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제 9 강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말씀/ 고린도후서 12:1-13:13
요절/ 고린도후서 12:9a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오늘 말씀은 10,11장에 이어 바울의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변호입니다. 12장에는 바울의 신비체험과 아울러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와 자신의 사도된 표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 위하듯 그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3장은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오늘 요절 말씀은 12:9a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의 은혜가 어떤 점에서 나에게 족한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I.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12:1-10)
첫째, 바울의 신비체험 (1-6)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랑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아무 이로울 것이 없는 무익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자랑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거짓되게 만듭니다. 또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며 결국에는 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인간적인 자랑은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백해무익합니다. 바울이 자랑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랑이 아니라 주께서 보여 주신 환상들과 계시들이었습니다. 그 자랑도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고자 합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이 신비적인 체험을 이야기 함으로써 자기를 자랑하고 바울을 대적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부득불 자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사년전에 있었던 신비체험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자신을 3인칭화 시켜 말함으로써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합니다. 십사년전은 고린도후서의 저작 시기를 AD 55-56년으로 본다면 AD 41-42년 때의 일입니다. 이 때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고향 다소에 가서 은거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그는 낙원에 올라가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하며, 그가 이끌려 갔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함을 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낙원으로 올라 갔을 때, 몸이 승천해서 올라갔는지 아니면 몸은 지상에 있고 영혼만 갔는지,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신비체험을 한 후 14년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랑을 해도 자신이 체험한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랑을 삼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바울을 과대 평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신비체험이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비체험은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갖게 해 주고 사랑의 끈을 견고하게 맺어 줍니다. 사도 바울이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비체험은 복음의 일군으로서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주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 줌으로써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거룩한 순례자로서 힘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영적인 소원을 충만히 덧입혀 줍니다.
18세기 중엽에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부흥설교가요, 신학자요, 철학자요, 사상가였던 죠나단 에드워즈는 신앙이란 오늘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마음에 속한 것으로서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체험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이는 경건한 묵상과 기도를 위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거룩한 하늘의 정결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신비체험은 개인신앙을 견고하게 해 주고 영적 소원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한편으로 신비체험은 여러 가지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신비체험을 한 자는 개인확신이 지나쳐서 자기 의가 생겨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방언 기도하는 하는 사람은 방언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합니다. 신비체험을 한 자는 말씀을 소홀히 하고 신비체험을 앞세움으로써 신앙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로 산 기도를 통해서 직통계시를 받고자 합니다. 건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계시된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바울은 14년 동안 신비체험을 혼자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 뿐 자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육체에 가시를 주신 뜻 (7-10)
7절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는 안질, 간질, 히스테리, 우울증, 두통, 말라리아, 위궤양 등 여러 가지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간질이나 히스테리나 우울증은 정신질환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서 안질이 갈라디아서 3:14,15절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해 볼 때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안질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부활의 빛 때문에 눈을 상하여 생긴 것이라고도 합니다. 육체의 '가시'라고 한 것을 보면 지속적인 육체의 고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육체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한 것을 보면 몸이 연약하여 생긴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사단이 그를 시기하여 하나님의 허용하에서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 준 질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몸에 가시를 주신 것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인간적인 교만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영적 교만에 빠진 자는 돌이키기가 힘듭니다. 교주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산에 가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비체험을 통해서 영적교만에 빠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쉬운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시기 위해 사단으로 하여금 몸의 가시를 허용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원수는 외적인 원수가 아니라 내적 원수인 교만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교만은 일이 잘 안되거나 실패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 될 때, 성공할 때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고 축복을 많이 받을수록, 일이 잘 되고 성공할수록 내 안에 역사하기 쉬운 교만과 싸우며 겸손을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5:5).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자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겸손이 몸에 벤 자들입니다.
