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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1-24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제 1 강

다른 복음은 없다

말씀 / 갈라디아서 1:1-24

요절 /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자유의 대 헌장’,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독립 선언문’이라고 일컫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당시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술하지 않고, 그들의 공격이 성공했더라면 기독교는 단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행위의 종교가 되고, 은혜의 종교가 아니라 율법의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참된 자유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에게 죄의 짐과 삶의 짐 외에 또 다른 무거운 율법의 짐을 안겨주는 얽매임의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율법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1517년에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과 더불어 각광을 받게 된 책입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로마서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나는 사실상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사랑스러운 아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16). 갈라디아서는 소 로마서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나 서신을 쓴 시기와 대상과 실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강조점이 다릅니다. 로마서는 미래의 전도지를 바라보고 침착한 논설조로 로마 복음화를 위해 조직적으로 쓴 서신이라면,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의 당면한 위기에 대처하여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쓴 전투적이고 변증적인 서신입니다. 로마서의 핵심 단어가 ‘의’(Righteousness)라면, 갈라디아서의 핵심 단어는 '자유'(Freedom)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율법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참된 자유의 메시지입니다. 이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죄와 세상적인 가치관, 육적인 자아에서도 벗어나 참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헌장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무책임하게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복음으로 얻은 자유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얻은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고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이 육에게 질식당하고, 참된 자유가 쾌락이라는 방종에 먹혀버리고, 순결, 진실, 고상함이라는 단어가 낯선 이방인의 단어 같이 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노아 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육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육체가 된 인간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경향이 악하고 물질적이고 정욕적이어서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젊은이들은 어릴 때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욕적이고 쾌락적인 영상물에 접함으로 정상적인 사고활동을 할 수가 없고, 고결한 인격을 연마할 수 없으며,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세계와 영적 세계가 황폐화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도 은혜를 남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며, 은혜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큰 세력을 얻어서 모든 인간적인 생각들, 육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함으로 실제 삶 가운데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장은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한 변증입니다. 이 변증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위대한 변증입니다. 오늘 1장에서는 복음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각 사람마다 제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문화 , 다종교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복음이 여러 진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무엇을 믿든 진실되게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만이 있을 뿐입니다.

  1. 사도직에 대한 확신 (1-5)

1-5절까지는 서신의 서두에 해당하는 인사말입니다. 보통 서신은 가벼운 인사말로 시작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바울은 서두부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증거하고 복음의 핵심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바울이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증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깎아 내림으로써 그가 전한 복음을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목적은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을 이간시킴으로써 자기들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4:17).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도대체 바울이란 작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아니잖아. 그는 누구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일이 없어. 그는 단지 자칭 사도라 하는 사기꾼일 뿐이야. 그러므로 그가 전한 복음도 믿을 수 없어.”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신실치 못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기꾼이야”라는 말을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을 이상하게 보고, 그가 무슨 말을 하던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 대한 비난의 말을 들을 때 직접 본인의 말을 들어보거나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검증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전에서도 상대방을 비난하는 흑색선전을 주요전략으로 사용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이런 전략에 말려들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부정적이 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부정적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강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막 3:14; 눅 6:3). 그러므로 사도는 신자, 제자, 형제, 성도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임명하신 특수한 칭호였습니다. 열 두 사도들에게는 유일무이한 독특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 권위는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함께 하였고, 예수님의 고난에도 동참하고, 특히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자라는 독특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함께 하지 않았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도 목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핍박한 자로서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일방적으로 사로잡으셨습니다. 그가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땅에 엎드러졌고, 순간 그는 그 빛으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해서 그는 순간적으로나마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으로 보았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사도라고 주장하는 근거였습니다. 만일 그가 사도라고 주장하는 것이 단지 이 사건으로 끝났다면 자칭 사도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사도직은 그의 변화된 모습과 사역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계시해 주셨고, 또 능력을 부여해 주심으로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그를 사도로서 인쳐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이방 교회가 개척되었고, 그가 쓴 서신은 신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열 두 사도들과 달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특별한 뜻 가운데 부르시고 직접 임명하신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도직은 교단의 임명이나 선출로 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나 전도로 된 것도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릴 수 없는 체험에서 온 확신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자요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목자생활도 할 수 없고 선교사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이 극적이고 직접적인 사건은 없지만,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확신은 사도 바울이 가졌던 확신과 동일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이 말씀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는 누구든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음을 말해 줍니다. 바울을 불러 쓰신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사람을 불러 그의 구속역사에 쓰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선교사가 되고자 결심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드린 예배 시간에 어떤 설교를 듣고 난 후였습니다.”그러자 그러한 결심을 하도록 감동을 준 설교자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그 설교자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 그 설교자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이거나 어떤 자격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설령 신학교를 나오고 어떤 자격증을 부여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물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고귀한 시간과 물질과 정열과 청춘을 희생하면서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사역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일을 위해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누가 뭐라고 하든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자요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2-3절에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복음의 핵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으니”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또 그 죽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받고 영원히 파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귀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자기 몸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 값이 치루어지고 아무 값없이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4절 하반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목적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악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가치관이 지배하고, 거짓과 폭력과 부패가 만연합니다. 이 악한 세대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이런 악한 세대에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악에 물들어 거기서 벗어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는 내 힘과 의지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보배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세대로부터도 구원하사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 지은 것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생각할 때 감격에 벅차서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5).

