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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1-18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4 강

질그릇에 담긴 보배

 말씀/ 고린도후서 4:1-18
 요절/ 고린도후서 4: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


  우리는 지난 주일에 우리가 어떻게 새 언약의 일군이 되었으며, 또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새 언약의 일군이 된 것은 아무 자격이 없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받은 바 은혜를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 받은 바 은혜를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바 은혜를 감당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은혜를 잘 감당하게 되면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지만, 은혜를 잘 감당치 못하면 오히려 은혜를 받기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를 감당하는 비결을 배워서 항상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빛의 직분 (1-6)

  1-6절에는 사도 바울이 어떤 자세로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했으며(1-4), 또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 선포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5,6). 

첫째,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낙심치 않았습니다(1). 
  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았으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 택함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후 그 여세를 몰아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체포하기 위해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 홀연히 하늘로서 찬란한 빛이 비추어 사울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은 강렬한 빛으로 사울을 체포하여 그를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왜 그를 택하셨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그 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실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복음역사를 방해하고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40여명이 있을 정도였습니다(행23:21). 또 그는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이단의 괴수라는 비방을 받고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때 그는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낙심될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항상 스피릿이 넘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애매하게 비난이나 오해를 받거나 핍박과 조롱을 받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쉽게 맺혀지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낙심하게 되면 내가 꼭 힘든 양을 좇아 다니면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선한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복음역사를 감당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열매를 맺혀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둘째,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습니다(2a). 
  다시 말하면 이중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서 행했습니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이란 궤휼 가운데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궤휼이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 아래 사리사욕을 취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 사업을 하는 동기가 순수치 못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가 방해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사심이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특히 그는 물질문제에 있어서 깨끗했습니다.  

셋째, 바울은 진리대로 살며 진리를 밝히 드러내었습니다(2b-4). 
  그의 사역의 핵심은 비진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진리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3: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예수님께서도 심문하는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사람들은 진리대로 사는 것은 좋지만 이 힘든 세상에서 진리대로 살면 손해 보고 낙오한다는 생각 때문에 진리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대로 살면 손해를 보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많이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진리대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진리에 속한 자로서 어떤 손해와 불이익이 있더라도 진리대로 살므로서 진리를 밝히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또 모든 사람의 양심에 자신을 떳떳이 내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만 떳떳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양심을 무시한다면 독선이 되어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양심에만 신경을 쓰고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다면 인본주의자나 도덕주의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군이 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만큼 그의 삶도 직분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투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 생활을 했는데도 복음을 영접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니라 복음을 영접치 않는 자들의 책임입니다(3). 만일 우리가 힘써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책임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도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치 않는 것은 복음을 영접치 않는 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치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게 되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사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심으로 생명과 평강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게 되면 이 세상의 신, 곧 사단이 역사하여 그 마음을 어둡게 함으로써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마음을 어둡게 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소경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 지식과 물질에 대한 욕망과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립니다. 영적인 소경이 되면 영적인 것들이 어리석게 보이고 우습게 보여서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의 빛을 받고 영적인 눈을 떠서 그 영광을 보고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은 다 감격하여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예 선장 죤 뉴톤은 교만과 정욕과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복음의 빛을 받았을 때 영적인 눈을 뜨고 감격의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찬405)

넷째, 바울은 예수님이 주 되심을 전파했습니다(5,6).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전파하는 것은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주 되심과 또 주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그들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 되심을 알고 영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는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시요, 나의 마음과 삶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이시요, 나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동안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시고, 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자기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는 메시야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메시야가 누구인지를 몰라 방황합니다. 어거스틴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그 마음에 진정한 안식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과 같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영혼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6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이 주 되심을 알게 되고 전파하게 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태초에 만물이 창조되기 전의 땅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이 짙게 드리우진 상태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찬란한 빛이 칠흙같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혔습니다. 대 창조의 역사는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빛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의 마음에 생명의 빛을 비추사 마음의 모든 어두움을 물리쳐 주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영적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찬란한 부활의 빛이 비추어졌을 때 그를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지고 영적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행9:18). 이렇게 빛을 받은 사람만이 빛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II. 질그릇에 담긴 보배 (7-18)