바울은 몸에 있는 가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 고통을 제해 주시도록 세 번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되면 이런 고통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많이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쓴 뿌리를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의 종이 이런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 은혜가 안되니 제발 좀 고쳐 주십시오. 주님께서 질병을 고쳐 주시면 더욱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몸의 가시를 제해 주시지 않고, 그 의미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은혜로운 거절'이라고 합니다. 9a절을 보십시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불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은혜를 받은 것이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을 늘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은혜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과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죄를 짓고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신음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로 인해 심한 두통에 시달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또 어떤 사람은 밤마다 가위에 눌려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허무와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고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무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자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의 은혜만 받고 아무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삶의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이 행복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숙종 때 의주에서 국경 무역을 해서 거부가 된 정씨 거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귀한 새를 좋아하여 집안에 커다란 새집을 짓고 진귀한 새들을 모아 길러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새들에게 조석으로 모이를 주는 머슴이 있었는데 그는 조석으로 모이를 줄 때마다 한탄을 했습니다. "너희 새들은 팔자가 좋아서 잠만 자고 일도 않고서 종일토록 노래만 부르니 얼마나 행복하랴! 애고 애고 내 팔자야" 하고 팔자타령을 했습니다. 이 팔자타령을 여러번 들은 주인이 어느날 머슴이 모이를 주기 위해 새집에 들어간 사이에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고는 새팔자가 되게 해 줄테니 그 속에서 놀고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조석으로 융숭하게 밥상을 차려 들려 보냈습니다. 그는 마땅히 행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자 미칠 것만 같고, 이레가 지나자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것 같아 주인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 후 그 머슴은 노동의 고마움을 알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열심히 일하여 역시 거상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편히 먹고 사는데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보람되고 가치있고 값지고 고귀한 일거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멸로 치닫고 있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이 일보다 가치있고 고귀한 일은 없습니다. 이 사명은 내가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충분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은혜를 전혀 안받은 사람처럼, 은혜를 덜 받은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죄입니다.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는 참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둘째는, 고난이 없어지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고난을 받는 것도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몸의 가시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할 수 있고, 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으므로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고난이 없어져야 행복하고, 고난이 있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과 같이 고난을 통해서 인격의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셋째는, 하나님의 역사방법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역사방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강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강할 때는 자신의 강함을 믿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할 때는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25년만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로서 죽은 자와 방불하였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서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 되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때 아들 이삭을 주심으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광야훈련을 통해서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지고 짓이겨져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쓰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과 무지를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하신 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방법을 깨닫고 난 후부터 고난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무르게 하려고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약점들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과 지혜를 자랑하고 부와 성공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약점과 실패와 가난함은 부끄러워하고 감추고자 합니다. 연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하면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부끄러워하고 어찌하든지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 의미를 발견하였을 때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실패와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 몸이 몹시 연약하였습니다. 체구도 크지 않은 데다 몸마져 약하니 남자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연약함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저의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의 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뇌성마비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어 육체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하나님과 부모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에게 가시와 같은 육체의 고통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는 은혜가 되어 주옥과 같은 많은 시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의 고통 생각하면
나의 당하는 아픔을 참을 수 있고
주 예수의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나의 하는 모든 일이 피곤하지 않으며
주 예수님의 낮아지신 모습을 기억하니
높은 데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주 예수의 맛보신 고난을 느껴볼 때에
내게 있는 고난이 자랑스럽게 보이며
주 예수의 찔리심을 기억을 하면
나를 괴롭게 하는 가시가 괜찮아 진다. …"
II. 바울의 사랑과 근심 (12:11-13:13)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사도로 인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12절에서 자신의 사도된 표로 그들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음은 사도된 내적 증거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사도된 외적 증거입니다. 그에게는 사도된 표가 있었기 때문에 확신있게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복음의 일군된 표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의 일군된 표가 무엇일까요? 이는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우리를 부르셨다는 부르심입니다. 특히 캠퍼스 복음역사와 세계선교를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는 부르심은 어떤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외적인 표는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더 나아가 세계 각곳으로 선교사로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는 역사야말로 우리를 이 시대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표가 될 것입니다.
13-18절에는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깊은 애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 번째 나아가고자 하는데 결코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합니다. 바울이 구하는 것은 그들의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은 사람의 영혼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재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듯 바로 그들 자신들을 원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15) 여기서 허비한다는 단어는 돈 뿐만 아니라 시간과 정력과 사랑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들 자신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기꺼히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였습니다.
19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때까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명하는 목적은 결국 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복음신앙을 회복하고 또한 교회내에 성령의 그릇을 든든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20,21절에서는 바울이 그들에게 나아갈 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들 가운데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염려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13장은 바울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나아갈 때 두세 증인의 말을 근거로 소송사건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그리고 전에 죄 지은 자들이 회개치 않으면 용서치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이때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시험해 왔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믿음을 성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믿음을 성찰해 봐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과연 순수한 믿음인가? 나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인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내 자신의 믿음을 성찰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되신 예수님을 거스릴 때 무기력하게 되고, 진리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 때만이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적 권위로 그들을 처벌하게 되면 바울은 강하고 그들은 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악에서 떠나 진리 안에 거하게 되면 바울은 약한 자로 남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이 회개함으로써 그들이 진리 안에서 강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9,10).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11-13).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