  1. 복음에 대한 확신 (6-24)

바울의 서신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먼저 서신을 받는 자들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문제에 대해 언급합니다.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 조차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변과 지식의 은사에 대해 감사한 후 그들을 책망했습니다(고전 1:4-7).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서두에서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들을 질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어찌하든지 그들을 복음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바울의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복음의 유일성에 대해 말한 후에(6-10), 자신이 전한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참된 복음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11-24).

첫째, 복음의 유일성 (6-10). 6-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충성을 바꾸는 것으로써 변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은혜의 복음에서 율법의 복음으로 변절하였고, 믿음의 복음에서 행위의 복음으로 변절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가를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전한‘그리스도의 복음’과 유대 율법주의 자들이 전한‘다른 복음’을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어떻게 바울과 바나바를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로 인도하셨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행 13-14장). 바울이 각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상황에 맞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복음의 내용은 같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행 13:26-41). 많은 이방인들이 이 메시지를 영접하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된 새로운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모세의 법대로 할례도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행 15:11).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만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충분치 못하고 우리가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다 인간적인 요소를 덧붙인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는 별로 심각하지 않은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복음을 변질시킨 것으로써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며 강하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구 언약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을 보시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새 언약을 몰랐습니다. 새 언약은 구 언약과 달리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죄악을 사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렘 31:31-34). 이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면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구 언약은 할례를 포함하여 모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행위의 복음이요, 율법의 복음입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새 언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강도와 같이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복음이요 은혜의 복음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와 유대 율법주의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을 하다가 이 문제를 예루살렘 총회에 상정하였습니다. 그 때 모든 사도들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이방인들에게 그 어떤 율법도 강요해서는 안됨을 결의함으로써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였습니다(행 15:11).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도록 권면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행 15:19-20).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한 결정을 모든 교회에 알려 줌으로써 교회를 복음 위에 굳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통해 오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신 일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다 조금이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 하게 되면 다른 복음이 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특별한 영적 경험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지만 구제와 같은 선한 행위나 금식이나 헌금, 새벽 기도, 성경 읽기, 일용할 양식,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자기도 모르게 구원을 위해 어떤 업적을 쌓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만 은혜로 하는 것이지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타이틀이나 위치도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간의 노력을 가미하게 되면 교만하게 되고 감사치 않게 되고 자기 의로 가득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같이 속히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율법이 갖는 매력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을 얻고 난 후에 힘을 얻어서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은혜로 사는 것은 너무 막연한 것 같이 생각되어 구체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정하여 지키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게 되면 자기 의가 생기고, 자기 만족감과 성취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성실하고 착한 사람일수록 은혜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하고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자들의 특징은 마음에 깊은 평화와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노력은 우리를 자기 의에 빠지게 하여 교만하게 만들거나 또 이를 지키지 못하면 불의에 빠지게 하여 우리를 정죄의식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제 구원의 도를 벗어나 죄와 율법의 멍에를 지는 엄청난 신앙적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요란케 한다’는 것은 ‘흔들다’, ‘선동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순수 복음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복음을 변질시키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증산교와 같은 것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자유를 주고 행복을 줄 것 같은 것들은 다 다른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것 같은 기쁜 소식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한 때 모든 사람이 모두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있다는 희망에 부풀게 했습니다. 그러나 70년 간의 실험 끝에 모든 사람이 모두 함께 못살게 되고 불행에 빠지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류에게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한 때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테크노피아가 인류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줄 복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행복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류는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전보다 더 불행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독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황폐케 하고 인간의 컴퓨터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컴퓨터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일이 과거보다 더 많아져서 과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웰빙주의입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열심히 먹습니다. 이 웰빙주의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물질적이 되고 육신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만한 것들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맵니다. 육신의 정욕이 행복을 줄 것 같아 육신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를 파멸시키는 무서운 독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육신의 쾌락은 잠시는 짜릿한 기쁨을 줄지 몰라도 그 후에는 무서운 허무와 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속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고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준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 때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참된 영혼의 기쁨과 희열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며 말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는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무섭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복음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에 대해 욕을 할 수도 있고, 저주를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이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여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인기를 얻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10절에서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 즉 자기 양들과의 관계가 다 깨어진다 해도 그들을 복음 진리에 세우기 위해 책망하고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양들이 반발하고 도망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할말도 못하고 양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복음신앙 위에 굳게 세우기 위해 믿음으로 도전해야 하고, 회개의 메시지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 (11-24). 11-24절에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된 복음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인간 스승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명상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요,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정교하게 꾸며낸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도들에게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바울이 직접 받아 전한 것입니다. 그는 1절에서 자신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주장한 것 같이, 이제는 복음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증명하고자 그의 회심 전과 회심 당시 그리고 회심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3-14절은 그가 회심 전에 두 가지 면에서 광적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데 광적이었고, 유대교를 믿는데 광적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누구에게서 복음을 듣고 변화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화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온전히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15-16a절은 그의 회심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그를 택정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 일방적인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16b-24절에서는 회심 후에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고 배울 수 있는 현장에 없었다는 알리바이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는 회심 후에 사도된 선배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바로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3년간 머물면서 구약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재조명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갔고, 후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와 함께 15일을 유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베드로에게 복음을 배우려고 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었고, 또 그가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기간은 고작 15일이었으므로 복음을 배울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 되지 못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 그는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다소로 가서 오랫동안 지냄으로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들을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에 있는 성도들은 바울을 잘 알지 못했지만 다만 그가 전에 박해를 하며 멸하려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함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오직 복음 만이 그와 같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주장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가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참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참된 자유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확신을 주셔서 다른 복음과 싸우며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