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 8 강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말씀 / 에베소서 4:17-32
요절 / 에베소서 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16절은 새로운 그리스도인 공통체인 교회의 통일성에 대해 말하고, 4:17-32절은 새로운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새로운 생활 표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과 교회의 성결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지 못하고 성결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치 못하게 되고 쓸모 없는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의 성결의 문제를 다루면서 성도 개개인의 성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 개개인의 성화가 바로 공동체의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방인들과 같이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전에는 이방인처럼 살았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으므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된다는 것입니다(17-24). 그리고 4:25-32절에서는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의 삶의 특징에 대해서(17-19),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에 대해서(20-24), 셋째, 의롭고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변화되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실례에 대해서(25-32) 입니다.
I. 이방인들의 삶의 특징 (17-19)
17-19절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이방인들의 삶의 특징과 그들이 타락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특징, 마음이 허망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먼저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면이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것처럼 권위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특징 중의 하나는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허무하다", "공허하다"는 뜻으로서 아무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인생을 결산해 보면 남는 것이 없고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허무와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현대인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회색 그림자 셋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는 공허감이요, 둘째는 죄의식이요, 셋째는 사망의 공포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과 육신만을 추구하게 될 때 세가지 회색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스위스 심리학자 융은 "현대인의 근본적인 심리의 병은 공허감이다. 만사가 무의미하다는 느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허무와 공허감은 철학이나 미술, 음악 등 모든 면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산다 할지라도 생에 대한 허무와 공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둘째 특징, 총명이 어두워집니다(18a). 총명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이해심이 없다, 삶의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 미 버클리 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수년 새 정보화 시대의 물결을 타고 정보량이 엄청나게 늘어나 지난 해에만 1.5엑사바이트의 정보가 새로 생겼으며 이 양은 매년 두 배 이상 늘고 있다고 합니다. 1엑사바이트는 10억 기가바이트로 보통 책 한권을 1백만 바이트로 볼 때 1조권에 달하는 책이 됩니다. 인류가 30만년 동안 만들어 낸 정보를 이제는 2-3년이면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지식이 쏟아지고 있지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은 극히 드뭅니다. 현대는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지식은 어떤 사물에 관한 단순한 정보라면, 지혜는 이를 어떻게,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성경을 버리게 되자 총명이 어두워져서 삶의 지혜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특징, 마음이 굳어짐으로 인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b).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은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으로써 고의적인 거부를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마음의 강퍅함에서 출발합니다. 훌던은 "이방인의 부도덕은 고의적인 것이며,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부도덕은 그들에게 비추이는 도덕적 빛을 그들 자신의 사고와 양심 안에서 고의적으로 거부한 결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로마서 1:21절은 이방인들의 죄가 고의적인 것임을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얽매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자유롭고 행복하리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부한 결과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마음이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게 되어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보다 무서운 저주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포도나무 가지의 최대의 비극은 나무에서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끊어지면 얼마 동안은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곧 생명력을 상실하여 죽게 되고 결국에는 말라 비틀어져 땔감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될 때 생명력을 잃게 되고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멋있게 잘 생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다닐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살았으나 죽은 인생에 불과합니다.
넷째 특징, 감각이 없는 자가 됩니다(19a). 감각이 없다니요? 오늘날 감각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오늘날은 3F 즉 Female(여성), Feeling(느낌), Fun(재미)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고 느끼고자 합니다. 그래서 감각 문화가 발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육체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감각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방인들이 감각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영적인 것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영적으로 무감각하여 피리를 불어도 애곡하지 아니하고, 기뻐해야 할 진리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아니하고, 기뻐하지 말아야 할 더러운 것에 대해서는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가치관이 전도된 세대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특징,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무감각한 자가 되면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자신을 방탕에 던져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기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삶의 뚜렷한 기준이 없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행합니다(엡 2:3). 금세기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현대인의 가장 커다란 불행은 절대성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절대적인 가치관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사람들은 제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는 것은 "종교적 의식으로 음란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방 신당의 제사는 그 신당의 매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1장 24-27절에서도 인간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음의 완고함이 무지를 낳고, 무지가 마음의 어두움을 낳고, 마음의 어두움은 영적 죽음을 낳고, 영적 죽음은 방탕한 생활을 낳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II.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20-24)
20,21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에베소 성도들은 과거 위에서 기술한 이방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혹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웠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들의 주님이요 구세주임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식을 얻는 것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와 깊은 관련을 맺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뜻으로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창시자의 가르침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보다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고, 유교도 공자보다도 공자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교훈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요 3:16).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합니다(요 14:6). 그리스도를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는 영생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배우게 되면 내 생애가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요 5:24).
