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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22-33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에베소서 제 10 강
                             
그리스도인의 부부 생활

말씀 / 에베소서 5:22-33
요절 / 에베소서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사도 바울은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리심과 부활로 창조하신 새 사람, 곧 교회의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새로운 생활 표준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새 백성이 불가피하게 맺게 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요, 둘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며, 셋째는 상전과 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들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인간 관계를 말합니다. 과거 여자들의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마치 종처럼 살아 왔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지위도 매우 낮아서 윗 사람에게 억눌림을 당해 왔습니다. 종들은 비열하고도 야만적인 노예 제도 아래서 고통해야 했습니다. 이들을 해방시킨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천시 받던 시대에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시고 매우 귀히 여기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 되셔서 모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관계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부부가 하나되지 못하면 교회도 하나될 수 없고, 부부간에 평화가 없다면 교회에도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부부생활은 개인과 교회와 사회의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부부생활이 원만해야 가정에 행복이 있고, 교회가 평안하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부부생활의 원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윤리를 일반적인 윤리로 이야기 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기초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부부 윤리의 심오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I. 아내의 의무 (22-24) 

 22-24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과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것과 종이 상전에게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의 연속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능적인 면에서 요구되는 것이지, 인격적인 면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복종이라는 말처럼 분노를 자극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자유시대로서 억압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무조건 싫어합니다. 특히 여성들은 복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North Western 대학을 다니는 한 젊은 여성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듣고 매우 화를 내며 다른 것은 다 순종할 수 있어도 그것만은 절대로 순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미국과 같이 여성의 인격이 남자보다 더 존중되는 나라에서는 복종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무조건 반발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종의 의미가 무엇인지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종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종의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종이란 '종속', '예속', '정복'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복종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휘포탓소"인데 이는 '아래'를 의미하는 '휘포'와 "질서있는 방법으로 정돈하다"라는 뜻을 지닌 '탓소'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복종이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편과 부모와 상전의 권세가 무한하다거나, 아내와 자녀와 종이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복종이 요구되어지는 것은 인간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권세에 국한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인 원칙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에 겸손히 복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권세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도록 한다면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29절은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경은 남편과 부모와 상전의 의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권세를 행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권세를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면서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세의 성경적 개념은 억압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신자는 누구나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데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섬김과 사랑에 감동되어서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이와 같이 아내는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남편의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가정의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지 결코 상하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3절은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유추하여 설명하지만 그(그리스도)가 친히 몸된 교회의 구주시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상의 관계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머리됨의 의미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11:3, 8-12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 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3, 8-12).  이 말씀에서 바울은 여자는 남자보다 후에 났고, 또 남자에게서 났으며, 그리고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 또한 여자에게서 났으므로 서로 의존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창조의 순서와 목적에 있습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창조의 본래적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혼에 관해 말씀하실 때 창조의 본래적 사실에 기초해서 설명하셨습니다(마 19:4-6). 남편과 아내는 생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전혀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남자나 여자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남자와 여자가 꼭 같다는 말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보완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할 면에서 서로 다르고 보완적입니다. 서로 보완을 잘 하려면 협력(partnership)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알고 본문을 다 해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요구하거나 상대방을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남자와 여자의 보완적인 특징은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머리된 지위를 주셨다는 것과 아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고 자신에게 주신 역할을 잘 알고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써 가정의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실상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천시가 거의 보편적으로 만연되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복종"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반 의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여인들의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지 윌리암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기도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이나 종 또는 여자'로 만드시지 않으신 것을 감사할 만큼 여자들을 천하게 보았다. 당시 여자는 사람이 아닌 물건과 같은 존재였다. 여자에게는 아무런 법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 헬라세계에서 여자의 지위는 더 심했다. 헬라인에게 있어서 아내는 가정을 돌보며 그의 호적에 올라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존재일 뿐이었다. 남자는 자기의 즐거움이나 친분을 의례히 다른 곳에서 찾았다. 헬라 세계에서는 가정과 가족 생활이란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정조 관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 바울 시대의 로마는 상황이 더 심했다. 로마의 타락은 비극적인 것이었다. ... 고대 세계의 전체적인 흐름은 음란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결혼이라는 유대관계는 완전히 붕괴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은 그 당시에 여성의 지위를 높여 주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것은 에베소서 4:15-16절에 있는 말씀대로 몸이 건강하고 성숙하게 자라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되는 것으로서 그의 머리됨은 억압이 아닌 돌봄을 의미합니다. 통치가 아닌 책임을 말하고, 섬세한 사랑과 섬김을 말합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없을 때 존재할 수 없고,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남편의 아내의 머리됨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돌봄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같이, 아내의 복종도 남편에게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돌보아 주는 것을 감사한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Markus Barth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히 아내에게 남편을 복종하고 존경하라는 바울의 말은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무조건 따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 바울은 ...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자발적이며, 자연스럽고 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내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결코 여성의 지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것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남편과 아내는 머리와 지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머리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몸 전체가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화평이 없고 무질서와 분쟁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자는 남자지만, 남자를 정복하는 자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또 서양 속담에 "한 여자가 20년 동안 잘 길러놓은 남자를 한 여자가 20분만에 망가뜨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두 여자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내를 가리킵니다. 그만큼 아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울 수도 있고 바보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장래는 아내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아내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요사히는 남편들이 실직으로 인해 기가 많이 죽어 있습니다. 남편들의 기를 살려 줄 수 있는 것은 아내 몫입니다. 주부 경영학교가 발표한 남편 기살리는 7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루에 한번 이상 남편을 웃겨라. 둘째, 신용카드 사용과 과외비 등 지출을 줄여 남편의 부담을 덜어 주라. 셋째, 매일 한번씩 칭찬을 해 주라. 넷째, 남편이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라. 다섯째, 부부간에 진지한 대화를 자주 가져라. 여섯째, 부부동반 모임과 가족들의 대소사에 빠지지 마라. 일곱째, 남편과 함께 미래에 대한 밝은 설계를 하라.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남편을 무시하지 않고 존경하며, 남편을 머리로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내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남편에 대한 의무입니다.

