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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21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5 강

화목케 하는 직분

 말씀/ 고린도후서 5:1-21
 요절/ 고린도후서 5: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
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표준새번역)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인간은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보배되신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증거하는 인생을 살 때 보배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또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I.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1-10)

첫째, 땅의 장막과 하늘의 집 (1-7) 
  1절은 4:18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4:18절에서 보이는 현상세계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의 육체를 장막에 비유하였습니다. 장막 집은 천막(스케누스,        )을 가리키는데 이는 인간 육체의 나약성, 임시성, 무가치성을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쇳덩이로 만든 자동차 엔진도 하루에 24시간씩 계속 쓰면 5∼6년 후에는 고물이 되어 폐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장은 무게가 약 230∼340g 정도밖에 안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만 평균 70년 정도 24시간 쉬지 않고 활동을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건강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오래 쓰면 노쇠해지고 결국에는 무너지고 맙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노쇠해서 무너질 뿐만 아니라 질병으로 무너지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소유하고 부족함이 없이 산다 할지라도 한번 무너지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한계 때문에 요사이는 전생과 환생을 주제로 한 영화나 TV 드라마, 서적, 대중가요들이 인기를 끌면서 전생·환생 신드롬이 사회에 독버섯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두 남녀가 1천년 뒤인 오늘날 환생해서 사랑을 나눈다는「천년의 사랑」, 26년전에 죽은 젊은 남녀가 환생해서 죽음을 넘나드는 사랑을 함으로써 전생에 못다한 사랑을 나눈다는 황당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전생을 보게 한다는 자기 최면유도 테이프와 잡귀를 막아준다는 장신구 등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현실의 삶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죽음의 한계를 넘어보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할지라도 새로운 운명주의에 빠지게 할 뿐 인간은 죄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롬6:23a, 히9:27).
  그러면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 영원한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집은 아무리 견고하게 짓는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썩고 부패하고 낡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자가 되셔서 지으신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초로 지은 집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고 견고하고 아름답고 영원합니다. 이 집은 결코 썩거나 더러워지거나 쇠하여지지 아니합니다(벧전1:3,4). 또한 이 집에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사망도 없으며, 언제나 생명과 평화와 사랑이 넘쳐 흐릅니다(계21:4).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 우리가 영원히 거처할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신나는 일입니까? 이러한 산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또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희망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세상을 도피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여 쾌락적이 되어 버립니다. 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참된 비전이나 꿈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소시민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고, 이기적이 되고, 탐욕적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장차 우리가 거처할 영원한 처소가 있다고 생각할 때 삶에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여인숙에 불과하기 때문에 꾸리지 않고 자신있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나그네로서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세상의 청지기로서 근면, 근검, 절약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을 도피하거나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청교도와 같이 부패한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변혁자로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2-4절은 사도 바울이 육신의 한계 때문에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지만, 죽어서 빨리 하나님 나라에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영화로운 몸을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거룩한 순례자로서 순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의 소욕으로 인해 원치않게 추하고 욕된 삶을 살며 신음합니다. 또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좌절과 절망을 맛보며 고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때로 우리는 빨리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도피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하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서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덧입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죽을 몸이 죽지 않을 영원한 몸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약하고 욕되고 썩고 부패해질 몸이, 강하고 신령하고 썩지 아니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증으로 주셔서 이를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5). 우리의 육신은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살 수 있도록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든든하다는 것은 담대함으로서 소망으로 충만하고, 신념에 가득차고, 기쁘고 용감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현재에도 계속해서 그런 소망을 가지고 확신있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흔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미래적인 것이요,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만 필요하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필요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마음에 산 소망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큰 소리를 치지만 근본적으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절망과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나가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와 떠나 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보이는 것에 얽매여 살지 않고 믿음을 기초로 살아갑니다(7).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이 이미 이루어졌고, 보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기 때문입니다(히11:1). 

