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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에베소서 제 3 강
                             
오직 은혜로

말씀 / 에베소서 2:1-10
요절 /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보여 주는 교회론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란 비인격체인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1장은 에베소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 삼위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는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세 전에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값을 주고 사시고, 값으로 사신 그들을 성령으로 인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2:1-3:21절은 본 서신의 본론으로서 본격적으로 교회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신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4-6장은 실천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새로운 가치 기준, 특히 연합과 순결에 대해서 (4:1-5:21), 새로운 관계들(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회에서 상전과 종들)에 대해서(5:21-6:9), 최후로 사단과의 영적 싸움에 대해서(6:10-24)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론(2:1-3:21)에서 교회에 대해 논하기 전에 2:1-10절에서 먼저 개인의 구원을 논합니다. 그 후에 2:11-3:21절까지 구원받은 개인의 모임인 교회의 모습을 논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은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가?"(1-3), 둘째는, "우리는 현재 어떤 사람인가?"(4-7), 셋째는, "우리는 어떤 자로 지으심을 받았는가?"(8-10) 하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가? (1-3)

 사도 바울은 먼저 우리가 현재 받은 바 놀라운 은혜를 실감있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상기시킵니다. 이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흰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탕색을 까맣게 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3절에는 '너희'와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가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갈등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으로서 자아 발견을 하도록 돕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조사하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를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1-3절에는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의 참담한 상태를 묘사하는 세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종노릇하였다는 것이며, 셋째는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1). 1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이란 바른 길에서 이탈하는 것을 말하고, 죄란  '표적을 빗나감' 또는  '표준에 미달' 되는 것으로서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법도에서 이탈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영광스러운 표준에 미달되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롬 3:19). 한마디로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존재 자체의 말살이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죽음이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면,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8절은 영적 죽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아무리 건장한 육체와 명철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은 꽃병의 꽃과 같이 살아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누구나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 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삶을 마친다면 그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은 둘째 사망으로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0:14,15절은 말합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또 계시록 21:8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사람들은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을 군대가는 것이나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이 힘들지만 누구나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 지옥에 가는 것 나도 가지 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둘째 사망이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막 9:48,49).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는 부자가 지옥에 가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우리는 영적 죽음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다시는 기회가 없는 영원한 형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접해도 좋고 안해도 괜찮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선택을 좌우하는 것으로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 영적 죽음은 세상의 모든 수단과 비책으로도 치유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살아 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4,25절은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에베소 성도들은 과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영적으로 살아나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과거 그들은 사단의 종노릇하였습니다(2). 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행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페리파테오'로서 주변의 경관을 즐기며 자유롭고 한가하게 시골길을 걷는 산책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들은 사단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여유와 자유는 전혀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고통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과거 그들이 세상 풍속을 좇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사회 전체의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세상 풍속은 언제나 물질적이고 정욕적이며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세상 풍속을 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또 과거 그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랐습니다. 마귀는 불순종의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의 지배자입니다. 세상의 악과 부패와 폭력의 이면에는 이를 조종하는 마귀가 있습니다. 과거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거라사인과 같이 알 수 없는 세력에 이끌려 울부짖으며 고통하였습니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이런 삶을 살기 위해 대학에 들어온 것은 아닌데, 아냐 이건 아냐" 하면서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력에 이끌려 반복해서 죄를 짓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마귀였으며, 우리는 마귀의 소유였습니다. 마귀가 우리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잘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인식하고 이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강간이나 극악무도한 짓을 한다면 이를 쉽게 인식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미롭게 유혹을 하고, 친구나 존경하는 선배를 통해서 그럴듯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무섭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칼이나 총보다도 훨씬 더 무섭습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와 싸우는데 상대방의 머리와 마음 속으로 들어 갈 수 있고, 생각과 감정 속에까지 들어가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외적으로 강력한 무기를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무기가 될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아람이 서로 싸울 때 아람 왕이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어떤 곳에 진을 칠 때마다 이스라엘 군대가 이를 알고 적절하게 대처함으로 아람 군대는 번번이 패했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이 번뇌하여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 신복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 6:8-12).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적진을 훤하게 꿰뚫어 보는 엘리사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은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단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까지 깊이 침투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사단보다 더 강한 세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보다 더 강하신 분이십니다(막 3:27). 복음서에 보면 사단은 예수님만 보면 벌벌 떨고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결박하시고 우리를 사단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심으로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바울을 포함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꼭 같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적으로 진노의 대상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육체의 욕심은 타락하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 본성을 의미합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은 폭식이요, 잠에 대한 욕망은 태만이요, 성에 대한 욕망은 정욕이요, 물질에 대한 욕망은 물욕이요, 명예에 대한 욕망은 명예욕입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탐욕의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왠 만큼 가진 자들이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볼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구원받을 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롬 10:3,4). 그러나 바울은 그들도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내 속에 구원받을 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기 쉽습니다. 특히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고 양심을 좇아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일수록 자기 의를 내세우기 쉽습니다. 