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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16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에베소서 제 7 강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

말씀 / 에베소서 4:1-16
요절 /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부터 3장까지 역사 속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 즉 우주적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소외된 인류가 화목하고, 분열된 인류가 연합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인류에 대한 창조였습니다. 우주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로서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신분 등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표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어야 할 것에서 행해야 할 것으로, 교훈에서 실천으로, 이론에서 일상생활과 관계되는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로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4:1-16절은 교회의 통일성, 4:17-5:21절은 교회의 순결성, 5:21-6:9절은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사회생활의 윤리, 6:1-20절은 신자가 싸워야 할 영적 투쟁에 대한 권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의 통일성, 즉 그리스도인의 연합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 하나 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1,2), 둘째, 하나 됨의 기초(3-6), 셋째, 하나 되는 것은 은사들의 다양성에 의해 풍성해짐(7-12), 넷째, 하나 되는 것은 우리의 성숙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13-16) . 하나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세상에 하나되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또 사람마다 성장배경이 다르고 기호와 취미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지향하는 목표와 방향이 다릅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민족과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 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하나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는 하나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 됨의 의미를 생각해봄으로써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 되기 위한 덕목 (1,2)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는 1-3장과 4-6장을 연결시켜 주는 단어로서 성도들이 받은 바 은혜를 기초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전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주님을 위해 감옥에 갇히기까지 죽도록 충성하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 구체적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그리고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하나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덕목입니다. 

(1) 겸손: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것"입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은 육에 속한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성품입니다. 육에 속한 성품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고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아 중심의 성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아 중심의 성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 타인 중심의 자아를 가져야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겸손(lowliness)은 매우 경시되었으며 헬라 사람들이 소망하는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겸손을 뜻하는 단어를 다른 사람을 인정하거나 칭찬하는 뜻의 문장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비굴하고 굴육적이고 노예적인 태도, 즉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참 겸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셨으며 섬기는 종이 되어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빌립보서 2:5-8절은 겸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하나 되게 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모든 다툼과 불화의 이면에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우고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한다면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죽기 싫어하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다툼과 분쟁과 불화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외적인 노력보다 각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으로 겸손하게 되고자 하는 내적 투쟁에 힘써야 합니다. 겸손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 될 수 있습니다.

(2) 온유: 아리스토텔레스는 양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덕을 온유로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기쁘게 순종하며, 사람에 대해서는 남의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부드러운 성품입니다. 또한 온유는 자신의 강한 성격을 자제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성품입니다. 온유는 결코 나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말과 같이 길들여진 야생 동물을 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강한 자가 자기 자신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품은 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같이 혈기와 감정을 죽이고 자신을 훈련하는 데서 생겨나게 되는 성품입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에 혈기가 많은 자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그 고역함을 보다가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해 궁중에서 익힌 태권도로 한방에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어 40년간 광야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혈기는 완전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비로소 불평과 원망이 몸에 벤 노예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며 그들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12:3절은 모세의 지도력이 그의 온유에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러므로 온유는 혈기와 감정을 죽이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형성되는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 

(3) 오래 참음: 오래 참음, 곧 인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해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우리를 자극하고 거역하는 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잘 참으며 다른 사람이 가해를 할 경우에도 분노나 복수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거짓으로 비난할 때 불같이 화를 내고 복수심을 품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래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속히 손 좀 봐 주시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고전 13:4). 사랑은 참고 또 참고 또 참는 것입니다. 흔히 선생님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하도 속을 썩여서 참고 참다가 영양분이 다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똥은 양들로 인해 다 타버려서 먹을 것도 없습니다. 인내는 시련을 당할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여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참는 내적인 힘입니다. 인내의 또 다른 특징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요청이 있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나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데서 내면에 형성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4) 용납: 바울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합니다. 용납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관용은 넓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포용하는 것입니다. 관용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시기나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역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관용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관용하는 동기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은 이때까지 말한 4가지 성품을 모두 포괄하는 궁극적인 성품이며, 이 모든 덕들의 절정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 되기 위해서 어떤 기구나 제도를 만들고자 합니다. 물론 연합하는 데는 기구나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기구나 제도를 만들지라도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 되는 것은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온유, 인내와 관용, 곧 그리스도의 덕목들을 본받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자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 됨의 기초 (3-6)

 3절을 보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하나 되게 함, 곧 연합은 교회들의 연합체나 교파간의 조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연합으로 신자들이 성령으로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이란 평화 그 자체가 결속시켜 주는 힘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과 평화할 때 자연히 이웃과도 화평하게 됩니다. 이러한 평화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연합은 곧 믿음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 되게 믿을 때 성령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힘써 지키라"는 것은 "열성적으로, 부지런히 지키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을 볼 때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이 수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야심이나 욕심은 분열을 낳게 마련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중심 보다 인간 중심이 될 때 분열을 낳게 됩니다. 모임에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것이 개입되면 분열됩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분열하는 것은 성령의 연합을 깨뜨리는 행위로써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며, 자기 주장을 버리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비판하기 보다 서로 격려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자연히 하나 될 수 있습니다.

 4-6절은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 될 수 있는 기초를 말해 줍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3-6절에는 '하나'라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이 중 세 번은 삼위 하나님에 관한 것이요 나머지도 삼위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됨의 기초는 삼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쪼갤 수 없듯이 교회도 쪼갤 수 없습니다. 

