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제 9 강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말씀/ 로마서 14:1-16:27
요절/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로마서 마지막 강의로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13장까지에서 복음에 관한 중요한 문제는 다 말하여 끝냈습니다. 1-8장은 개인은 어떻게 하여 구원을 얻는가? 9-11장은 인류는 어떻게 구원되는가? 12-13장은 신자들이 실제적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윤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이로써 종결을 짓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4장 이후부터는 로마 교회 내에 있었던 작은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근본 문제도 중요하지만 또 실제 생활에서 생기는 사소한 문제도 중요합니다. 작은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할 때 큰 문제가 되어 신앙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그 정신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 15:14절부터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로마 성도들에 대한 문안이 나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개척 정신과 선교 정신 그리고 목자의 섬세성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Ⅰ. 서로 받으라 (14:1-15:13)
당시 로마 교회에는 두 종류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였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주로 유대 율법주의적 신자로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며 레위기에 나오는 대로 정한 식물과 부정한 식물을 분간하여 먹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고기 먹는 것을 금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나 로마의 도시에서는 우상의 전에 바쳤던 고기를 시장에 팔았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금욕적이고 율법적인 면이 강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소심한 면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먹는 것은 신앙적으로 불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믿음이 강한 자는 율법이 없이 자유로왔습니다. 그들은 음식이 없어서 못 먹지 무엇이든지 잘 먹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혀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조금도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상에 바쳐진 고기도 조금의 양심에 거리낌없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강한 신앙과 강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이런 사소한 문제로 장벽이 생기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율법적이고 소시민적인 자라고 비웃고 고기도 못 먹느냐고 비판합니다. 또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불경건하다고 판단합니다. 이로 인해 서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실족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먹고 마시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질 수 있는 큰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까?
14: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습니다(2). 우리가 사소한 문제로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3b). 우리는 형제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4). 둘째로, 그 근본 동기가 주를 위하여 하기 때문입니다(5-9). 6절을 보십시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니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신자는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다 주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10,11). 우리는 각각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께 고하며 심판을 받게 됩니다(12).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13). 만일 내가 믿음이 강하다고 해서 믿음이 연약한 자 앞에서 자유롭게 음식을 먹을 때 이로 인해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사랑으로 행치 아니한 것입니다(15a).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는데 사소한 식물 문제로 그를 실족케 한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15b). 사소한 먹는 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20).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17).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자이기 때문에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18,19). 21절을 보십시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하나의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자유를 자신을 위해 쓰지 말고 형제를 위해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실 수 있지만 이것이 형제에게 거리끼는 것이 될 때 안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음식이 문제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술과 담배가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술, 담배를 먹는 자는 무조건 타락한 자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사소한 문제로서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얼마든지 술과 담배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신자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자는 술, 담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연약한 자는 그러한 자들을 보고 마음에 의심을 품고 실족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나의 자유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형제를 실족케 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과 형제를 위하여 술, 담배를 안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8:9절 말씀에서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또 만일 식물이 내 형제를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전8:13) 근본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사도 바울은 근본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의 양보나 타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소한 문제는 사랑으로 다 양보하고 서로 용납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소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양들은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의심이 많고 또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목자들은 올챙이적 시절을 잊어버리고, 양들이 왜 이렇게 연약하고 소심한가 마음으로부터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마음이 들 때 말이 거칠게 나오고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됩니다. 또 양들은 목자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사랑이 없다는 것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목자가 너무 바빠서 양들에게 섬세하게 신경을 써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양들은 데모를 하고 다른 목자와 비교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될 때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어 심하게 되면 분열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서로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자기를 죽이고 회개하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위할 때 모든 문제는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형제를 판단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자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조금의 의심이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음으로 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의심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죄입니다.
15:1,2절을 보십시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판단치 않는 소극적인 자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적극적으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형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를 위해 기도해 주고 형제의 믿음이 자라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생활이 아니요, 주님을 기쁘게 또 형제를 기쁘게 하는 생활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할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게 하고 형제를 기쁘게 하고자 할 때 심령에 참 기쁨이 있게 됩니다. 믿음이 어린 자일수록 자기 중심적이지만 믿음이 성숙한 자일수록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자 애쓰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를 기쁘게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비방을 받으시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두 자기를 희생하고 형제를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서로 뜻이 같게 되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7).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열방들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8-13).