탕자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같이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자기가 비참한 죄인인 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지나면 또 자기 의가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과 같이 성실하게 산 사람일수록 자기 의가 강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의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복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스러운 죄인인가, 나는 전적으로 부패하여서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으며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롬 3:9).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 3:10-12). 창세기 6: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보실 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홍수로 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게 보이고 존경받을 만할지라도 인간은 본질상 사악하고 부패한 육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내 안에는 부패와 오염만이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마음 깊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란 아담 안에서, 아담과 더불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유전된 인간 본성 자체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롬 5:12-14).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진노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의나 적의나 증오나 복수가 아니라 죄악에 대한 신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죄는 지독히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예측할 수 있으며 결코 분위기나 일시적인 기분이나 변덕에 좌우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진노와 구원하시는 은혜는 인격적이십니다. 그분의 진노는 결코 사랑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잘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3:36절은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전 과거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세상 풍속을 좇았고 사단의 종노릇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둘째, "우리는 현재 어떤 사람인가?" (4-7)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상기시킨 후,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4,5절 보십시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4절은 우리말 개혁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에 보면 "그러나"(But)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너무나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단숨에 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성향 때문에 스스로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아담을 부르시며 아담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먼저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신 데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요한 1서 4:9,10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 날 수 있을까요? 이는 바로 기적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객관적이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주관적으로,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신기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롬 6:4,5).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영적으로 살아나는 일이 새 생명을 나누어 주는 일이라면, 일으키심을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속한 새 영역으로 들어 올리시는 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의 영역에서 건져내사 하늘의 영역으로 옮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1:13절은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는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모데 후서 2:11,12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사 그 영광에 동참시키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만큼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4a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나오고, 4b절에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옵니다. 그리고 5,8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며,  7절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긍휼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만이 진노를 극복할 수 있음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진실됩니다. 그 심령에는 항상 은혜와 감사가 넘칩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는 본래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가 인도에 가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옛날에 구두를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지요"라고 말하며 그를 깍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시편 51:1절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7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목적이 무엇인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일은 받은 바 그 은혜를 증거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신앙 간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신앙 간증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은혜가 됩니다. 신앙 간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틈나는 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의 역사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샘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 넘치게 되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어떤 자로 지으심을 받았는가?" (8-10)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바울이 왜 구원이 우리의 선행에 의해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이는 인간의 의를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써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만일 구원이 행함에 의해서 얻는 것이라면,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의를 행할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구원 얻을 인간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이 믿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음조차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내 믿음이 네 믿음보다 좋아, 나는 믿음이 있어서 어려움을 다 극복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믿음이 없니" 하며 믿음을 서로 비교하고 자랑합니다. 이에 바울은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을 자랑하는 것은 선물한 사람을 자랑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조금이라도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과거 저에게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목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넘치도록 축복하사 많은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 가운데 나도 모르게 자랑하는 것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큰 역사를 자랑하게 되고, 제자들을 자랑하게 되고, 경험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자랑하는 것이 많아지자 제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내가 자랑하는 것들을 다 거두어 가심으로 저를 훈련하셨습니다. 내 속에 자랑하는 것이 다 사라졌을 때 구원의 은혜가 제 심령에 새롭게 다가 왔습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아니고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요, 내가 가지고 믿음조차도 아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를 위해 그 고귀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그 크신 긍휼과 그 크신 자비하심과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하심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때로 우리는 부족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에게 자랑할 것이 없음을 슬퍼하고 자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아니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자랑하고 주님만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을 받은 후에는 선한 일을 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이 말씀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말해 줍니다. 고린도 후서 5:17절은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이며 재창조이고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행은 구원의 근거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선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전에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크고 원대한 구속의 경륜 가운데서 나를 구원하시고 선한 일에 쓰신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고 사단에게 종노릇하던 자였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본질상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선한 일에 힘쓰지 아니할 때 점점 구원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중에는 받은 바 구원의 은혜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고인 물은 온갖 병균이 서식하여 썩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고 살아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에 힘쓰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마음에 온갖 불평과 불만이 싹트게 되고 쓸모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선한 일에 힘쓰게 되면 늘 그 심령에 은혜의 샘물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선한 일에 힘쓸 때만이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고 은혜를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 일만이 헛되지 않고 영원히 남게 됩니다(고전 15:58). 오직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사 선한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