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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1-21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제 2 강

복음 진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음

말씀 / 갈라디아서 2:1-21

요절 /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강에서 우리는 복음의 유일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늘 제 2강에서는 복음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 대로 사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실생활에서 진리 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진리 대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편견을 버려야 하고 편안한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조차도 이에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음 진리를 따라 살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면 숙연해지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포스터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절대 진리는 절대로 없다는 전제 아래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여깁니다.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시대 영향을 받아 복음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복음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다면 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복음 진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왜 복음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가? 또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가 어떻게 복음 진리를 수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복음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 복음 진리를 수호한 바울 (1-10)

1강에서 살펴 본 바 대로 바울은 회심한 후 3년 동안 아라비아로 가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깊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잠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 후 그는 길리기아의 다소와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머물렀습니다. 2:1-10절에서 바울은 회심하고 나서 14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방문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 때 방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절에서 ‘사사로이’(privately)라는 말과,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말은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공식적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개인적으로 방문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이 방문은 사도행전 11:30과 12: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전달하는 중에 바울은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시라도 타협치 않은 바울과 복음의 성격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일시라도 타협치 아니한 바울 (1-5). 1-5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안디옥 교회에서 있었던 비슷한 위기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도록 도우셨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의 마음에 복음이 강하게 역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임에 침입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유대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게 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빼앗아 가고자 했습니다. 이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안디옥에 있는 어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적으로 흔들렸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도울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많이 한 후 예루살렘을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회심한 이후 14년 동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아무런 교제가 없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의 사도직과 그가 전파한 복음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독자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임의로 갔거나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간 것이 아니라 계시를 따라 갔습니다(2a).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같은 유명한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복음을 사사로이 제시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방 가운데 전한 복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b). 만일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수용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이단시 된다면 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원래 유대인이었으므로 예루살렘을 드나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디도가 문제였습니다. 디도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믿음의 아들입니다. 그디도는 순수 헬라 사람이므로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골수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다는 것은 큰 시비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그를 복음의 열매로 제시하여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지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디모데의 할례 사건을 예로 들어 바울도 할례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처럼 주장하여 바울의 입장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으므로 그가 복음역사를 섬기는데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할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행 16:1-3). 그러나 디도는 순수한 헬라인이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할례를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면(갈 5:6), 화합을 위해서 할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권면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조금 양보하여 할례를 받게 되면 모든 절기도 지켜야 하고 결국에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는 무너지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은혜로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도 무엇인가 노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전도도 해야 되고, 봉사도 해야 되고, 선행도 해야 되고, 일용할 양식도 해야 되고, 새벽기도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산다는 것은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죄와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은혜 가운데 살게 되면 은혜는 율법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은혜에 감격하여 더 의롭게, 더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세상 욕심대로 살 수 없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거룩한 소원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몰래 슬그머니 들어온 간첩을 가리킵니다. 이는 사단이 하와에게 친한 친구처럼 가만히 슬그머니 다가와 지혜와 자유와 행복을 줄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인 것과 같이 다가오는 것을 말합니다. 하와는 사단의 달콤한 말을 듣고 선악과를 쳐다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에덴 동산의 모든 자유와 행복과 축복을 상실하고 죄의식과 죽음과 심판에 대한 공포와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유리방황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죄의 종, 사단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간계를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거짓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참된 자유를 박탈하러 온 약탈자들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한 순간이라도 이들을 복종치 않았습니다. 조금도 양보하거나 타협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 진리가 아닌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언제든지 양보할 수 있는 그릇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 같이 되고, 이방인을 얻기 위해서는 이방인 같이 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관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고전 9:19-23). 그러나 복음 진리를 무너뜨리는 세력에 대해서는 일시라도 복종치 않고 단호히 싸웠습니다. 복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동족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싸우는 것은 복음의 진리로 그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함으로써 그들이 참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프랭크린 그라함(Franklin Graham)은 무슬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그들이 자폭을 하여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음을 알기 원합니다.” 또한 그는 이슬람은 율법주의로 사람, 특히 여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군은 국가를 위한 기도의 날에 그를 강사로 초청한 것을 취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진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타협할 수 없고 싸워야 할 복음의 원수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기초한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듯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도 여러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도 노력하기만 하면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윤리적인 면에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14:6).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2:5).

성경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복음주의와 자유주의가 나뉘어 집니다. 복음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신앙과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복음주의는 이 세상이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히 생기거나 진화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과 부활을 포함하여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오늘날도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을 밝히는 내 발의 등이요, 나의 영혼에 참 만족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양식임을 믿기 때문에 매일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이성의 잣대로 성경을 봅니다. 그들은 성경은 신화적인 요소가 많고, 오류 투성이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배제하고 이해될 수 있는 것만 취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을 배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 반석에서 샘물이 나온 사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 등 모든 것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영적 지도자였던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에게 어떤 대학생이 찾아와 심각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우찌무라 선생님, 저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 부활하셨다는 이야기 등은 정말로 제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황당한 이야기나 이해할 수 없는 기적 등은 빼놓고 다른 내용으로만 성경공부를 하면 안될까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학생, 성경에서 사람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적들을 다 제하고 성경공부를 한다면 성경에 꼭 두 가지만 남는다네. 그것은 바로 성경의 앞과 뒤 표지 뿐이지.”