II. 남편의 의무 (25-30)

 유교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아내의 의무만 강조하고 남편의 의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남편의 의무에 대해서 더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의무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25-30절까지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2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시기까지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남편은 이렇게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시고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이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아내는 자연히 남편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게 되고 순종하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달콤하고 감상적이며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요구됩니다. 흔히 남편이 아내에게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소." 하며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이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적으로 내어 주면 자발적으로 복종하겠어요" 라고 대답하면 본전도 못 찾게 됩니다. 남편의 권위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사랑의 방법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마디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26,27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희생적으로 교회를 사랑하신 목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입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한다'는 것은 '말씀 안에서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받게 되는 정결,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신부인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아름답게 단장하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억누르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교회가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도록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은 아내를 억누르거나 지배하려 들지 말고 아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돌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8-30절에서는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높은 수준에서,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낮은 수준으로 내려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데서 좀 더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육체를 위해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아프면 약을 먹고 자신을 돌봅니다. 이와 같이 아내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는 다 같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그 분의 지체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섬세하게 돌봐 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III. 결혼의 비밀 (31-33)

 사도 바울은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 창세기 2:2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편과 아내는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1+1은 분명 2인데 1+1이 1이 된다는 것은 산술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이 그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연합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 연합은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과 같습니다. 이것은 머리로 깨달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독립체였던 '나'가 결혼을 통해서 새로운 상호 존재인 '우리'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여기에 순응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약점도 다 좋게 보이고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마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마법의 효력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함께 살게 되면 자연히 서로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게 됨으로 장점보다 약점이 크게 보여 서로를 비난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부가 아무런 아픔 없이 다툼 없이 노력 없이 조화되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요행심리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과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부부 십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① 두 사람이 동시에 화내지 말라. ②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외에는 고함지르지 말라. ③ 눈이 있어도 흠을 보지 말며, 입이 있어도 실수를 말하지 말라. ④ 아내나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⑤ 아픈 곳을 긁지 말라. ⑥ 분을 품고 침상에 들지 말라. ⑦ 처음 사랑을 잊지 말라. ⑧ 결코 단념하지 말라. ⑨서로에게 진실하라. ⑩ 부부를 짝지어 준 창조주 하나님을 따돌리지 말라.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하고자 노력한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행복한 부부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리적으로 보나 심리적으로 보나 여러 면에서 하나되기 힘들만큼 완전히 다릅니다. 헨드릭슨은 남자와 여자의 자연적인 성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지혜로 인간의 한 쌍을 만드시되 남자는 인도하고 여자는 따르며, 남자는 공격적이고 여자는 수용적이며, 남자는 창안하고 여자는 창안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도록 만드셨다."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보면 남녀는 각각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과 같이 모든 영역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남녀는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하고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달리한다. 어떤 때는 언어도 다르고 환경도 달라서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고 말합니다. 남자들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제시하려 들고 감정 따위는 무시하는 반면, 여자들은 쓸데없는 조언과 부살핌을 제공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서 가장 흔히 느끼는 불만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보통 여자가 말을 하면 그냥 무시해 버리든가, 아니면 몇 마디만 듣고 자기 마음대로 문제가 무엇인지 판단하고는 해결방안을 제시합니다. 여자는 공감을 기대하는데 남자는 그녀가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서 가장 흔히 느끼는 불만 가운데 하나는 여자들이 늘 그들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는 그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느끼고 그의 생활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할 일을 일러주고 도움을 제공하려 듭니다. 그러면 남자는 조종당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남자는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남녀는 서로 다릅니다. 남자들은 혼자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그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고 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동굴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가 믿는 사람을 찾아가 자기 문제를 속시원히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감정의 공감대가 형성되면 한결 기분이 풀리게 됩니다. 남자들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조용히 신문이나 읽으면서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합니다. 아내들은 하루 동안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 함으로써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이 자기 말을 잘 안들어 주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남자들은 상대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을 느낄 때 마음이 움직이고, 여자들은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면 의욕을 갖게 됩니다. 남자가 원하는 사랑은 주로 신뢰해 주고 감사하는 것인데 비해, 여자는 관심을 기울여 주고 이해해 주고 존중해 주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로부터 높은 점수를 얻으려면 새 옷을 사준다거나 휴가여행을 데리고 가는 등 아주 굉장한 것을 안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 준다거나 꽃다발을 건네준다거나 짐을 날라주는 것은 별로 점수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매기는 사랑의 채점은 선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같은 점수로 채점됩니다. 남자들은 작은 선물은 1점이라면 큰 선물은 30점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새 옷을 사 주는 것도 1점이요, 자동차 문을 열어 주는 것도 1점으로 매깁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다른데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은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아내는 남편을 경외, 즉 존경하라고 한 것은 존경함이 없이 자발적인 복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종과 사랑은 깊이 생각해 보면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일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아내의 복종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일 뿐입니다. 복종이란 자신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요,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그만큼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은 복음의 진수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는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부 윤리가 세상에서의 부부 윤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내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남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귀히 여기고 아껴주며 이해해 주고 돌봐 줍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자녀들은 그 가운데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부부 사이는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부부 사이도 복종과 사랑을 기초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 요구하거나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전체 몸을 위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서로 협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부부간에 아름다운 동역이 이루어질 때 가정은 행복이 창출되고 교회에는 평화가 깃들며 사회는 안정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