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제 11 강
그리스도인의 가정 및 사회 생활
말씀 / 에베소서 6:1-9
요절 /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그리스도인의 부부 생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순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자발적으로 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할 때 행복이 차고 넘치는 가정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자연히 그 부모를 본받아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녀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모와 자녀 및 상전과 종의 윤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나 종에 대해서는 윤리가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원치 않을 경우 내다버리기가 일쑤였고, 약하고 기형적인 아기는 죽임을 당하였으며, 건강한 아기라도 성적 쾌락에 방해되고 자유롭게 이혼하는데 장애가 되는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종은 노예로서 물건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물론 윤리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부모와 자녀 및 상전과 종의 쌍방간의 윤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자녀 교육을 시킬 것인가? 또 어떤 자세로 사회 생활을 해 나갈 것인가 하는 원리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부모와 자녀의 관계 (6:1-4)
첫째, 자녀의 의무 (1-3)
1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5:21절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요구되는 일반적인 복종의 또 다른 예가 됩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순종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자신을 돌봐주고 사랑해 주는 자에 대해 자발적으로 자기를 맡기는 것을 말하는 반면에, 자녀들이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위임하신 권세에 대해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께 하듯 하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냥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세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본성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옳다"는 것은 단순히 "타당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의롭다", "율법을 충족시키다"와 같은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새긴 자연법에 속한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윤리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사회에서나 기준이 되는 행위입니다. 헬라나 로마와 같은 이교도의 도덕 선생들도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헬라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세가지 덕목은 "신들과 부모와 헬라의 법을 공경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사상(유교)에서도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효를 강조하였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율법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 20:12절은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권세로서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순종할 뿐만 아니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율법에서는 자식이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은 경우에는 패역한 자식으로서 사형에 해당되는 벌을 받았습니다(레 20:9; 신 21:18-21).
셋째로,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한 것은 부모에 대한 순종이 단지 윤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헨드릭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니 나의 부모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그가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도 바른 것이다. 그가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할 분이다."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주님을 대하듯, 주님께 하듯, 부모에게(부모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권세에 마지 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발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눅 2:51).
그러면 부모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부모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거나 성경공부를 못하게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예외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만일 부모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보다도 부모를 더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또한 부모가 범죄를 강요할 때 그 요구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범죄 행위를 자녀에게 강요했을 때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그 일을 저지른 자녀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자녀들은 부모들이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부당하게 보일지라도 "부모를 순종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자식들이 주 안에 거하도록, 다시 말하면 자식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함을 말해 줍니다. 어쨋든 자녀들의 순종은 부모에 대해 사랑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존경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순종하라고 위협하기 보다 약속이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순종에서 더 나아가 공경하라고 한 것은 공경은 부모에 대한 순종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의무이며 공경은 순종을 산출하게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십계명에서 5계명에 속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2계명이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수반하는데 왜 5계명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신 5:9,10). 그러나 이 말씀은 엄밀하게 말해서 약속 있는 계명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진술입니다. 그렇다면 5계명은 십계명에서 약속 있는 유일한 계명인데 왜 첫계명이라고 했을까요? 이는 단순히 십계명에만 국한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오경에 포함된 많은 계명을 염두에 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주어지는 약속은 번영과 장수입니다.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 부모공경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인물이 조지 와싱턴 대통령입니다. 워싱턴은 바다를 벗삼아 세계를 항해하는 멋진 선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선원으로 취직해서 먼 뱃길을 떠날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들과의 이별이 아쉬워 슬피 우는 어머니를 보고 워싱턴은 마음을 돌렸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내 꿈을 바꿀 수는 없다." 워싱턴은 항해를 포기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의 앞길은 평탄하리라.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 결국 효자 워싱턴은 한 배를 조종하는 '선장' 대신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이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또 문제는 자녀는 누구를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성년이 아닌 19세 이하를 말하는가? (미국에서는 만 18세 이상이 되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음) 아니면 평생 동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에서는 아버지의 권한은 그가 살아 있는 한 자식의 생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 아래 있지 않다 할지라도 일생 동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둘째, 부모의 의무 (4)