둘째,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8-10)
  사도 바울은 사는 것보다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기를 소원합니다. 빨리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실상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현실의 삶을 경시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생사를 초월한 분명한 인생목적과 삶의 방향이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개혁성경)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명예를 사랑한다', '대망을 품고 분투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영적 야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어떤 야망을 품을 때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투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대권을 향한 야망을 품은 자는 대권을 잡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게 됩니다. 또 재벌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은 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자 합니다. 대 학자가 되고자 야망을 품은 자는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면서 온갖 고통을 견디어 냅니다. 이렇게 야망을 품을 때 그 야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의 야망도 우리로 하여금 역경을 이길 수 있게 하는데 하물며 영적 야망이야말로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의 야망은 결국에는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영적 야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야망은 거룩한 야망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야망을 가진 자는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인생의 제 일되는 목적입니다. 기독교 소요리문답 제 1문에 보면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두가지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든지 아니면 자기를 자기를 기쁘게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게 되면 자연히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이 되고 이기적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색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찾기보다 자기 생각과 계획을 좇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기뻐하실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 갑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났을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훈련을 주시구나 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는 인간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자기를 다 잃어버리고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면 그 인생은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의 용사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기워졌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는 죽음조차도 면제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히11:5).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축복만 바라고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축복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축복 대신에 훈련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10절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개혁성경)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인류 최후의 심판대로서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구분하는 자리가 됩니다(살후1:6-10). 그 후에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상의 크고 작음을 가리키는 보상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이 심판은 파국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그동안 주님을 위해 얼마나 일했는가 하는 가치에 대한 평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있다는 것은 우리 믿는 자에게 기쁨인 동시에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안일하게 살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예외가 없고 누구나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또한 이 심판은 도매금으로 하지 않고 각각 개별적으로 행하며, 행위의 열매를 따라 하기 때문에 공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마치 시험과 같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이 없으면 공부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으면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밤을 새어 가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60점은 따서 패스는 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한 종이여"하고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II. 화해케 하는 직분 (11-21)

  11-21절까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써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첫째, 새로운 피조물 (11-17)
  11절은 바울이 진실되게 행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의 양심에 비추어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된 삶을 살고자 애썼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고자 함입니다(12).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고 미친 것이요,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서 너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고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간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이때 바울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그리고 자신의 결박한 것 외에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미친다는 것은 한가지 일에 몰두하여 황홀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예수님께 미쳤다고 말합니다. 실상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인들이 열심히 예수님을 믿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엇엔가 미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바둑에 미쳐서 기원에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근무를 마치고 나면 곧장 기원으로 갑니다. 결혼을 한 후에도 주로 기원에 가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당구에 미쳐서 자나 깨나 당구를 칩니다. 그의 눈에는 사람 머리가 모두 당구알로 보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에 미쳤는데 이를 끊기 위해 손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발로 도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했다고 합니다. 술에 미친 사람은 건수를 만들어서 술을 마십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갈 때마다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가다가 한번은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그 집을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고 보니 그런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워 기념으로 한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요사이는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 권력에 미친 사람, 쾌락에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문에 미치고 예술에 미친 사람들은 고상하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엇엔가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에 미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미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미쳐야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이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대속의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되고 이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15). 
  16-18절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육신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주로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했는가 소유를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올바른 평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과거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기 전에는 그리스도도 육신의 잣대로 보았습니다. 그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이단의 괴수로 보였고 그를 따르는 자는 모두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후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의 가치관이 변하고 소망이 변하고 그의 생활태도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지만 그가 변했을 때 세상이 달리 보인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육신의 잣대에 비추어서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때 불만족으로 인해 늘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차던 삶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7)

둘째, 화목케 하는 직분 (18-21)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새 창조의 역사는 인간의 노력이나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은 불화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남한과 북한은 불화상태에 있습니다. 불화상태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고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화는 서로 동등한 상태에서 일어나지만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불화는 완전히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으로서 심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우리의 죄값으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늘 불안하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심판의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아니하시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화목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올 화목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서 희생하심으로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1서4:10)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누리게 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2절에서 그 축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갖게 됨으로써 죄의식과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참 평화와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율법의 정죄의식에서 벗어나 은혜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양육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 직분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18b,19). 이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보다도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직분입니다. 세상은 온통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민족간의 분쟁, 인종간의 분쟁, 종교분쟁, 지역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 남북간의 갈등과 분쟁, 고부간의 갈등 등 세상은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은 화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화해를 할려면 화해시키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평화적으로 화해를 감당한 자를 귀히 여기고 상을 줍니다. 96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은 동티모르의 카롤로스 필리페 시메네스벨로 주교와 독립운동가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입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에 무력으로 강점된 동티모르의 분쟁을 비폭력,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온 점이 높이 평가 받아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역간의 화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사람들간에도 자연히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힘써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자는 노벨 평화상은 받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매우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심는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성육신 하시고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통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곧 낮아짐과 섬김과 희생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할 때만이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주셔서 불화가 많은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를 심는 평화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남북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고, 나아가서 이 나라가 21세기에 제사장나라로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