20,21절에서 '배우다', '듣다', '가르침을 받다'라는 단어는 마치 학교에 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고,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진리를 듣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된 과목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과 생애,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동안 그리스도를 배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 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 '네비케이토'의 창설자인 도슨 도르트맨은 자기 일생의 삶의 목표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자, 또 그리스도를 알리자."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사명입니다.
또한 '배우다', '듣다', '가르침을 받다'라는 단어를 통해 말씀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배우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영적인 소원이 강한 소수의 제자들을 뫃아 놓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만 2년 동안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시아에 사는 자는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악령의 세력이 물러가고 은 오만어치나 되는 마술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19:9,10). 이와 같이 말씀을 가르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서 10:17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2-24절은 그리스도를 배워나가는 자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 것은 새 사람이 되었는데 다시 옛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한번 새 사람이 되면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은 옛 사람에 속한 행위를 벗어버리라는 뜻이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새 사람의 원리인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출애굽하여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 속에는 여전히 노예 백성으로서 옛 생활습관이 남아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로서의 옛 생활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 생활을 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패한 죄성을 지니고 있어 유혹과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반면에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옛 사람은 타락하여 파멸을 향하여 썩어져 가지만,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날로 새롭게 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말씀은 겉 모습만 변화되는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영에서 변화되는 진정한 변화를 받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사람의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분이 변하면 의복도 변하게 됩니다. 죄수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면 죄수복을 벗고 일반인이 입는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또한 군인이 제대하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의 옷을 입게 됩니다. 군인이 제대를 했는데 계속해서 군복을 입고 다닌다면 이는 분명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입니다. 새 사람은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암행 시찰 차 궁궐 밖에 나갔다가 다리 밑에서 고생하는 거지 소년을 보았습니다. 왕은 그 소년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그 소년을 아들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왕은 그 소년을 궁궐로 데리고 와서 문무 백관들을 향하여 선포를 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소년을 과인의 호적에 입적시켜 왕자로 삼겠소." 그 후부터 소년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소년은 왕자 옷을 입고 왕자로서의 법도를 익혀야 합니다. 그런데 궁궐에 있으려니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몰래 궁궐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시녀들이 말렸습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세수할 시간이 되자 그는 또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마마, 어디 가십니까?" "나의 세수하는 장소는 저 다리 밑에 있소." 그는 왕자지만 궁궐 생활을 익히고 왕자로서의 책임과 행동가짐을 배우기까지는 당분간 옛날 거지로서의 행동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 소년이 왕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지행동을 계속 벗어버리고 왕자라는 신분에 합당한 삶의 방법을 계속 익혀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황태자와 황공주로 삼아주셨지만 우리에게는 거지로서의 옛 삶의 방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지 같은 삶을 벗어버리고 왕자와 공주다운 살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III. 새 생활의 구체적인 실례 (25-32)
사도 바울은 25-32절에서 새 사람의 새 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실례를 말해 줍니다. 여기에는 소극적으로 벗어버려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입어야 할 예가 제시되어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제적인 것들이요 또한 인간관계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데 있습니다. 낡은 옷을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①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할 것. 2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고 결국에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할 때 신용사회가 건설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알려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는 신뢰 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 신뢰는 진리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교회는 사단의 노리감이 되어 버립니다. 진리에 기초한 신뢰는 성도의 교제를 강화시키고, 거짓은 성도의 교제를 약화시키고 파괴시킵니다. 거짓을 없애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말하려면 적극적으로 진리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참된 것을 말해야 할 이유는 서로가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를 재미있는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눈이 발에 대해 거짓말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발이 눈에 대해서도 거짓말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깊은 수렁이 있고 그 입구가 갈대로 덮여 있어 눈에 보이기를 단단한 땅으로 보인다면 눈이 발을 사용해서 밑이 비어 있는지 혹은 튼튼하여 발을 디딜 수 있는지 확인하지 않겠느냐? 또 만약 눈이 뱀이나 야생 동물의 위험을 관찰하게 되면 눈이 발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이와 같이 성도 간에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분을 품지 말 것. 26,27절을 보십시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어도'라는 말을 볼 때 분을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분에는 의로운 분노와 죄를 짓는 감정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의로운 분노는 있어야 하지만, 감정적인 분노는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존심이 상할 때 분을 냅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분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더라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을 오래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냄 속에는 죄성, 즉 이기적인 요소가 숨어 있기 때문에 즉시 사과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분을 내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분은 고혈압, 소화불량, 스트레스 등 모든 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 헌터라는 세계적인 생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 질투, 독선의 감정을 품으면 심장의 혈관이 압박을 받아 심장병이 생긴다는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존 헌터는 학회를 열어 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자가 그의 설명을 듣고 맹렬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존 헌터는 너무 화가 나서 반격을 가하려고 자리에서 얼어나는 순간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인은 극심한 분노가 심장의 혈관을 압박해 일어난 심장마비였습니다. 존 헌터는 죽음으로 자신의 학설을 증명한 셈입니다. 분노에 대한 듀크대 의사들의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사망률이 20%나 높다. 위궤양과 대장염 환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급하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다." 화는 인간의 영육을 병들게 합니다. 화는 영어로 'anger'인데 이것은 위험이라는 단어인 'danger'에서 'd'를 뺀 말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위험의 신호입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분을 내지 말아야 하고 또 어쩔 수 없이 분을 내었다 할지라도 빨리 화해를 해야 할 이유는 사탄이 틈타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분을 내는 사람들 뒤에 숨어 있다가 그 상황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증오심을 불러 일으켜 이간질을 시키고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분내는 것은 사단만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고 하였습니다.
