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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6:23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로마서 제 4 강

믿는 자의 새 생활

말씀/ 로마서 5:1-6:23

요절/ 로마서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제 3강에서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용서받은 죄인 곧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사단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신앙생활이란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 제 4강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가 무엇이며, 믿는 자의 새 생활은 어떤 것인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 (5:1-11)

5: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 말씀은 제 3강의 결론이 되는 동시에 4강의 전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결과가 무엇이며, 또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만 누리다가 마음이 해이해져서 무기력하게 지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고 난 후 믿기 전보다 더 투쟁력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새 생활의 시작에 불과함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긴장된 생활을 하며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그리고 입학을 하고 나면 다 된 줄 생각하고 해이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입학은 새로운 대학 생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입학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입학 후의 생활도 중요합니다. 대학 시절 동안 한 인간으로서 인격을 쌓고, 학문과 신앙의 기초를 쌓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도 중요하지만 출애굽 후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새 생활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가 무엇이며, 또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까?

(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됨 (1b)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오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얻기 위해 남몰래 여러 가지로 많은 투쟁을 합니다. 정신 수양을 위해 요가를 하기도 하고 좌선을 하기도 합니다. 또 마리화나를 피우기도 하고 일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은 겉은 평온한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환난과 곤고가 가득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5: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심령에 참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평화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와는 다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14:27) 이 평화는 돈 주고도 살 수 없고, 투쟁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온전한 선물입니다. 이는 마음에 깊이 묻힌 보배와 같아서 누가 도적질해 갈 수도 없습니다. 또 협박해서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이 평화는 바다의 저류와 같습니다. 파도가 아무리 요동해도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평화가 심령 깊숙이서 잔잔히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2) 은혜의 세계에서 살게 됨 (2a)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 우리는 은혜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율법의 세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율법의 세계는 인과응보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즉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에는 용서와 이해와 사랑 대신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의 요구에 맞지 않으면 조금도 봐 주지 않습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항상 긴장하며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는 부족하여도 봐 줍니다. 여기에는 용서와 이해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허물과 실수투성이지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또 형제를 대할 때도 어떤 요구보다도 있는 모습 그대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사는 자들은 더 이상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자학하지 않습니다. 남을 볼 때도 장점은 보고 키워 주고, 약점은 사랑하고 감싸주게 됩니다. 은혜는 정말 사모할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생활인지 믿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이 은혜의 세계에 서 있습니다.

(3) 참된 희망 안에서 즐거워하게 됨 (2b)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차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예할 것을 바라며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희망이 바뀌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우리의 희망은 땅에 붙은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부와 권세와 명예를 소유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참된 희망이 아닙니다. 세상의 희망은 성취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참 행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또한 죽음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예할 희망은 참된 희망이요, 영원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희망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만도 감사한데 장차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영광에 참예할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4)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됨 (3-5)

3,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 당하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여기서 환난은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특히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 되신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합니다 (요한15:19).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적당히 살고자 할 때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진리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크고 작은 조롱과 핍박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받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미움을 받고 쫓겨나기도 합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는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화형을 당하며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내가 진실 되게 살고자 하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따르는가 이상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 믿고 편할 줄 알았는데 이런 환난을 당하니 예수 믿는 것도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믿음 생활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벧전4:12,13).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환난을 당할 때 슬퍼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환난은 우리를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환난이 오면 인상을 쓰며 어찌하든지 이를 피해 보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환난 중에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환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심이 생깁니다. 이 인내심은 소극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역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말합니다. 즉 불요불굴의 정신이 생기고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그 원뜻이 실험에 의해 얻은 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내적 확신을 의미합니다. 또 연단은 품격(Character)을 의미합니다. 이는 내면적 인격을 말합니다. 즉 환난을 통해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이런 가운데서 흔들릴 수 없는 내적 확신이 생기며,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심령에 조각되는 것입니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이 소망은 세상의 거짓된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성취되면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우리를 허무하게 합니다. 일본의 가와바다씨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허무를 이기지 못하여 할복자살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통해 형성된 희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세상의 거짓된 소망을 털어 버리고 참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고난이여 오라!’하며 고난 자체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을 통해 소망이 형성되는데 이 소망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불같이 부은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 소망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됨 (6-8)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6-8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확증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선인을 위하여 용감하게 죽는 자는 혹 있습니다. 선인은 어질고 사랑이 많은 자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자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불사합니다. 심지어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떠한 자들이었습니까? 연약한 자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무력하고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경건치 않는 시커먼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로서 마땅히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이요,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런 자를 위해 누가 죽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4:10)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일이 잘되거나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또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감정적으로 또 조건적으로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증거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6)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됨 (9,10)

9, 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장차 무서운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은 더욱 확실한 일입니다. 본문에 ‘더욱’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더욱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7)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됨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요리 문답 제 1문에 보면 인생의 제 1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움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즐거움은 보는 즐거움, 먹고 마시는 즐거움, 스포츠 구경하는 즐거움, 아기자기한 즐거움 등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즐거움으로써 유치했습니다. 이런 세상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또 참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진리 안에서 진리 자체를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 공부하는 즐거움, 소감 쓰는 즐거움, 기도하는 즐거움, 양치는 즐거움, 심방하는 즐거움 등 고차원적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Ⅱ. 한 사람과 인류의 역사 (5:12-21)

