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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24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1 강  

하나님의 위로 

 말씀/ 고린도후서 1:1-24
 요절/ 고린도후서 1:4
  "우리가 온갖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셔서 온갖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표준 새번역)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에 이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자서전적인 서신이라고 할 만큼 개인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의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자기 자랑이나 자신의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신비한 영적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와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직분과 어떤 곤경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항상 스피릿이 충만한 부활 신앙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과 화해의 직분과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들과 계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는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간직해야 할 영적 보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변덕스러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위대한 목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 1 강은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위로는 어디서 오는가?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과 복음역사의 기초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각해 보고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I. 위로의 하나님 (1-11)

  1,2절은 인사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 지방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고린도전서를 공부해 볼 때 고린도 교회는 분쟁 문제, 송사 문제, 음행 문제, 우상의 음식에 관한 문제, 은사 문제 등 참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너무 문제가 많아서 교회라고 부르기에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가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라고 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b)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데에도 우리의 본이 되시고 위로를 받으신 데에도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위로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자비(         )는 연민, 동정의 뜻으로서 근본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난을 외면하시고 무관심 하신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환난을 결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학정에 시달리며 고통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의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 이르려 하노라." (출3:7,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고난을 다 듣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고 가까이 나아가기를 꺼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분이시지만 근본적으로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4: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반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보내 주신 데서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보실 때 긍휼히 여기시고 환부에 손을 대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사 죄사함을 주시고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손가락질 받는 세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정욕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사마리아 여인을 보실 때도 정죄하기는커녕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참 남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무리를 보실 때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따뜻이 영접하시고 여러 가지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우리 인생들의 모든 질고와 슬픔과 죄짐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고난을 깊이 이해하시고 능히 위로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환난을 당합니다. 욥이 고백한대로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5:7)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하고 두렵고 가인과 같이 쉼이 없는 방랑자와 같습니다. 인간은 마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의 소욕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또한 하루 세끼 먹고 살기 위해 얼굴에 땀을 흘리며 중노동을 합니다. 죄를 범하게 되면 양심의 송사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또한 인간 갈등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이런 내면의 고통 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홍수나 지진과 같은 재난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질병이나 교통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고난을 당하며 고통합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눈에 보이는 인간이나 물질에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내는 남편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서로 위로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싸우게 됩니다. 양은 목자에게서, 목자는 양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또 친구에게서 위로를 얻거나 이성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어느 곳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으면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피웁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다가 위로는 커녕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비참한 심정을 안고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과부의 사정은 과부만이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꼭 같은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그 형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또 설령 이해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위로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근본적으로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심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불신 세상에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때 인간에게 위로를 받고자 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위로를 받는다 할지라도 마음에 공허함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영접해 주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고, 우리의 심정은 은혜와 감사와 기쁨과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받는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위로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은 6.25때 공산당원에게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어디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함으로 참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할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25동란으로 인해 가난과 질병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우리나라에 와서 광주 제중병원에서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Dr. Carding
ton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하루는 사랑하는 막내 아들이 냇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참된 위로를 받고 슬픔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장래식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안에는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There is no accident in God)라는 말로 참석한 사람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이 1960년대에 한국에서 복음사역을 감당하시다가 안식년이 되어 미국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이때 흑인 괴한에게 얻어맞아 얼굴의 코뼈가 다 부러지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배사라 선교사님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배사라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위로를 받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은 로마서 8:28절으로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크고 작은 환난을 당할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로를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시고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또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능히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환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십니다. 시편 119:50절은 말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우리는 힘들고 답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말씀이 나에게 힘을 주고 참된 위로를 줍니다. 성경에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고 참된 평화를 줍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할 때 용기를 주고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줍니다. 또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주며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써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나옵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그의 대적 브닌나에게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아들도 못 낳는 여자가 여자냐, 죽어라 죽어" 이런 수모를 당할 때마다 한나는 울고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면 남편 엘가나가 다정스럽게 위로했습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삼상1:8) 그러나 이러한 남편의 위로도 한나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나는 괴로울 때 브닌나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거나 남편의 사랑을 이용하여 그를 쫓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인간적인 방법은 문제를 더욱 야기시킬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인간의 위로는 부질없는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마음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눈물로서 하나님께 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한 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하여 그 시대를 구원하셨습니다. 한나는 인생의 환난 중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송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 불평하기 보다 찬송을 많이 부르면 위로부터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12:2,3)