자녀들이 자기 부모를 순종해야 하는 것은 부모가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자세를 말하면서 자녀에게 권세를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세를 억제하고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또 아비들(부모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아비들'이라고 한 것은 아버지가 가정의 대표로서 자녀 교육의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아비들에게 주신 교훈이 아니라 부모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바울은 소극적인 권면과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권면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권세를 부려서는 안되고 억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 당시 부모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옥스퍼드 클래식 사전(Oxford Classical Dictionary)에 보면 부모의 권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인의 가족의 우두머리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모든 식구들에게 절대적인 권세를 행사했다. 가장의 권세의 전제적인 특성은 아비가 처벌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유아를 죽이거나 버릴 권리까지 있었다는데 있다. 가장은 자녀들을 노예나 물건처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로마인의 아비는 자기 식구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자기 식구를 노예로 팔아 넘길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사슬에 묶어서 자기 농장에서 일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으며, 법을 손아귀 안에 넣고서 마음대로 벌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에게 사형을 가할 수도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교훈이었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부모의 권세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권세를 오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아직 미숙해서 감당할 수 없는 불합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되며, 거칠게 대하거나 난폭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또 지나치게 편애하거나 방임해서도 안됩니다. 그들에게 창피를 주거나 비꼬거나 무시하거나 인격을 모독해서도 안됩니다. 어린아이도 인격이 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해야 하고 어린아이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1절에서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부당한 요구, 위압적인 태도, 잘못을 지적하되 성가실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잔소리를 함으로써 자식들을 낙심하게 하고 짜증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부모들이 사회의 경쟁적인 분위기에 말려들어 조바심 때문에 자녀들에게 "공부 해, 피아노 쳐, 미술학원 가" 등과 같이 과잉 요구를 하거나 비인격적인 요구를 함으로써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교훈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 특히 신앙교육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나 학교에 위임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내어 맡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에게 부모를 전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데 기울이는 배려가 애완 동물이나 화초를 기르는데 신경쓰는 만큼만 되더라도 사정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은 맞벌이 부부가 점점 늘어감으로 수입이 많아져서 물질적으로는 풍부해질지 모르지만 정서가 메마르고 불안해졌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생활 수준은 향상되어 가는 반면에 영적으로는 더 피폐해 가는 가정이 많습니다. 영적 교육에 있어서 영양 실조에 걸려가고 있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매우 바빠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 더욱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를 키운 수산나를 기억합니다. 그녀는 19명의 자녀들을 낳아 키웠는데 너무 자녀들이 많아서 그들과 대화하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자녀들과 면담시간을 정하여 신앙상담을 함으로 자녀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로 키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요,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영적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가정 기도시간을 가질 수 있고, 또 일년에 한 두 차례 자녀들과 함께 수련회를 가지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 교양은 자녀에게 본을 보여 자녀를 인도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교양은 행동으로 자녀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훈계는 말로써 자녀를 교육하는 것을 가리키고, 더 나아가 책벌에 의해서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존경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를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할 수 있습니다. 잠언 22:6절은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는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평생을 좌우하는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원리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는 자녀들에게 영적 원리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신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하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등과 같은 영적 원리들을 가르치면 자녀들은 성장해서 어릴 때 가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행하게 됩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책벌입니다. 자녀들은 미숙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또 인간의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때 부모가 책벌을 잘못하게 되면 자녀들은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또 어릴 때 지나친 간섭을 받고 자란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유방임적으로 키우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들은 제멋대로 자라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들을 너무 귀엽게 여긴 나머지 전혀 책벌을 한하는 것도 자녀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잠언 13:24절은 말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녀들을 귀엽게만 생각하고 사랑의 매를 아끼는 것은 자녀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한 노부부가 쉰살이 넘어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부부는 늦둥이를 얻은 기쁨에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재롱을 부리는 아들을 향해 "얘야 가서 어머니를 한 대 때리고 오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막대기로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아들에게 매를 맞은 어머니는 웃으면서 "아버지도 한 대 때리렴" 하고 말했습니다. 부모는 재롱둥이 아들에게 매를 맞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부모를 때리는 것이 흥미로운 오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손이 매워졌습니다. 결국 아들은 걸핏하면 부모를 때리는 패륜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아들에게 부모를 때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습관으로 굳어버린 아들의 행동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치게 됩니다. 곧은 묘목이 결국은 좋은 건축자재가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책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찌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부모들이 사랑의 징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징계를 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은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린애를 징계할 때는 먼저 당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 당신 자신이 훈련되지 않고서, 무슨 권리로 당신의 자녀에게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을 감독하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일과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 본질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 감정으로 인해 자녀를 망가뜨릴 수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 발레단에 20살의 천재 무용수가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월터 패트릭 비셀이었습니다. 청년은 연 2억원의 파격적인 개런티를 받았고 동료 무용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아파트에서 비셀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망원인은 과다한 약물복용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셀에게 분노를 발하는 일이 많았으며, 가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매질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직장생활에 너무 바빴고 비셀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비셀의 성격은 차갑고 괴팍했습니다. 