 몸은 모든 신자들이 그 지체로 구성되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를 몸이라고 한 것은 교회는 단순한 조직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인 조직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자는 몸의 지체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고, 또 몸의 지체들은 서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귀히 여겨야 함을 말해 줍니다. 몸이 나누어질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이 하나이니" 고린도전서 12:13절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분열과 불화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은사가 다른 사람의 은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우월감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은사가 동일한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고전 12: 4-11). 성령은 교회를 하나로 통일시킵니다. 분리와 불화는 사단의 역사이지만, 하나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우리는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로서 약속도 없고 소망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엡 2:12).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이 이 땅에서 출세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잘 먹고 잘 살아보고자 하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은 우리 몸이 구속되는 것입니다(롬 8:2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죄의 소욕에 시달리며 괴로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말씀대로 살고 싶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항상 몸이 말썽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으로써 몸의 소욕을 쳐 복종시키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영적 투쟁은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속히 이 몸이 구속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덧입고 완전히 변화되어 주님과 같이 됩니다. 와! 주님과 같이 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때는 다시는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 먹은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구속되기를 바라는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게 됨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르지만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오신다는 소망은 신자들을 하나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서로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주도 하나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당시 신자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당시에 주(큐리오스)는 로마 황제와 연결시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이기 때문에 황제를 주라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관리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내는 한 방법으로 "큐리오스 가이사"를 말하게 하여 이를 거부하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 체포하여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할 대상이 한 분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에 구원받는 수단으로서의 믿음도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롬 10:9).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외적인 표시로 받는 것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 믿는 자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되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교회의 통일성의 궁극적 기초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한 분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교회는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통일하시는 만유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고린도전서 8:6절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상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되시는 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가 되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처럼 교회도 다양하지만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일성을 파괴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통일성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고 한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데 분리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분리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요, 마음이 교만하거나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으로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배울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은사의 다양성 (7-12)

 7절을 보십시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이 말씀은 은사의 다양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획일적인 통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 된다고 할 때 개성이 없는 연합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하늘에 있는 공장에서 다량 생산된 것처럼 같은 유니폼을 입거나 꼭 같은 스타일을 지닌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 모임은 일대일 성경공부와 세계선교를 강조하기 때문에 항상 꼭 같은 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매님은 머리 스타일도 같고 헨드백도 성경책이 들어가는 기저귀 가방과 같은 큼직한 헨드백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UBF 자매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획일적인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은사로 인해 다채로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는 문화와 기질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 곧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독특하고 다릅니까? 박마가 목자님은 진실되고 충성되며, 김영식 목자님은 얼마나 유머스럽습니까? 권오규 목자님은 얼마나 목자의 심정이 넘치며, 강영복 목자님은 지난 여름 수양회 때 연극에서 맹구 역할을 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재주가 뛰어납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 볼 때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은사들은 각각 독특합니다. 이러한 은사의 다양성으로 인해 교회의 통일성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구원의 은혜는 믿는 누구에게든지 주어지지만, "봉사를 위한 은혜"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서로 다르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서로 우열을 비교할 수 없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8-10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게 되었는가 하는 배경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8절 말씀은 시편 68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68편은 옛날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하고 변호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출애굽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앞에 서서 승리의 행진을 하셨는데 그로 인해 시내산이 진동하였으며, 왕들이 도망하였습니다. 그때 시온산을 자기의 거처로 삼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은 시내산으로부터 그의 거룩한 처소로 오셨으며, 사로잡은 자들을 끌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짐을 하나님의 승리를 그린 이 시편의 완전한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가 무찌르고 무장 해제시키시고 권좌에서 쫓아낸 정사와 권세를 사로잡아 승리자로서 승천하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시편 68편에서는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전쟁의 승리 뒤에 어김없이 공물을 받고 또 풍족히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받았다"는 동사는 "가져왔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가장 낮은 십자가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최고의 굴욕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아지셨다가 가장 높아지셨습니다. 이렇게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부어 주셨습니다.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입니다. 사도 행전 2:23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오른 손으로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11절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다섯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나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여기에 바울이 방언과 신유의 은사보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이 은사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도는 보냄을 받은 모든 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다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는 교회의 기초를 이룬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말하고' 그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대언자를 가리킵니다. 신약의 선지자들은 직접적인 계시의 전달자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선지자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선지자는 성경 해석의 특별한 은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선지자들은 새 계시가 아니라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자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시대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고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선지자의 은사는 정확한 성경해석과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의 은사를 말합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복음 전하는 전도의 직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오늘날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은사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 복음을 들고 나갈 사명을 가진 복음 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는 불신자들을 죄로부터 돌이키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하는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목사(pastors)는 양떼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목자를 말하고,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을 말합니다. 목사와 교사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합된 은사입니다. 즉 목자는 교사의 일도 해야 하고, 교사는 목자의 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가지 은사를 살펴 볼 때 모두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들을 주신 목적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성도들을 무장시키고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해 성도들을 무장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은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유익을 위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 되는 것은 우리의 성숙을 요구함 (13-16)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바울은 하나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에게까지 자라갈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하나 되는 것은 성숙할 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알고 신뢰하게 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서로 그가 원하시는 연합 안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성장하려면 더 이상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14).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짓 가르침과 그럴듯한 유혹에 넘어가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성장하려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15). 사랑과 진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데 필요한 기본 요소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딱딱하여 설득력이 없고,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 되어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바울은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각 신자가 그 분량대로 일함으로써 몸 전체가 성장하는 것임을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거나 제도적인 문제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 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교만에 있고, 나의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잃지 않고자 하는 마음과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기 중심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고 그의 인내하심과 용납하심을 배울 때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하나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11).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