  5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위로와 영광도 받게 됨을 말해 줍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6,7절은 사도 바울이 환난을 당하는 것이나 위로를 받는 것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목자인 사도 바울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그 위로로서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과 위로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8-11절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이야기 함으로써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가 당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잘 알 수 없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환난을 당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번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부르고 있을 때 바울은 툭툭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위로하며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했습니다. (행14:19-22) 그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가 환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8,9절을 볼 때 그는 힘에 지나도록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살 희망마저 상실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절망 가운데 처하게 하신 뜻이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도록 하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한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또 앞으로도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신앙경험이 과거로 끝나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가 절망 가운데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했을 때 그는 흔들릴 수 없는 부활신앙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미래에도 능력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진정으로 의지할 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II. 신실하신 하나님 (12-24) 

  12-24절까지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1년 6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를 통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방탕한 항구 도시 고린도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떠나가자 고린도 교회내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방문하고자 하였습니다. 15,16절을 보면 그의 첫 여행 계획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고린도에 들렀다가 마게도냐에서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정을 변경하여 에베소에서 잠간 고린도를 방문하고 바로 에베소로 돌아와서 지금 마게도냐에 와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이 경솔히 약속을 하고 제멋대로 어기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인격을 의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도직도 의심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전한 말씀도 의심하게 되어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뿌리채 흔들려 무너지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진실성과 왜 여행을 변경하게 되었는가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처신한 바울 (12-14): 바울은 자신의 자랑거리는 세상에서 처신할 때에, 특히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세상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단순함, 순수함)과 진실함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헬라 철학이 성행하고 세상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세상 지혜를 의지하여 일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전2:1,2) 그는 순수하게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대할 때 세상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순수함과 신실함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습니다. 세상 지혜는 자기 육체를 자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거짓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므로 사람을 겸손케 합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행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됩니다.  
  세상을 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 지혜로 사는 사람이 있고 처세술에 기초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지혜를 믿고 처세술을 믿고 살면 잘 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자기 꾀에 속고 맙니다. 반면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순수하고 진실되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 같고 세상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도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결국 진실이 이깁니다. 복음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도울 때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돕고 또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이나 모임에 필요한 사람으로 키우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로 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순수하고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진실되게 도우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최후 심판의 날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듯이, 바울 자신도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대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서 일한 바울 (15-22): 바울은 자기와 고린도 교인들은 마지막 최후 심판의 날에 서로 자랑거리가 된다는 확신 때문에 처음에 그들을 심방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두배의 은혜를 받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를 심방한 후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를 심방한 후 그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로 가고자 하는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이런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아무 생각없이 경홀히 했겠습니까? 또는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속 마음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겉으로 '예, 예' 했던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들에게 나아가고자 매우 신중하게 계획했습니다. 아마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심방한다고 하자 음식을 차려 놓고 많이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지 않자 바울이 원래 올 마음이 없으면서 온다고 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목자의 사랑을 의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행을 변경한 데에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자기 좋을대로 계획하고 자기 편리한 대로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실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의 말이나 행동은 신실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신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성취된 것으로 증명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을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히 서게 하시고 또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당신의 소유라는 표로 인치시고 그 보증으로 그들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들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동전에 보면 "In God we trust"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그 안에서 서로 신뢰함으로 신용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되자 서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 워싱턴포스터지와 하버드대, 카이저 가족재단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및 각종 분석에 의하면 미국민 65%가 이웃을 안 믿는다고 합니다. 이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여럿이 즐기는 볼링운동도 혼자해야 안심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신실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만일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인간성이 아무리 진실되고 착해도 거짓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본성이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4절은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은 바울 (23,24): 바울은 23절에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진실됨을 증명합니다. 그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실상은 고린도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도와 주고자 원했기 때문에 고린도에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양들의 믿음을 도와 주는 자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저 자식은 내가 낳고 키웠기 때문에 내 자식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낳고 키웠다고 해서 내 자식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일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양도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양입니다. 역사도 내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믿음을 주관하고자 할 때 권위주의가 생기고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도울 때 그가 하나님과 관계성을 잘 맺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환난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쓰실만한 내면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비의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한 분 한 분을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능히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