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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1-18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3 강

새 언약의 일군 

 말씀/ 고린도후서 3:1-18
 요절/ 고린도후서 3: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표준 새 번역)


  지난 주에 우리는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믿는 자들을 볼 때 그냥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보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각계 각층에서 말없이 실제적인 삶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크리스천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를 가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으로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새 언약의 일군, 곧 복음의 일군이 되었으며, 또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말해 줍니다. 더 나아가 새 언약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에게 다만 은혜로 주시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런 축복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을 증거하는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동시에 받았습니다(롬1: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은혜를 마음에 되새기고, 이 은혜를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의 추천장 (1-3)

  1,2절을 보십시오. 당시 고린도 교회 내에는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유대 율법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장을 받아 왔기 때문에 자기들만이 가르칠 자격이 있고, 바울은 그런 추천장이 없으므로 사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기에게는 사람들이 발행하는 그런 추천장이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성도들이 바로 바울이 하나님의 종임을 천거하는 추천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추천장은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또 한두 번 사용하면 효력이 끝나는 그런 추천장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계속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고 읽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추천장입니다(2b). 다시 말하면 이 추천장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복음역사를 축복하사 맺혀 주신 영적 열매를 말합니다. 영적 열매야말로 그 어떤 추천장보다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추천장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추천장은 때로는 위조할 수도 있고 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추천장은 속일 수도 없고 과장할 수도 없는 가장 확실하고 진실한 추천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의 추천장은 사람들이 만든 추천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증거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 쓰신 것이요, 또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쓴 것이며, 종이나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판에 쓴 것입니다. 복음의 일군들은 그리스도께서 편지를 쓰실 때 편지를 잘 쓰시도록 옆에서 섬긴 것 뿐입니다. 사람이 먹물로 쓴 편지나 심지어 돌비에 새긴 것도 세월이 흐르면 빛이 바래지고 결국에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는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편지입니다. 

  이상에서 복음역사를 섬기려면 하나님의 추천장이 필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추천장을 많이 사용합니다. 추천장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증명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어떤 내용의 추천장을 받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독일에서는 교수의 권위가 높기 때문에 교수의 추천장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좀처럼 추천장을 잘 써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추천장은 학문을 하기 위해 유학을 가거나 취직을 할 때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공신력 있는 추천장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복음역사를 섬기는데 있어서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령충만함을 덧입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신학공부를 하고 학위를 얻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인정하는 공신력 있는 추천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추천장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인정하는 신학박사학위와 같은 추천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추천장이 없다면 참된 복음의 일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람들의 추천장보다 하나님의 추천장을 받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입니다. 챨스 스펄전은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17살 때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수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DL 무디도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킨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추천장보다 하나님의 추천장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추천장을 소유하게 될 때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써지 않고 확신있게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II.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직분  (4-11)

