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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1-9:15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고린도후서 제 7 강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말씀/ 고린도후서 8:1-9:15
 요절/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헌금의 의미에 관한 말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제헌금의 의미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 큰 기근이 발생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궁핍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이방 교회로 하여금 구제헌금을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 모 교회와 이방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구제헌금을 가장 먼저 시작하였으나 거짓 사도들의 바울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들이 다시 새롭게 구제헌금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면서 헌금의 의미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헌금의 의미를 개인신앙 측면에서, 성도의 교제 측면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뜻이 있는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히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헌금의 의미 (8:1-24)

첫째, 마게도냐 교회에 임한 은혜 (8:1-5)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누구나 다 본받아야 할 좋은 신앙적인 예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신앙적인 예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영적 소원을 불러 일으켜서 자발적으로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회들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습니다(2).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중에 처하게 되면 근심, 걱정으로 심령이 어두워지고, 불평과 원망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기 중심적이 되고 심령이 오그라져서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구제냐 하며 남에게 무관심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거지근성과 의존심이 생겨서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결국 먹고 사는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되어 믿음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많은 시련 중에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을 만날 때마다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믿음이 정금과 같이 연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련 중에 있는 자들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기쁨으로 헌신적으로 구제역사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심령에 역사하셔서 이루어진 역사이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은혜는 마게도냐 성도들의 마음에 맺어진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출애굽기 35장에 보면 성막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기쁨으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가슴핀과 귀고리와 결혼 반지와 목거리를 드렸고, 어떤 사람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가죽을 가져 왔습니다. 여유가 있는 족장들은 보석 종류를 가져왔으며, 기술자들은 기술을 드렸습니다.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넉넉하여 남기 때문에 더 이상 가져 오지 못하도록 공포해야 했습니다(출36:5-7).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의무감이나 억지로 드린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감동되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마음이 감동되어 자원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 많은 훈련을 시키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어느 한쪽이 이를 어기면 자동적으로 파기되는 쌍방간에 책임이 있는 쌍무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을 잘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피로써 이를 인쳤습니다(출24:1-8).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 갔다가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부패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번에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께서는 내리고자 하신 화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성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친히 거하실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죄로 말미암아 진멸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에 기쁨으로 아낌없이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않고서는 기쁨으로 희생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둘째로, 마게도냐 성도들은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3). 그들은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적당히 하지 아니하고 힘을 다하여 하고 더 나아가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외부의 압력이나 분위기에 의해 하지 아니하고 자원하여 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원으로 하였을 때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구하였습니다(4). 여기서 참예(동참)한다는 것은 '코이노니아'로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제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의미도 매우 큽니다.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가 있을 때 그 모임은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를 돕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자를 찾아서 돕다 보면 마음에 은혜가 생기게 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도 일년에 한 번만이라도 나보다 더 가난한 자를 찾아서 나누고 섬기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로,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5). 그들은 물질을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을 주께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물질보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이상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할 때 보여 준 자세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이 기쁨으로 헌신적으로 헌금할 수 없습니다. 구제헌금은 아니지만 헌금하는데 있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죠지 휫트필드는 18세기에 미국에 제 1차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위대한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한번은 벤자민 프랭크린이 휫트필드가 말씀을 전하는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회자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고 냉담하며 빈틈없는 계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그 집회에 참석하면서 헌금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지를 듣는 중에 은혜를 받게 되자 어느새 그 결심이 허물어지고 동전 한 잎을 드리고자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지를 중간 쯤 들었을 때는 더욱 은혜가 충만하여 이제는 은화 한 잎을 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메시지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금화를 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헌금을 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을 다 드렸다고 합니다. 또 리빙스톤이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물질을 드리고 싶은데 주님께 드릴 물질이 없었습니다. 이때 리빙스톤은 헌금 바구니에 올라서서 "주님, 드릴 것은 제 몸밖에 없어 제 몸을 드립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8:6-9)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든 후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권면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고린도 성도들은 믿음이 좋았으며, 말솜씨도 뛰어났으며, 지식과 열정이 많았으며, 목자를 사랑하는 사랑도 풍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헌금하는 일에 있어서도 풍성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고린도 성도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영적인 것은 귀하게 여기고 투쟁을 잘 하였으나 물질은 경히 여기고 헌금하기에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큰 소리는 잘 쳤지만 실제 생활에서 희생하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은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 주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이 되고 균형잡힌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헌금도 믿음이나 말이나 지식과 같은 위치에 놓고 투쟁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갖기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 바치는 생활을 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주님께 바치는 생활이 인색한 사람은 어딘가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신앙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마6:21). 