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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11:36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로마서 제 7 강

하나님의 경륜

말씀: 로마서 9:1-11:36

요절: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서론: 1-8장까지 개인의 구속의 도리에 관한 말씀이라면, 9-11장까지는 전 인류의 구속의 도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민인 유대인들이 믿음으로 복음을 영접치 않고 율법에 기초한 행위를 의지함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은 영영 소망이 없는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정말 버리셨는가? 이런 문제를 안고 근심하며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이스라엘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고 그의 고통은 변하여 찬양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11:33-36).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과 온 인류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 무엇인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인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과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역사 방법을 말합니다.

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방법 (9:1-33)

(1) 바울의 고통 (1-5)

바울은 현재 중병을 앓는 환자와 같이 심한 고통과 근심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다(1,2). 그것은 자신의 개인 문제나 동족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이 구원받지 못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민족의 배반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바울은 누구보다도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동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은 그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영적 생명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있어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영적 생명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것마저도 내놓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받은 바 특권이 무엇이며, 이들은 이 특권을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그들은 양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출4:22, 신14:1).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친히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출24:17, 40:34). 언약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관계성을 맺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창17:1-14)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출19:4-6, 24:7,8). 노예 백성으로 감정과 육신대로 사는 그들에게 거울과 같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또 다른 민족들이 헛된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또 수많은 약속들을 믿고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 수많은 흠모하는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조상이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후손들은 원튼 원치 않든 조상들의 본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육신으로 하면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우리는 성지 순례 하려면 많은 돈을 들여야 되고 그것도 일생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생하게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특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특권들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나라가 부강하고 번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이민족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도 이스라엘을 이민족에서 구원하고 번영을 누리게 할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들을 특권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특권 중 가장 큰 특권은 세상 만민을 구원할 그리스도께서 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모든 특권은 이 한 가지 특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모든 특권을 저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로 인해 고통하고 있습니다.

(2) 참 이스라엘 (6-13)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온 인류를 구속코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고 배척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뜻이 폐하여지고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개념을 새롭게 함으로써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중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맏아들이었지만 약속의 자녀가 아니요, 육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신의 혈통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이삭의 동역자 리브가가 잉태를 했는데 쌍둥이였습니다. 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서로 먼저 나오려고 레슬링을 했습니다. 리브가는 너무 배가 아파서 하나님께 이 문제를 들고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치도 아니했는데 이미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을 절대 주권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혈통이나 인간 조건에 기초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으로 말미암아 된 자입니다.

(3) 토기장이와 진흙 (14-29)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지 않고 태어나기 전에 야곱을 택하신 역사 방법을 볼 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듭니다(14).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로서 원하시는 대로,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16).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고 그에게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또 강퍅케 된 자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께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20).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자기 마음대로 만들 권리가 있습니다. 예쁜 커피잔을 만들 수도 있고 변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필요가 없을 때 부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절대 주권으로 인간을 괴롭히고 멸하는 데 사용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함으로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나오는 진노의 그릇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멸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24-26). 또한 23절에 나오는 긍휼의 그릇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서도 은혜로 부르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그 선하신 주권대로 역사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진흙과 달리 인격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면서 때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방법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나님께 불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에 맞추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내 나름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고후 10:5절을 보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와 그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생각은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적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이를 기초로 생활하지 않을 때 결국 유대인들과 같이 넘어지게 됩니다.

(4) 부딪히는 돌 (30-33)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고,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 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이방인들은 겸손하게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33)”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시금석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고 영접치 않는 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Ⅱ.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10:1-21)

(1) 구원에 이르는 길 (1-13)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1).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계시로 말미암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낸 유전적 지식을 좇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열심은 무지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요구를 다 치루셨습니다.

5-10절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고 땅에 내려가는 등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근본적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떠합니까?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에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구원의 길은 아주 쉽고 단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됩니다.(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십니다(12). 1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기 위해 애써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을 쌓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도리를 마음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단순한 진리를 왜 영접치 않습니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쉬운 것은 가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 여자들은 화장품을 살 때 무조건 비싼 것만 좋은 줄 알고 사기 때문에 화장품 회사는 다투어서 값을 올려 팝니다. 그러나 구원의 도리만큼은 단순하다고 해서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값이 비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값을 요구할 수가 없어서 무료로 주신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으면 되었지 꼭 입으로 시인해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불신자 가정이나 학교에서나 힘든 직장에 있을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입으로 시인할 때 핍박과 조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롱과 핍박이 두려워서 입으로 시인하지 않을 때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신앙은 두더지 신앙입니다. 세상과 예수님 사이를 양다리 걸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부끄러워할 때, 예수님께서도 재림하실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8:38). 조롱과 핍박이 있지만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야 합니다. 그때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심령에 하늘 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2)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 (14-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파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전파된 말씀을 듣고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 전파의 필요성과 선교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말씀 전파의 필요성

우리는 말씀을 배우기만 하면 되었지 반드시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말씀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전파되지 않는데 구원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데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 1:21). 우리도 말씀 전파자를 통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말씀을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큰 특권이기도 합니다.

둘째, 선교(심방)의 중요성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데 고생스럽게 심방을 하고 선교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구원할 것이 아닌가 하는 예정론을 오해한 기독교적 운명 주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18C의 영국은 바로 이러한 신앙적 안일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William Carrey가 세계 선교에 대해 역설하자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데 건방지게 나선다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William Carrey는 구체적으로 세계 선교를 위해 어학을 공부하고 손발을 놀렸습니다. 그리고 인도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 발은 평소에는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발이지만 말씀 전파를 위해 심방을 가거나 선교사로 나아갈 때는 아름다운 발이 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자들의 발이여!”

우리는 누가 구원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찾아가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양들이 스스로 자기 발로 말씀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 빛을 가지고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다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16). 이때 우리는 실망하고 내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며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대하는 백성에게 종일 손을 벌리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를 소망 없다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Ⅲ. 이스라엘을 통한 인류 구속 역사 (11:1-36)

(1) 남은 자 (1-12)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다시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함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셨는가(1)? 이스라엘은 이제 영영 소망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사도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인을 남겨 두신 것같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친히 남겨 두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2-5). 오늘날도 복음 역사가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일지라도 내가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곳곳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위하여 남겨 두신 남은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십니다. (사 6:13)

(2) 감람나무 비유 (13-24)

13-24절까지는 한마디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이 유대인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교만할 것이 아니라(18) 돌 감람나무와 같이 아무 쓸모 없는 내가 오직 은혜로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된 것을 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20)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해야 합니다(22).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지만 또 엄위하신 분으로서 교만한 자는 아끼지 아니하시고 꺾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21). 또한 하나님은 찍힌 가지도 겸손할 때 접붙이실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23).

(3) 인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 (25-32)

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통해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25a). 이 비밀이 무엇입니까? 25b,26a 절을 보십시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방인들은 과거 하나님께 순종치 않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입니다(31).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으로 긍휼을 기초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4) 바울의 찬송시 (33-36)

사도 바울은 9장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해 큰 근심과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고 그의 심정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가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결론: 하나님은 흙과 같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어찌하든지 구원코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시지만 그 주권을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인류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천년을 하루와 같이 참고 계십니다 (벧후 3:8,9).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 믿는 자를 새 이스라엘로 삼으사 세계 만민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경륜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