Ⅱ.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15:14-16:27)
(1) 개척자 사도 바울 (15:14-21)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은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이기 때문에 편지를 쓸 필요가 없지만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 썼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썼다고 말합니다. 이 은혜는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고 이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방인을 하나님께 받으심직한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고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을 믿고 순종하도록 도왔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우사 이방인들이 순종하도록 바울에게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나보다 키 크고 잘난 선진국 백성들을 볼 때 위축되거나 두려워 떨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계 191개국 캠퍼스를 맡겨 주시고 이들을 주님께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키 위해 미국, 서독, 캐나다, 멕시코, 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믿고 순종하는 생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떻게 미국 지성인들이 한국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감당코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과 일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셔서 큰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습니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미개척지에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다고 합니다. 이것을 my ambition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거룩한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일에 얽매어 따지고 계산하는 소심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고양이와 같이 집안에서 주는 밥이나 먹고 사랑이나 받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가슴에 품고 웅비하고 포효하는 호랑이와 같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야심에 불타는 위대한 사명인이었습니다. 그의 야심은 바로 불타는 개척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일할 때마다 적당히 하지 않고 생명을 바쳐 감당했기 때문에 항상 성공적이었습니다. 보통 일이 잘되면 자만심이나 안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자만심이나 안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불타는 야심 가운데서 도전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에게 개척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척 정신은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개척 정신이 충만할 때는 피곤치 아니합니다. 또 육신의 병조차도 이길 수 있습니다. 개척 정신이 있을 때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개척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개척하고 투자하고 모험하고 역사 창조를 해 나갈 때 그 인생은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고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메이 플라우어호를 타고 신천지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대서양을 항해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천지에 가서 원주민과 싸우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믿음에 기초한 불타는 개척 정신이 있었습니다. 메이 플라우어호를 탄 사람은 105명이었는데 그 중 반은 항해 중에 순교를 하고 또 반은 1년 동안 질병과 원주민과 싸우면서 죽어 갔습니다. 이런 개척 정신을 통해 오늘날 거대한 미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개척 정신을 잃고 안일해지자 점점 내부는 섹스와 마약과 폭력으로 썩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원수는 무사 안일주의입니다. 우리에게 불타는 개척 정신을 허락 하사 봄학기 새롭게 개척 역사를 이루고 세계 191개국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선교사 사도 바울 (15:22-33)
22-29절까지는 사도 바울 자신의 앞으로의 선교 계획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지방에서 일할 곳이 없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고자 했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22,23).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 그 후에 로마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들러 그들과 교제하여 잠깐 만족을 받은 후에 그들의 파송을 받아 서바나로 가고자 하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서바나는 오늘날 스페인으로서 당시는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세계 선교 명령을 좇아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선교 정신으로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백전노장으로 말년을 편히 보낼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는 선교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본국이 어느 정도 개척이 되고 편히 일할 수 있을 때 50이 다 된 나이에 미국 개척지로 나가셨습니다. 개척을 해 본 사람은 개척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개척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교사님은 주님의 선교 명령을 좋아 본국 개척보다 훨씬 힘든 미국 개척을 위해 선교 일선에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야전군 사령관 같이 개척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황무지와 같은 미국 캠퍼스에 장미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개척 역사가 이루어지자 83년에는 모스크바도 보아야 하리라는 기도 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현실에 얽매일 때 한없이 마음이 좁아져 벌레와 같이 살 수 밖에 없지만 개척 정신과 선교 정신이 있을 때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30-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에 갈 때 불순종하는 유대인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과 예루살렘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 받으심직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쁨으로 그들에게 나아가 그들과 함께 편히 쉬게 되기를 원합니다.
(3) 목자 사도 바울 (16:1-27)
16장은 로마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문안입니다. 이 문안은 보통 문안과 달리 사도 바울이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목자로서의 바울의 섬세한 내면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인턴 목자로 있던 자매 뵈뵈를 통해 편지를 보내면서 그를 잘 영접하고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훌륭한 평신도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도록 하였습니다 (행18:26).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놓을 만큼 바울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에배네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마리아는 그들을 위해 많이 수고했습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 아리스도불로의 권속, 내 친척 헤로디온,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는 사랑하는 버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리고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합니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 허메와 바드로바,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롬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문안하느니라(16). 이렇게 해서 문안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부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문안하는 것입니다. 짧은 본문에 주 안에서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주 안에서 생각하고 주 안에서 행동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주 안에서 살고 주 안에서 죽는 것으로 철저하게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동역자들을 귀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있습니다. 특히 자매님들을 귀히 여겼습니다. 본문에는 약 반이 자매님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당시 여인들을 천시 여기는 사회 풍조 가운데서 이렇게 자매님들을 귀히 여기는 것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딱딱한 사도 같지만 실상 그는 귀부인 같이 섬세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섬세한 사랑을 가진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자매님들의 역할은 지대합니다. 자매님들을 무시하면 절대로 복음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훌륭한 믿음의 여성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절대로 독불장군과 같이 혼자서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동역자를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할 때 자연히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17-20절까지는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경계하도록 권면하고, 21-24절은 편지를 쓰는 사람 쪽에서의 문안입니다. 25-27절은 복음에 대한 마지막 언급으로 로마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결론적으로 로마서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고 믿음으로 영화롭게 됩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말미암고 믿음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으로 세상을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