그는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습니다. 그의 유서내용은 "약물로 망가지고 있다. 될 대로 되라" 였습니다. 어머니의 감정적인 분노가 자녀를 망가뜨린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미국의 한 여성지가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조심해야 할 다섯가지 말'을 발표했습니다. 첫째,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어." 이것은 자녀에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아가는 무서운 저주의 말입니다. 둘째, "너는 왜 다른 애들처럼 못하니."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말하면 자녀는 금방 부모에게 반감을 갖게 됩니다. 셋째, "네가 도대체 몇살이니." 정신연령을 거론하면 그 아이는 점점 비관주의자가 됩니다. 넷째, "이 바보야." '바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항상 자신감이 없습니다. 다섯째, "시끄러워. 제발 엄마를 괴롭히지 마라." 자녀들은 항상 엄마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어머니와 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대화를 거부하면 그 아이는 점점 폐쇠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됩니다. 자녀의 성격과 인격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첫 번째 스승입니다. 어머니로부터 희망적이고 사랑스런 말을 듣고 자란 자녀는 성격이 밝고 사려가 깊습니다. 결국 훌륭한 어머니가 훌륭한 자녀를 만들게 됩니다.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소년은 깊은 숲과 향량한 사막을 헤맸으나 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소년아,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마.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와 소년을 맞이했습니다. 그 위대한 스승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최고의 교육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II. 상전과 종의 관계 (6:5-9)
첫째, 종의 의무 (5-8)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말한 후 이제 그 방향을 사회적인 측면으로 돌려서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종들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인구 중의 많은 사람이 노예였습니다. 로마제국에는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들로서 육체 노동 뿐만 아니라 의사나 교사 또는 관리와 같이 교육받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들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산업을 노예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예 제도는 큰 도전 없이 용납되고 있었습니다. 노예는 대대로 물려 받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하고, 악성 채무를 청산하는 조건으로 인계되기도 하고, 전쟁의 포로들을 노예로 삼기도 했습니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로서 일종의 영혼 있는 소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주인은 노예들을 원하는 대로 체벌을 주고 사형을 시켰습니다. 노예들은 사소한 일로 매를 맞기도 하고, 손발이 절단되기도 하고,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이나 눈을 뽑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 중에서는 노예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노예에 대해 훈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고, 또 그들도 한 인격체로서 상전과 같이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들로 간주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대개 종들은 노예근성이 있어서 주인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하지만 주인이 보지 않으면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빈둥빈둥 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종들은 달라야 합니다. 종들은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합니다. 눈가림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5-7절의 짧은 구절에서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주께 하듯 하고" 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바울은 세속적인 임무들을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비록 상전들은 종들이 행한 선한 일들을 모른 체 하고 폭군처럼 군림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또 행한 대로 상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종들이 일하는 동기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9,10은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하고,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것처럼 하고, 일하는 동기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노예 시대에 살고 있지 않고 자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마지 못해 하기 쉽고, 또 상관이 보면 열심히 하다가 보지 않으면 대충대충 하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눈가림식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기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인정도 받지 못하고 성공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누가 보나 안보나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하여 해야 하며, 그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3:23-24절에서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루터는 "하녀가 방 하나를 청소할 때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장만한다거나 집안 청소를 한다거나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친다거나 의사로서 환자를 돌본다거나 직장에서 업무를 감당한다거나 일대일 성경공부를 가르친다거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장만할 때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 음식을 드시게 될 것처럼 정성스럽게 장만하고, 청소를 할 때도 그리스도께서 손님으로 오실 것처럼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또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때도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처럼 하고, 의사가 환자를 돌볼 때도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섬긴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런 봉사가 직접적으로 주님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한잔의 물을 대접한 일조차도 간과하지 않으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0:42; 25:40).
둘째, 상전의 의무 (9)
9절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상전의 의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진술하지 않았으나 매우 높고 분명하고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황금률에 관한 말씀으로서 당시 상전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존경받기를 바라거든 존경하라." "섬김을 받고자 하거든 섬김을 베풀라." "종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란다면, 자신도 꼭 같이 자기 종들에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공갈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상전도 그들의 종을 공갈 협박함으로써 두렵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책벌이라는 공갈을 통해서 자기의 권세 있는 지위를 오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갈은 권력자가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무기입니다.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너 그렇게 하면 당장 해고야" 하며 공갈을 친다면 고용인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골로새서 4:1절에서는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고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종이나 그 종을 소유한 자들 모두에게 상전이 되시고, 또 하늘에 계신 주인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5:22-6:9)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상하간의 윤리를 공부해 볼 때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는 평등성과 공정성과 형제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분명한 질서는 있지만 이 질서가 위에서 아래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상전과 종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동등합니다. 남편과 부모와 상전도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신 권세를 오용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또 아내나 자녀나 종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남편과 부모와 상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