  4-6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새 언약의 일군이 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7-11절에서는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구언약의 직분의 영광스러움과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4-6). 4,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확신은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 그의 영광의 직분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일군, 곧 복음의 일군이 된 것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 복음의 일군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무 자격이 없지만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일군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합니다. 자격이 있어서 되었다고 생각하면 속교만이 생기게 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로부터 합당한 대접을 받고자 하게 되고 대접을 받지 못하면 불평하게 됩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 자격이 없는데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일군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기를 내 세울 근거가 없기 때문에 겸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받은 바 은혜를 감당하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하기 때문에 늘 심령에 은혜가 있고 스피릿이 충만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내적, 외적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율법으로 하면 돌에 맞아 죽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새 언약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늘 마음에 간직하고 간증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 언약의 일군이 되었음을 더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자격을 주실 때는 자격만 주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문자는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고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새 언약은 구 언약과 대조됩니다. 언약 또는 계약이란 히브리어로 베리트(    )인데 이는 먹는다, 자른다는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고대에서 계약을 맺을 때 음식을 같이 먹고 짐승을 잡아 자른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언약을 디다케(       , testament)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Old testament,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구약, 즉 구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옛 계약을 말하며, 신약, 즉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과 맺으신 새 계약을 말합니다. 구 언약은 출애굽기 19-2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어 계약관계가 지속되는 '쌍무적인 계약'입니다. 또 이 계약은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행위언약이요, 조건적인 계약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느 한편이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이 계약은 자동적으로 파기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이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구 언약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긍휼을 기초로 해서 주신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언약을 지킬 힘이 없음을 아시고 믿기만 하면 다만 은혜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은혜언약이요,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언약입니다. 또한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편무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기원은 예레미야 31:31-3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새 언약은 구 언약과 달리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하며 또한 새 언약을 믿을 때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성만찬을 하실 때 포도주 잔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구 언약에도 죄를 사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흠없는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뿌림으로써 정결케 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여서 죄를 지을 때마다 번거롭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구 언약의 제도는 구원역사에 있어 하나의 모형으로서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새 언약은 짐승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이기 때문에 죄사함의 효과는 완전하고 영원합니다(히9:12).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우리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과 같이 죄를 지을 때마다 예루살렘에 가서 짐승을 잡아서 번거롭게 제사 지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범죄할 때마다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전혀 우리의 공로가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기만 하면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다 용서해 주시고 보배로운 피로 정결케 해 주십니다. 나의 지은 죄가 너무 중하고 추하여서 내가 어느 정도 씻고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흰눈 같이 정결케 해 주십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찬186)
  6b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새 언약의 일군이 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여기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문자, 곧 율법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신령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연약하여 거룩한 율법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울의 영적 갈등이 나옵니다. 바울은 율법대로 의롭고 진실되게 살고자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만큼 철저히 율법을 지켰습니다(빌3:6). 이런 그에게 구원의 기쁨이 충만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더 강한 죄의 사슬에 얽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갈등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 죄인으로서의 자아발견을 하게 할 뿐 죄로부터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기만 하고 구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깨닫는 순간 죄로 인해 괴로워 하다가 결국 그 죄로 인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의 세력이 그를 지배하여 원치않게 죄의 노예로 삼아버리는 것을 깨닫고 절망의 심연에 빠져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7-24) 이는 진실되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고뇌에 찬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그리고 로마서 8:1,2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죄와 사망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언약의 일군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사람을 죽게 하지만, 성령은 죽을 사람을 살려서 새 사람되게 하고, 나아가서 새 언약의 일군이 되게 합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둘째,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 (7-11). 7-9절에서 바울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의문의 직분과 살리는 성령의 직분,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구 언약의 직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어떤 점에서 영광스럽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의 상황을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의 바로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몸은 출애굽하여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사고방법과 삶의 스타일은 출애굽하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이고 물질적이며 음란하였습니다. 또한 이방 문화의 영향으로 헛된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규모가 없었고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제 멋대로 행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엡2:3). 그들은 인내심이 부족하였고 감사할 줄 몰랐으며 조금만 힘들어도 자기를 인도해 준 목자를 원망하고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법이 없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법이 없었을 때 그들은 무엇이 죄인지도 알지 못하는 무지 가운데서 짐승과 같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거울과 같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죄로 깨닫고, 죄인으로서 자아발견을 하여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내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규모있는 백성이 될 수 있었고, 음란하고 부패한 본성을 좇아 사는 이방세계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율법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날은 부도덕(immoral)의 시대를 넘어서서 탈도덕(amoral)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도덕의 시대에서는 죄를 지으면 죄의식을 느끼고 괴로워하지만 탈도덕의 시대에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4장을 공부하면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사마리아 여인이 죄인임을 압니다. 그런데 요사이 젊은이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왜 죄인이냐? 능력이 많은 자가 아니냐?"고 말하며 오히려 그러한 여인을 흠모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인으로서 자아발견을 하고 구원을 받도록 하려면 율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가르쳐 주는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내려 왔을 때 그의 얼굴의 광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하물며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영광스럽습니까?
  성령의 직분은 죄로 병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직분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의사의 직업을 고귀하게 여깁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직업도 고귀한데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직분이야말로 얼마나 더 고귀한 직분입니까? 세상에 많은 직분이 있지만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로 치닫고 있는 사람을 살리는 직분처럼 값지고 가치있는 직분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자입니다. 
  또한 구 언약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인데 반하여, 새 언약의 직분은 의의 직분입니다. 정죄의 직분은 검사와 같이 죄를 찾아서 죄됨을 드러내고 죄를 죄로 선고하고 심판합니다. 여기에 걸리면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직분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고 죄를 담당해 줌으로써 죄인을 정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율법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돌로 치라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에게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0,11절에서는 구 언약의 직분의 영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영광에 불과하지만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은 영광임을 말해 줍니다. 구 언약의 직분은 마치 캄캄한 밤 하늘에 달과 같습니다. 지난 추석에는 대 보름달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칠흙과 같이 캄캄한 밤에 달이 환하게 비추이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는 달님을 사랑하고 달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도 합니다. 그러나 달빛은 태양이 나타나면 곧 사라지고 맙니다. 달빛은 반사된 영광에 불과하지만 태양빛은 빛 자체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양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세상에는 나름대로 영광스러운 직분들이 많습니다. 군대에서는 사단장의 명령 한마디에 수천명의 군사들이 벌벌 떱니다. 이는 사단장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말해 줍니다. 한 나라를 호령하는 대통령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권을 잡고자 투쟁합니다. 요사이 같이 경제가 어려워서 감원바람이 불 때 사람들의 목을 쥐고 있는 대기업의 총수의 직분도 참으로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이러한 직분들은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서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고 의롭다 하고 새 인생을 살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새 언약의 직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사람을 살리는 새 언약의 직분을 주신 것은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III. 새 언약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축복  (12-18)

  12-18절에는 우리가 새 언약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첫째로,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12-17). 12,13절에서 새 언약의 일군은 구 언약의 일군과 같이 얼굴로 수건을 가리는 것 같이 어정쩡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 가운데서 아주 담대하게 처신합니다. 모세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얼굴의 영광이 결국에는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그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이 율법의 한계를 알게 되면 율법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하게 되어 율법을 순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사실은 알지 못하고 율법의 영광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율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의무감과 강박감,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늘 죄의식과 정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얽매임은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때만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인생을 얽어매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죄의식처럼 우리를 강하게 얽어매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정죄의식이 따라다니게 됩니다. 이 정죄의식은 아무리 세월이 오래간다 할지라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독일의 빌헬름스하펜에 사는 50세된 한 선원은 27년전 한 집에 침입하여 돈을 훔치려다가 여인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하자 살해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살인을 저지른 괴로움으로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하며 괴로워하다가 견딜 수 없어서 27년만에 경찰에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죄의식은 사람을 미치도록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죄의식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주십니다. 인생의 결국이 죽는다는 사실은 사람을 늘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며 허무와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사단의 고소에 시달리지 않고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둘째로,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18).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 참 자유함을 누릴 뿐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밝히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점점 변화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성화의 절정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나아가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최후의 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희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