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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1-7:16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6 강

마음을 넓히라

 말씀/ 고린도후서 6:1-7:16
 요절/ 고린도후서 6:13
"나는 내 자녀들에게 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뜻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표준새번역)


  오늘 본문은 복음역사를 섬기는데 있어서 복음의 일군이 가져야 할 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역사는 사람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세상일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는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영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한 분명한 영적 원칙을 소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몸부림치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역사를 섬기는데 있어서 분명한 영적 원칙을 가지고 섬겼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역사를 섬기는 영적 원칙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6:1-2)

  1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 주신 화해의 은혜와 또한 화해케 하는 직분을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값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형벌은 매 몇대 맞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이 파괴되고 영적 생명을 상실하여 구더기도 죽지 않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움으로써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화해케 하는 사명까지도 맡겨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노력의 댓가로 얻은 것이 아니라 아무 값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받은 바 이 은혜를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너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를 귀히 여기기
보다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에게 있어
서 공기와 물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씀으로써 공기는 숨쉬기가 힘들게 되었고, 물은 마시기 힘들 정도로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값없는 은혜라고 해서 감사치 않고 이를 남용하게 되면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파멸시키는 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를 겸손하게 잘 감당할 때만이 은혜가 됩니다. 마치 자유는 질서를 지킬 때만이 자유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는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늘 새롭게 하고 힘써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받은 바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가 수고한 것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의무감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도 조금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 줍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개역성경)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인생들에게 한없이 은혜 베푸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민수기 6:24-26절에는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때가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는 인류역사의 종말의 때가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때가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언제 종말을 맞이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인류역사는 분명히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세대에 인류역사의 종말을 맞이하지 않을지라도, 개인의 종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때를 소중히 여기고 은혜를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도 바울은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때임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때는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의 때를 놓친다면 영영히 그 때가 안올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당장에 하지 않고 미루는 좋지 못한 습성이 있습니다. 영어공부도 지금 당장에 하면 되는데 "언젠가는 한다. 두고 보라. 나도 언젠가 열심히 하면 잘 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내일로 미룹니다. 그렇게 하기를 1년, 2년, 10년을 넘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열심히 하겠지만 지금은 바빠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평생 바빠서 못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만한 기회를 놓치면 영영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때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느니라."(히3:12-15)