첫째, 질그릇과 보배 (7-15). 
  7-15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체험한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영광이 어떠함을 말해 줍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보배로, 복음을 맡은 우리는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복음과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적절히 표현해 줍니다. 보배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강도가 높아서 잘 깨지지 않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변치 않아야 하며, 그 가치가 영원히 지속되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금이나 진주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배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고이 간직합니다. 반면에 질그릇은 너무 흔하여서 별 가치가 없고, 잘 깨지고, 별 모양이 없어서 보기가 싫습니다. 사람들은 질그릇을 별로 귀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깨어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질그릇에는 별로 값이 안 나가는 된장이나 고추장이나 김치와 같은 음식을 담아 둡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질그릇에 불과하여 잘 부숴지고 보잘 것 없지만, 예수님은 보배와 같이 귀하고 가치가 있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3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보배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모양으로 묘사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요1:4). 또한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샘이 되시고(요4:14), 배고픈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요6:35). 예수님은 소경에게 빛이 되시고(요9:5),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분이십니다(요11:25).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고 운명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빛과 기쁨과 평화만이 충만합니다. 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 기쁨이 넘치는 인생, 평화가 넘치는 인생을 살려면 그 마음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해야 합니다. 
  연대 신과대학에 김정주 교수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대성그룹회장의 따님이십니다. 이 분은 이화여고와 이대 영문과를 줄곧 수석으로 나오고 미쉬간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하바드에서 신학학박사를 취득하였습니다. 하바드는 본래 영적인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복음적인 학교였는데 지금은 자유주의의 본산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복음적인 논문를 써서 통과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로마서에 나타난 성령론'에 관한 논문을 쓰자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도전함으로써 8년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분은 하바드에서 그 실력을 인정하여 교수로 초빙하였으나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 많은 나라로부터 영적으로 많은 빚을 졌는데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연대에서 학생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업 시간에도 틈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여 현재 약 100명의 학생들의 영적 생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관리해 주는 교수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1년에 100명씩 연대에서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교수로서 권위를 내세우며 얼마든지 교만을 부릴 수 있지만 조금도 권위의식이 없이 항상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서 학생들을 겸손하게 섬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수 연구실은 학생들에게는 문턱이 높지만 그 분의 교수 연구실은 문턱이 낮아서 학생들이 신앙상담을 위해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분을 연대의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분이 보배와 같이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분의 마음 속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하고, 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본받고자 애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보배는 옥합에 담아야 보배로서 더욱 가치가 납니다. 그런데 보배를 질그릇에 담는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게 하신 뜻은 보배가 가진 엄청난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1:16절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둥이가 문둥병에서 낫는 것은 기적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기적은 문둥이와 같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이러한 기적 중의 기적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인생,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도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고 보배되신 예수님을 그 마음에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간직한 보배 때문에 질그릇과 같은 나도 귀하게 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보배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면 자신이 보배인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교만하게 되어 못쓰게 되고, 심하면 박태선이나 문선명이나 정명석 같이 교주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로서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 성공하여 그가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인기가 매우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당국에서 조사단을 파견하여 당신이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이때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고개만 끄떡해도 영광을 한몸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네가 그 선지자냐?" 하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함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보배요, 자신은 질그릇에 불과함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는 분명한 철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례요한을 높이시고 귀하게 쓰셨습니다.  
  8-15절에서 바울은 보배되신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에는 그 안에 간직한 보배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승리하였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8-12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불사조와 같이 역경을 뚫고 승리하는 영적 장군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그가 이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많은 사람들이 능력있는 인생을 살고, 복음역사를 능력있게 섬기기를 원하지만 시대환경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특히 선진국 선교를 하는 분들은 선진국 지성인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합니다. 물론 시대환경이 힘들기 때문에 복음역사를 섬기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덧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대환경이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덧입을 때 오히려 어려운 환경이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기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가 다가올수록 복음역사를 섬기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 특히 제자양성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경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복음의 능력을 덧입을 때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환경을 이기고 이 시대를 이기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속 사람과 겉 사람 (16-18). 
  16-18절에는 사도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무리 잘 먹고 운동을 적절히 하고 보약을 많이 먹어도 세월이 지나면 낡아지게 마련입니다. 젊고 팽팽하던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에 흰머리가 생기고, 눈이 어두워지고, 정력이 감퇴됩니다. 또한 여인들에게는 골다공증과 같은 병이 생겨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가 빠지고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진시황제는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하여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고 나서 주로 영생을 얻는 일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도 49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갱신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을 때 가능합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여 나를 사로잡기까지 말씀을 붙들고 투쟁해야 스피릿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연수가 많아질수록 영적으로 더욱 스피릿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겉사람도 낡아지고 속사람도 낡아집니다. 처음 가졌던 감격과 은혜가 사라지고, 비젼도 점점 희미해져서 한때 학생시절에 가졌던 아름다운 추억 정도로 생각합니다. 개척정신도 사라지고 박력도 사라지고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되어서 소시민적인 생활인으로 전락하여 아무 문제의식 없이 편안한 신앙생활을 즐깁니다. 이런 생활은 실제로는 비참한 생활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부활신앙을 덧입혀 주셔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지만, 장차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은 크고 영원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이 땅에서 자신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육신은 질그릇과 같아서 잘 깨어지고 결국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보배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마음 깊이 간직함으로써 부활의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