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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2:1-17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2 강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말씀/ 고린도후서 2:1-17
 요절/ 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표준새번역) 

오늘 말씀은 신자의 영향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자는 원튼 원치 않든 영향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는 인구의 사분의 일이 넘는 1,200만의 성도수를 자랑하지만 영향력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I. 넘치는 사랑 (1-11)

첫째, 눈물의 사람 바울(1-4).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또 다시 아픔을 주지 않아야 하겠기에 여러분에게로 가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떠나 있는 사이에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이의를 제기하며 불신을 심고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급히 고린도 교회를 심방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고 슬픔과 근심만 남기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방문을 가리켜 '고통스러운 방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신앙을 위해 또 다시 이런 고통스러운 방문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2절은 죄를 범한 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즉 "내가 너희의 죄 때문에 너희를 책망하고 근심하게 하였으니 너희가 회개함으로 나를 기쁘게 해야지 누가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범죄하여 곁길로 나갈 때 슬퍼하지만 회개하고 바른 신앙을 갖게 될 때 기뻐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가 이런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 것은 그의 기쁨이 곧 고린도 성도들의 기쁨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들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참된 목자였습니다. 
4절에는 그의 목자의 심정이 한층 더 진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가 무엇이든간에 애통하는 마음과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기 때문에 그 편지를 가리켜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이는 바울이 얼마나 그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눈물의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눈물은 약자의 상징이라고 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를 경멸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물은 보통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눈물에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습니다. 슬플 때 자기 연민에서 우는 연민의 눈물이 있고, 고통스러울 때 우는 고통의 눈물이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너무 기쁜 나머지 감격해서 우는 감격의 눈물이 있고, 억울해서 흘리는 억울한 눈물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매를 맞으면 울고, 여자들은 종종 눈물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물들은 별 가치가 없는 값싼 눈물들입니다. 
눈물에는 값싼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값비싼 눈물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은 참으로 고귀한 눈물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를 슬퍼하며 애통히 회개하는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고귀한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고자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 나가서 죽게 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이때 그는 '왕으로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하며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노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메시야의 그림자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회개의 눈물보다 더 귀한 눈물은 양들을 돕다가 흘리는 목자의 눈물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돕다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윤웨슬레 목자님이 한 양을 돕다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옥상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흘리는 목자의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눈물입니다. 바울은 이런 눈물을 흘리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19절을 보면 그가 3년 동안 에베소를 개척하면서 어떻게 목자생활을 감당했는가 하는 간증이 나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그의 목회철학은 겸손과 눈물이었습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존경하고 섬기는 마음입니다. 눈물은 상한 목자의 심정입니다. 바울은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행20:31). 에베소에 놀라운 복음역사가 일어난 이면에는 그의 겸손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눈물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회심하기 전 바울은 눈물도 피도 없는 교만하고 무자비하고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테반을 돌로 쳐 죽일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겸손과 눈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섬기는 사랑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원래 그의 체질 때문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고자 애썼기 때문입니다(고전11:1). 복음서를 살펴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목자의 눈물로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마9:36, 막6:34). 또 사망권세 아래 짓눌려 슬피 우는 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우셨습니다(요11:35). 또한 메시야를 배척함으로써 장차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19:41).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생애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오늘날은 인간성을 상실하여 눈물이 메마른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입니다. "주님! 저의 목자생활을 살펴볼 때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양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랑의 목자가 되게 도와 주십시오."

둘째, 용서의 사람 바울(5-11). 5-11절은 용서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내에는 사도 바울을 인신공격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단지 그의 마음만을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 사람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회개하도록 하였을 때 고린도 성도 대다수가 그가 회개하도록 징벌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그 사람이 다시는 그런 몹쓸 죄를 짓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쉽게 용서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기를 권합니다." 죄를 책망하는 목적은 그 사람을 파멸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우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죄를 범했을 때는 복음진리에 입각해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하지만, 회개했을 때는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지나친 슬픔에 짓눌려 "나는 쓸모없는 놈이야 죽어야 해" 하며 자학하다가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다'(         )는 말에는 '탕감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일만 달란트(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에 해당되므로 노동자 15만년의 품삯)이지만, 형제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므로 100일분 품삯)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일생 무거운 빚에 짓눌려 고통하고 신음하며 절망 중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빚을 일시에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우리는 형제의 죄를 중심으로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마18:23-35). 베드로는 예수님께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22). 이는 무조건, 무한정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회개하도록 도와야 하고, 진실되게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죄를 지으면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돕기보다 인간적인 정에 얽매여 적당히 덮어 주거나 타협하기 쉽습니다. 또 회개하면 겉으로는 용서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를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회개하도록 돕는 것도 사랑으로 해야 하고, 회개했을 때 용서하는 것도 사랑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게 될 때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에는 형제를 실족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그가 회개하도록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회개했을 때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를 용서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8-10).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단의 책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책략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역사를 감당할 때 항상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교묘하게 역사하는 사탄을 의식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악령의 세력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엡6:12). 우리는 복음의 원수인 사탄의 책략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의 책략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탄의 책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부족함이 없는 물질적인 풍요와 함께 평화와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질서를 지키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이 계명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계명의 말씀을 이용하여 인간의 마음에 불신을 심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시켰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자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도 파괴되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도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사탄의 역사는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고 다투게 함으로써 분열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역사는 서로 귀히 여기고 격려하고 서로 경책하고 서로 허물을 용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의 향기 (12-17)