II. 복음의 일군이 가져야 할 원칙 (6:3-13)

첫째, 도덕적 원칙과 영적 원칙(3-10)
  3절부터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군으로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일해 왔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개역성경) 이 말씀은 화해케 하는 직분이 사람들로부터 흠이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슨 일이나 아무 사람에게든지 매우 조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저 사람 때문에 못믿겠다." 이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행동이나 삶이 복음역사를 방해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학생으로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서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온다면 이로 인해 좋지 않는 영향력을 끼쳐 복음역사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직장일을 소홀히 하거나 충성치 않는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 하며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며, 더 나아가 복음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게 됩니다. 복음은 복음 전하는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이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인격이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못하고 부담이 되거나 또한 말은 잘 하지만 실제 삶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4-8a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직분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답게 처신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먼저 그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이 인내는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견디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내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이 인내는 인간의 의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연단을 통해서 맺어지는 성령의 내적 열매입니다(롬5:3,4).
  바울이 복음역사를 섬기면서 겪은 어려움은 3가지씩 분류가 됩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은 일반적인 시련을 말하고,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은 외부에서 육체적으로 가해지는 고난을 말하며,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은 스스로 취한 고난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을 생각할 때 부담스럽기도 하고 심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정도로까지 고난을 겪지는 않지만 복음역사를 섬기면서 여러 가지 작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때로는 너무 열심히 일하여 몸살을 앓기도 하고, 때로는 잠을 자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식사를 제 때에 하지 못하여 굶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무시를 받기도 하고, 미움을 받고 핍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 슬픈 마음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겪는 어려움은 장차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한 보증수표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랑해야 합니다.  
  6-8a까지는 고난 가운데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일해 왔는가를 말해 줍니다.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은 도덕적 원칙을 말하고,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은 영적 원칙을 말합니다. 우리는 도덕적 원칙과 영적 원칙 모두를 견지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복음의 일군들이 영적 원칙만을 고수하고 도덕적 원칙은 무시하기 때문에 도덕성을 상실하고 악영향력을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도덕적 원칙은 고수하지만 영적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에 영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도덕적 원칙과 영적 원칙을 함께 중히 여겨야 합니다. 
  순결은 물질 문제와 이성 문제가 순결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큰 일을 한다 할지라도 물질 문제와 이성 문제에서 깨끗하지 못한다면 도덕성을 상실하여 영향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전도자인 짐스와그와 짐베이커는 어찌나 말씀을 잘 전하는지 그들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물질과 정욕에 빠져서 죄를 지었을 때 하루 아침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빌리 그라함 목사님은 물질 문제와 이성 문제에서 깨끗하기 때문에 지금도 미국 사람들 가운데서 최고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지식은 복음에 관한 영적 지식을 말합니다. 속담에 "면장도 알아야 한다"는 말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복음에 관한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인내는 반대자의 적의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친절은 적의를 가지고 대하는 사람을 관대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감화는 복음역사를 섬길 때 자기 힘이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1대1 성경공부를 할 때 열심히 말씀을 가르쳐 주고 먹을 것도 사 주고 잘 섬겨 주기만 하면 양이 아무 문제없이 잘 자랄 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은 아무 사심이 없는 진실된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이해타산에 근거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된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복음 곧 화해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적대자들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인간적인 재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방패를 들고 싸운 것과 같이,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의 무기는 의의 무기였습니다. 이 의(義)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바울이 사람들의 비난이나 칭찬에 매이지 아니하고 또 자기 의나 불의를 주장하지 아니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일을 열심히 한 후에는 자기 의가 생겨서 교만해지고, 일을 잘못하면 불의에 빠져 자학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과 같음을 잘 알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64:6)
  8b-10절은 사도 바울이 도덕적 원칙과 영적 원칙을 가지고 복음역사를 감당했을 때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겉 모습과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 모습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제자양성을 하자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고등 사깃군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진실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복음역사를 섬기신 것 같이, 그도 복음역사를 섬길 때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 것처럼 많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 그는 너무 고난이 극심하여 죽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또한 그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 그는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살아났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많은 고난을 겪으실 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53:4,5). 
  바울은 복음역사를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늘 마음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근심하는 사람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였으며,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서는 그가 옥중에서 쓴 서신입니다. 그는 옥중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또한 그는 손수 노동을 하면서 복음역사를 섬겼기 때문에 가난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이 보였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10). 세상에는 돈은 많으나 이기적이고 인색함 때문에 가난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인색함 때문에 자식들에게서 조차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돈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돈만 붙들고 부들부들 떨다가 나중에는 치매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요함이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푸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주고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잠언 11:24,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그가 진실되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며,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이는 그가 실제적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를 썼을 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둘째, 좁은 마음과 넓은 마음(11-13)
  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목자로서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을 너무 율법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다. 바울은 아비가 자식에게 대하듯이 그들을 향하여 마음을 넓게 열었습니다. 그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만일 그가 좁은 마음의 소유자였더라면 그들을 괘씸하게 여기고 싹수가 없는 양들이라 생각하고 마음으로부터 소망을 두지 않고 짤라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넓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문제 많은 고린도 성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품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자녀들에게 이르듯이 권면합니다. "보답하는 뜻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이상에서 우리는 좁은 마음과 넓은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좁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이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이요 율법적인 마음입니다. 좁은 마음의 소유자는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평가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판단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많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잘 영접치 못하고 판단을 잘합니다. 길이 좁을 때 체증이 생기듯이, 마음이 좁을 때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쉽게 파괴되고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좁은 사람은 스스로 사서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넓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마음이 좁은 사람은 "그럴 수가 있어" 하며 화를 내지만, 마음이 넓은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넓은 마음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타인 중심의 마음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의 마음입니다. 이런 자의 마음은 태평양 바다와 같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을 품고 겸손하게 섬깁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의 곁에는 사람이 붙어있지 못하고 떠나지만, 마음이 넓은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여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넓히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좁고 편협한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서,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고 품고 섬기는 넓은 마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그 몸에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마음을 넓히기에 힘씀으로써 세계 만민을 품고 섬기는 영적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하나님의 성전 (6:14-7:16)

첫째, 구별된 삶(6:14-7:1)
  6:14-7:1절까지는 이때까지 사도 바울이 다루던 주제와는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그리스도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불신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혼합주의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사귈 수 없고 조화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멍에를 함께 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불신자와의 결혼, 우상숭배, 도덕적 타락, 세속화, 혼합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시는 이교문화가 지배하는 곳으로서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살면서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부패하고 혼탁하더라도 결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세상의 어두움과 싸우며 부패를 방지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7:1절에서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받았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 가운데서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7:2-16)
  7:2-4절은 6:13절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서 고린도 성도들이 마음을 넓혀서 사도 바울을 마음으로부터 영접하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이처럼 간구하는 것은 그들과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5-16절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죄를 책망하는 편지를 쓴 후 마음이 편치 않다가 디도를 통해서 그들이 회개했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그 편지로 인해 고린도 성도들을 잠시 근심케 했으나, 그들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므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이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 근심은 근본적으로 불신에서 나오는 근심이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근심이기 때문에 백해무익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함으로써 믿음을 무너뜨리고 시험에 들게 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근심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근심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올바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데서 오는 근심으로서 영적 근심이요, 신령한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영적 투쟁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도덕적, 영적 원칙을 가지고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넓은 마음,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세계를 품고 섬기는 영적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