령에 시달리는 자도 상쾌함을 얻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권세와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녔습니다. 그의 인간 조건을 볼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인생의 참행복이 있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사죄의 은혜를 받은 자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충신 우리아를 무고히 전쟁터에서 피흘려 죽게 했습니다. 그는 이 때문에 악몽을 꾸고 심한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죄를 토설치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함으로 그 뼈가 쇠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왕좌에 있어도 죄문제를 해결 받지 못할 때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다윗이 맛본 행복은 오직 믿음으로 사죄의 은혜를 덧입은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환경 조건이 나빠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심령에 죄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는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C. 믿음의 자취 (9-12)

그러면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만 미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행복이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믿음으로 사는 모든 자에게 미침을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는 85세 이전의 일이요,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11). 아브라함은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 믿음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므로 후손들에게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자손들에게 물질적 유산, 문화적 유산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후배나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길 때 그들은 쓸데없이 무의미한 방황을 하지 않고 그 믿음의 자취를 따라 살게 됩니다.

(2) 믿음의 역사성과 세계성 (13-17a)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언약은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이를 기초로 그의 후손인 메시아를 통해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만일 율법으로 되었다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 약속은 소용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룰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을 믿음으로 말미암게 하신 것은 은혜에 속하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약속을 후손들에게 보장하기 위함입니다(16a).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율법에 속한 유대인 신자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16b).

여기서 우리는 믿음에는 두 가지 성격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성입니다.

4장에서 ‘조상’이란 말이 5번 나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후손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도 아브라함만 구원받고 편히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축복 받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그 후손들을 축복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 자신 뿐 아니라 자식들과 후배들, 앞으로 올 뭇별과 같은 후손들을 위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세계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천하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도 세계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세계인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고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4:17b-25)

그러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17b절을 보십시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는 권능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 “내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구체적인 약속 한 마디를 붙들고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백세가 되어 죽은 자와 방불하고 또 사라는 90세로 태가 말라 비틀어졌지만 그의 연약한 인간 조건을 바라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능히 약속을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인간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에 굳게 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힘든 인간 조건, 절망적인 상황이 문제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그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을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임을 말해 줍니다(24,25). 십자가와 부활, 특히 부활은 합리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결론 : 이상 3강을 공부해 볼 때 우리 마음에 부딪혀 오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오래 참으셨습니다. 마침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심판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사랑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녹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그리스도를 피흘리게 하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리스도의 피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① 우리를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신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믿을 때 이상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 나같이 죄많은 자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 의심합니다. 또 힘든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런 사람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불신에 빠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어떤 몹쓸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의 강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히9:13,14절을 보십시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② 거룩하심을 사모하게 합니다. 우리는 변화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너무 변화되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염려합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에 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죄의 습성에 젖은 내가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예수님의 피는 내 속에 역사하여 더러운 피와 점차적으로 교환 수혈됩니다. 이 때 죄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죄를 꺼려하는 상태로, 꺼려하는 상태에서 미워하는 상태로, 거룩하심을 부담 느끼는 상태에서 사모하는 상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자신도 모르게 거룩함을 사모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③ 사명인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복의 근원으로서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 연약함을 이기고 사명인으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의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