죤 웨슬레는 "나는 너의 돈 주머니가 회개하기까지 너의 회개를 믿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토록 하기 위해서 이런 권면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 섬김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마게도냐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킨 사도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은혜의 원형이요,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모든 은혜가 흘러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세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극한 영화를 누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비천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가장 비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큰 비하요,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얼마든지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그 권리와 특권을 온전히 포기하시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누리려고 한다면 결코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슈바이쳐가 인류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의 자유, 학문의 자유, 예술의 자유, 이 세가지 권리와 특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유사무엘 선교사님 선교보고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본국에서 내과전문의 교수로서 얼마든지 특권과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이를 포기하고 에이즈가 만연한 아프리카 우간다에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를 못한다고 많은 무시를 당했습니다. 어떤 동료 의사는 "당신 정말 대학 나왔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결핵에 걸려서 175cm의 키에 몸무게가 51kg까지 내려가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생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수없이 모든 것을 그만 두고 본국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남아서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은혜는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긴는데 있습니다. 세상에는 섬김을 받기에 합당치 않는 사람들이 섬김 받고자 하기 때문에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인생들로부터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시지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오셨습니다(막10:45). 여기에 은혜가 차고 넘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완전히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희생은 대속의 희생이었습니다. 말만 하는 곳에는 은혜가 없고, 희생이 있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거 죄 때문에 내면이 피폐하고 메마르고, 곤고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한 자라 할지라도 죄 때문에 내면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병든 내면이 치료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심령에 영생의 기쁨과 참 생명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과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온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만 은혜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항상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받은 바 은혜를 적극적으로 나누어 주도록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복의 근원으로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만 은혜를 누리고 은혜를 나누어 주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사해(死海)와 같이 어느새 은혜가 메말라 버리고 쓸모없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받은 바 은혜를 적극적으로 나누어 주는 생활을 할 때 갈릴리 호수와 같이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생명력이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셋째, 헌금의 사회적 의미 (8:10-15) 
  우리는 헌금을 할 때 일방적으로 희생을 하고 손해본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헌금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함을 말해 줍니다(10). 그러므로 있는대로 하라고 하십니다(11). 하나님은 우리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시고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12).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지만, 할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할 마음이 중요합니다. 
  13-15절에서 사도 바울은 헌금의 사회적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하도록 권면하는 것은 구제를 받는 사람은 평안하게 하고, 헌금을 하는 자는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평균케 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함으로써 남는 자도 없고 모자라는 자도 없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가진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서 서로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를 주신 것은 나만 부를 소유하고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를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부는 소유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진 자의 오만으로 인해 못가진 자들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오만을 버리고 못가진 자에게 부를 나누어 주고 베푸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작년 10월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그네스 플럼브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평소에 자선기관이나 병원 등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 500달라의 돈을 선뜻 기부할만큼 인정이 많았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근사한 식당으로 초청해도 거절하고, 꼭 햄버거 가게나 저렴한 대중식당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할머니가 죽은 후에 무려 9800만달러(한화 약 800억원)의 유산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를 모두 모두 장애인과 빈곤 어린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이 땅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자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남북통일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고 베풀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넷째, 실무자의 중요성 (8:16-24)
  16-24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 거액의 헌금을 취급함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얼마나 조심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무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실무자는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영향력이 좋아야 합니다. 바울은 구제헌금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신뢰할만한 디도를 세웠습니다. 디도는 바울의 동료요,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또한 디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사람을 세웠는데 그중 한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 칭찬을 받는 사람으로서 신앙적인 영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18). 또 다른 한 형제는 여러 가지 일에 그를 여러번 시험하여 신뢰할 만한 자로 크게 인정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철저히 조심하는 것은 이 선한 일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무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일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헌금을 하였는데 실무자가 게으르고 충성치 못하여 이 일을 소홀히 한다든지, 자기 일에 바빠서 실무일을 세심하게 섬기지 않는다든지, 관리를 소홀히 하여 도적을 맞는다든지, 헌금을 유용한다든지, 자신의 돈과 헌금을 구분없이 함부러 쓰다가 계산을 잘못하여 손해를 끼친다든지, 거액의 돈에 유혹을 받아서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될 것입니다. 실무자는 믿음의 영향력이 좋아야 하고 충성심과 신뢰성에서 뛰어난 자라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고자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하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II. 헌금과 축복 (9:1-15)

  1-5절에서는 헌금다운 참 헌금이 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함을 말해 줍니다. 아무런 마음 준비없이 갑자기 헌금을 하면 강요받는 느낌이 들게 되어 헌금을 하고도 심령에 은혜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지만 계획을 세워서 기도하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준비된 헌금을 드리게 되면 심령에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6-10절까지는 헌금의 축복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헌금을 하면 자기에게는 아무 남는 것이 없고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헌금을 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게 드린자는 적게 축복하시고, 많이 드린 자는 많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적고 많음은 물질의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많은 물질을 드린다 할지라도 인색함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적게 내는 것이요, 아무리 적은 물질을 드렸다 할지라도 가난한 과부와 같이 자기의 전 재산을 드렸다면 주님께서 보실 때 부자보다 훨씬 많이 낸 것입니다(막12:41-44). 하나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그러므로 각각 마음에 정한대로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지, 남과 비교하거나 마음 속으로 계산을 해서 인색함으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넘치도록 축복하사 우리가 모든 것이 넉넉하여 선한 일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낌없이 구제하는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의를 영원토록 있게 하시고 그 의를 기초로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한 선한 일은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가 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넘치도록 축복하사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게 하시고, 영적으로도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또한 이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치게 되고(11,1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13). 또한 서로 사모하여 기도함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14).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