③ 도적질 하지 말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할 것.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옛날에는 도둑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상선들이 닿고 떠나는 부둣가와 대중 목욕탕이었는데 목욕탕에서는 신발과 옷을 도둑질하였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도둑질하면 손을 짤라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손을 짤라버리라고 말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근면한 사람이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남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근면한 사람이 되어 너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일하는 목적은 재산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 주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④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선한 말을 할 것. 29,30절을 보십시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될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사람들에게 덕이 될만한 말만 골라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보약이 될 수도 있고, 상처를 주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잔인한 말 한마디가 지울 수 없는 상처을 주고 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치 돋친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무책임한 유언비어는 한 사람을 무고하게 매장시킵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죽입니다.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과 험담을 듣는 사람과 험담의 주인공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2:36,37).
유대교의 가르침에는 혀를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혀를 칼에다 비유하지 않고 화살에 비유했을까요? 이에 대해 어떤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제 친구를 죽이려고 칼을 뽑았다가도 그 친구가 빌며 용서를 구하면 그 사람은 화가 누구러져서 그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쏜 화살은 아무리 나중에 후회를 한다 해도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어느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랍비를 중상모략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랍비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며 죄를 사하기 위해 어떤 벌도 달갑게 받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 청년에게 새의 깃털로 속을 넣은 베개를 가지고 와서 안을 자르고 그 깃털들을 바람에 날려보내고 자기에게 오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시킨대로 한 후 "이제 제 죄가 씻겨졌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이 한가지 더 남아 있네. 이제는 가서 날라간 깃털들을 모두 주워오는 것일세." 그 청년은 "그건 불가능한데요. 이미 바람에 다 날려 보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지. 자네가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후에 가서 아무리 고쳐보고 싶어해도 네 말 한마디로 인해서 끼쳐진 피해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이미 날라가버린 새 깃털을 다시 주워 모으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네."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이나 중상모략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부드러운 말은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며, 따뜻한 격려의 말은 절망한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줍니다. 잠언 기자는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잠 21:18)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말로서 남을 도와 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말로서 남을 격려하며 살릴 수 있습니다. 말로서 천량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 일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근심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으나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구속의 날이란 몸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로서 그때 비로소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⑤ 모든 악을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할 것. 31,3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악독은 헬라어로 '피크리아'로서 화해에 응하지 않는 "오래된 원한"을 말합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당한 모욕, 피해, 무시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그 쓰라린 감정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빨리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깊어져서 나를 못쓰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노함은 감정적인 격분을 말하고, 분냄은 뿌리깊은 적대감을 말하며, 떠드는 것은 흥분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훼방은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비방하여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악의는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기뻐하며 이를 꾀하기까지 하는 악한 경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임으로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인자는 헬라어로 '크레스토스'인데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낱말로서 '선함', '친절함'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인자'를 "이웃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심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친절은 남의 감정을 자기 감정처럼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남의 슬픔, 남의 고투, 남의 문제를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까지도 인자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리우십니다(마 5:45).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 인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영어로는 "compassionate"이며, 원어는 "좋은 스프랑크나를 가진'이라는 뜻입니다. '스프랑크나'는 내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사랑과 온유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스프랑크나'는 '좋은 마음을 가진' (good-hearted)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남의 고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 줄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용서하라는 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에 출마한 링컨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에드윈 스탠턴이었습니다. 스탠턴은 미국 전역을 다니며 링컨을 헐뜯었습니다. 그는 링컨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깡마르고 무식한 자"라고 놀려댔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나를 비난했지만 국방장관으로서는 적임자다." 그 후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자원해서 조사를 맡은 사람이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울먹이며 링컨을 추모했습니다. "링컨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링컨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위대한 창조자다." 최선의 복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새 사람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을 입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참된 것을 말하며, 분을 억제하고 인내하며, 열심히 일하여 선한 일을 하며, 덕을 세우는데 선한 말을 하며, 서로 친절을 베풀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