우리는 9,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효력을 미칠 수 있는가? 또한 1990여 년 전에 예루살렘의 갈보리 언덕에서 있었던 사건이 1990여 년 후 오늘날 나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12-21절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복잡한데 한 마디로 한 사람의 중요성과 한 사람의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Type)입니다(14b). 아담을 통해 역사한 방법과 똑같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결과는 다르지만 역사 방법은 동일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12). 결국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인류가 다 죄를 범하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13,14절 말씀은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죄는 여전히 존재했음을 말해 줍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도 아담과 같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치 않았지만 죄인이라는 사실은 결국 죄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입니다(14).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 있어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은 오늘날 나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쳐 사망이 나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모든 인류에게 영향력을 끼쳤는데 그러나 그 내용이 다릅니다(15).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1990여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력을 끼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늘날 나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쳐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아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향권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새 역사 창조의 인물들입니다. 아담은 좋지 못한 죄의 역사, 불순종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생명의 역사, 순종의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C와 A.D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내 마음에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생애에 신기원(new era)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을 살펴볼 때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닌가, 양식을 축내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하며 나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나 한 사람이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은 가정과 학교, 사회, 더 나아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류역사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는 전체의 총화입니다. 나 한 사람이 없으면 인류도 없고 이 모임도 없는 것입니다. 매스컴 시대, 대량생산 시대에 한 사람과 1:1 말씀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첩경인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Ⅲ.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6:1-11)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구원함을 받은 자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합니까? 6장은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은 자가 이제는 죄에서 떠난 성결한 생활을 해야 됨을 말해 줍니다. 3장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배웠습니다. 4장에서는 이 도리가 구약에서 이미 증거된 것임을 이야기했습니다. 5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에 대해 상술했습니다. 이제 6장에서는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결한 생활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후 죄악된 옛 생활에 머물러 지냄으로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합니다. 우리는 죄문제를 해결 받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죄의 소욕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와 아들의 지위로 회복되었지만 방탕하는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병을 앓다가 나은 자가 병은 나았지만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기까지에는 시일이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일생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울 때 한 가지 확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6:1절은 5:20절에서 생기는 반론입니다. 5:20절 말씀의 뜻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입함으로 죄를 죄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말씀을 몰랐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를 하면 죄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고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더욱 절실하게 됩니다. 즉 죄사함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이런 말씀을 이용하여 그러면 은혜를 맛보려면 죄를 많이 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합니다. 어거스틴도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은혜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큰 일꾼이 되지 않았는가 하며 좋지 못한 경험주의에서 나온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는 죄를 짓고 싶은 자들이 죄를 합리화하고자 꾸며낸 궤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세례의 영적 의미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그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의미는 연합하는 것입니다. 본문 3-10절에는 합하여, 함께, 연합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는 세례의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나의 죄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 지내실 때, 나의 죄도 함께 장사 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지난 날에 지은 죄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4b절을 볼 때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됩니다. 또한 6:5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죽음의 요소를 벗어나 부활의 새 생명력을 덧입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이 다시는 그리스도를 주장치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8,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0,11) 여기서 ‘단번에(once and for all)’라는 말은 한 번 사건으로 전체를 대신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한 번의 사건이지만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번에 근본적으로 없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죄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함 받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죄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죄에게서 해방되었지만 죄의 속성이 잔존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은 하였지만 노예근성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활은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신하에서 죄 문제와 더불어 싸우는 생활인 것입니다.

Ⅳ. 죄의 종, 의의 종 (6:12-23)

6:1-11절은 우리가 왜 죄 가운데서 더 살 수 없는가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6:12절부터는 구체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은 자가 적극적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1) 적극적인 방향 전환 (12-14)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과거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기초로 살았습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감정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적극적인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즉 생명을 덤으로 받은 자 같이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체란 손, 발뿐만 아니라 생각, 생활 등 삶 전체를 뜻합니다. 이 지체를 자신을 위해 쓰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즉 생활이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학교 공부, 가정 생활, 직장 생활..., 결혼, 레크레이션,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자기를 중심으로 할 때 몸의 사욕에 순종하고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생활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병기’라는 말은 도구라는 뜻입니다. 도구는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칼은 의사가 사용하면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이지만 강도가 사용하면 생명을 죽이는 데 쓰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지체는 죄에게 드리면 불의의 병기가 되고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 ‘병기’라는 말에는 누구 편인가 하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의의 병기냐 불의의 병기냐 하는 것은 하나님 편이냐 죄의 편이냐 하는 뜻입니다. 무소속은 없습니다. 하나님 편이 아니면 죄의 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자도 결국은 죄의 편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죄의 편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죄의 소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적극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할 때 자연히 죄의 소욕이 물러가게 됩니다 (갈5:16-18).

(2) 새주인을 섬기는 생활 (15-23)

14절에서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은혜 아래 있어 율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15). 이는 은혜를 남용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순종하는가에 따라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16). 과거 우리의 주인은 죄였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 죄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부끄러운 열매를 맺고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21,23a). 그러나 이제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 곧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17,18).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새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생활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고(19), 결국은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23b). 과거 죄의 종이었을 때는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부패해져 갔습니다. 쓸모 없게 되고 결국 사망의 길로 줄달음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된 우리는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집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되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은혜 가운데서 감사함과 자발적으로 새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은 참으로 복된 생활입니다.

결론적으로 믿는 자의 새 생활이란 한 마디로 성결의 생활입니다. 죄에서 떠난 생활입니다.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생활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청춘과 내 인생 전체를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생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