12,13절은 바울의 마음이 고린도 교회 문제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상해 있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가 드로아에 갔을 때에 복음 전할 수 있는 길이 열였으나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마음이 편치 못해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로서(고후 8:23) 바울이 고린도 교회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자 염려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늘 교회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는 항상 승리감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어디에서나 우리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에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두가지 감사제목이 나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항상 이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패배감과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피라밋과 같이 되어 있어서 점점 위로 올라 갈수록 성공의 문은 좁아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승리감을 맛보게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배감과 열등감에 젖어 살아가게 됩니다. 경건주의를 전공하신 지형은 교수님에 의하면 목회자들조차도 약 95%가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끼며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자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매를 많이 맺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승리감에 충만하여 세상을 자신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이는 대부분 외적 요인 보다도 죄로 인한 내적 요인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을 패배케 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죽음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한 자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생을 패배케 하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으므로 그 안에 있게 되면 자동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한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세상을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4,5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사도 바울은 1세기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느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언제나 승리감에 충만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5,57)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부분적으로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패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패배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패배를 승리로 바꾸사 궁극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둘째는, 어디에서나 우리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지식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지식도 많이 있지만 또한 해악을 주는 지식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지식도 많이 있습니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지식 가운데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참된 희망을 주고 영생을 주는 지식은 없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식의 혼돈 속에서 질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참된 희망을 주고 영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를 차원 높은 영적인 세계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길 수 있습니까? 첫째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힘써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말씀에 기초한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 하고 열심히 말씀을 가르친다 할지라도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이 어떠한가를 주목합니다. 김아브라함 목자님이나 이누가 목자님과 같이 말은 잘 못하지만 삶이 예수님을 배우고자 애를 쓴다면 그의 말은 힘이 있고 좋은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과 같이 낮아져서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항상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향기를 풍기기는커녕 시궁창 냄새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리는 좋은 향기를 풍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아프리카에 갔을 때 많은 아프리카 양들이 우리 선교사님들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특히 우간다의 유사무엘 선교사님은 결핵에 걸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변함없이 헌신하고 말씀으로 섬기는 생활을 통해서 양들이 큰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신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습니다. 영향력은 말없이 천리를 갑니다. 복음의 영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고 시대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당시 로마의 개선행렬을 살펴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전쟁에서 이긴 개선 장군은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그 뒤에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입성하였습니다. 이때 승리한 장군들은 전차에서 신들, 특히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 신에게 바치는 향들을 피워서 온 성안에 향기가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서 이기면 신들이 도와 주어서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입성 행렬의 종점은 쥬피터 신전인데 거기서 포로 중에서 우두머리를 죽여서 개선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개선행렬에서 피우는 향은 승리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멸망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멸망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지만,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심판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막16:16). 이를 볼 때 복음 전파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과 사를 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향기'(      )란 말은 좋은 냄새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향기를 가리킵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예물을 드릴 때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전부를 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13,17)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려면 흠없는 짐승을 완전히 불살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온통 부은 여인과 같이,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릴 때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99%는 드리지만 1%는 자기를 위해서 남겨 두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남은 1%가 악취를 풍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부분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100% 드려서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순수한 동기로 섬겨야 합니다(17). 17절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동기로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기 유익을 얻는 수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과 같았습니다. 옛날에는 술에 물을 섞어 파는 행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요사히로 말하면 꿀에 설탕을 넣어서 팔거나 참기름에 다른 기름을 넣어서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다 잡다한 세상 지식을 섞어서 탐욕과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복음역사를 섬기는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실된 마음으로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여기서 진실된 마음이란 헬라어로는 '에일리크리네이아'(           )인데 이는 햇빛(에일레,    )이라는 단어와 판단하다(크리노,     )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양 빛 아래서 조금도 숨김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답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도울 때 조금의 사심이 없이 순수하게 그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자연히 좋은 향기를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향기는 보이지 않지만 조용하게 널리 퍼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길 수도 있고 구린내를 풍길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동기로 함으로써 혼탁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