돈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맘몬주의,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쾌락주의, 잘 먹고 편히 살고자 하는 웰빙주의,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고자 하는 기독교 인본주의 등 복음의 원수들은 우리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따라 살고자 애를 쓰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오늘날에도 그렇게 사느냐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되 꼭 복음진리를 따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것과 세상 살아가는 것을 따로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 공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욕심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참 자유와 행복을 줄 것처럼 속삭이는 거짓 형제의 말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은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지만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날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던 어떤 사람이 길을 잃었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모래바람도 심하여 그는 하는 수없이 조그마한 개인용 천막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몸을 잔뜩 구부리고 누워서 자다보니 낙타의 머리가 보였습니다. 밖이 추우니까 머리를 천막 안으로 들여놓은 것입니다. “너도 밖이 추우니 머리라도 따뜻하게 하고 지내라”하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목이 다 들어왔습니다. 그 정도도 괜찮으려니 하고 그냥 내버려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다보니 가슴이 답답하여 깨어보니 자기의 몸이 낙타의 배 밑에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치, 두 치 양보하게 되면 끝내 모든 것을 양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복음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꼭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가? 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회의와 함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이 나를 얽어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슬그머니 말씀을 멀리하게 되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죄의 종이 되어버립니다. 복음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영혼의 기쁨을 주는 생명의 길입니다.

둘째, 복음은 하나지만 전파자와 사명지는 다르다 (6-10). 6-9절은 바울이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같은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복음에 대해 아무런 제안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바울이 받은 복음이 베드로와 같은 유명한 사도들이 받은 복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반대하거나 수식하거나 교정하거나 다듬거나 보충하거나 삭제하거나 변경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어떤 결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음의 내용은 같으나 복음을 전파하는 영역이 다르고 주께로부터 받은바 사명이 다름을 말해 줍니다.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맡음과 같이,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맡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역사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임한 은혜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사도직과 그가 전파한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독립적인 것이지만 당시 정통인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단절되지 않고 역사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 것입니다. 다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바울이 본래 힘써 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10).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복음 진리는 하나이며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의 복음, 베드로의 복음, 요한의 복음, 야고보의 복음이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고, 야고보의 복음은 행함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스타일과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 같은 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면, 야고보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도덕 폐기론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보완한 것이지 상치되지 아니합니다. 성경 저자들은 각각 다른 지역과 다른 문화 배경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개성도 다르고, 글 쓰는 스타일이나 학문적 배경도 다르고, 그들이 전하는 대상도 다릅니다. 그러나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에게나 전해지며, 또 그 표현이 다양할지라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같고, 예수님도 같고, 신앙고백도 같습니다. 복음은 마치 그릇에 담은 물과 같습니다. 그릇은 간장 종지와 같이 작은 그릇도 있고, 드럼통과 같이 큰 그릇도 있습니다. 예쁜 찻잔도 있고, 뚝배기와 같은 그릇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릇은 갖가지이지만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동일합니다. 물은 어느 그릇에 담기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물인 것과 같이, 복음 진리는 하나이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변합니다. 둘째로, 복음 진리는 항상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진리가 위태롭게 될 때는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할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변할 수 있어도 복음 진리는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1. 복음 진리 대로 행한 바울 (11-21)

11-21절에는 바울이 복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외적, 내적으로 어떻게 투쟁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를 면책한 바울 (11-14).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함을 받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지도자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베드로에 의해서 주도되고, 후반부는 바울에 의해서 주도됩니다. 그러나 당시 바울이 안디옥에 있을 때는 일개 성경 선생에 불과한 반면 베드로는 교회의 기둥이요, 예수님의 후계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수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이방교회의 중심지인 안디옥은 유대주의와 헬라문화가 융화된 곳으로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교제하는 곳이었습니다. 12절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었다'(συνήσθιεν)는 것은 미완료형으로서 한번만 먹은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습관적으로 먹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애찬을 가리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말씀을 공부한 후에는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음식을 같이 먹는 것 만큼 큰 친교는 없습니다. 이는 영접과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식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먹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는 먹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들끼리 같은 식탁에 앉게 되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얼른 먹고 자리를 뜹니다. 그래서 음식점에 가면 끼리끼리 앉아서 먹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자유롭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유다이즘을 극복하고 자유함을 얻었음을 말해 줍니다. 원래 베드로는 무의식 중에라도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꺼리는 골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역사 방향에 순종하여 이방인 고넬료 집을 심방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뿌리 깊은 유다이즘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루살렘 총회장인 야고보로부터 왔다고 하는 유대인 방문객들이 나타나자 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화장실을 가더니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할례당을 두려워한 나머지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하자 바나바도 미혹되어 슬그머니 화장실 간다고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이에 바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의 행동이 복음 진리에 위배되는 위선적인 것임을 책망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 이 말씀은 그가 유대인이지만 율법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살면서 이방인들과 교제를 나누다가 이제 와서 유대인들이 두려워 이방인과 애찬을 나누다가 물러간 것은 다시 율법적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이방인들도 베드로를 따르게 됨으로 결국 베드로의 이중적인 행동이 이방인을 강요하여 유대인답게 살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대 선배인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한 것은 너무 무례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복음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진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이를 방치한다면 할례당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모처럼 쌓은 복음의 진리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안디옥은 이방 교회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소식은 곧 사방으로 전달되어 이방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드로에게 창피를 주면서까지 복음 진리를 수호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행동은 그가 베드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그를 깎아내리려고 한 것도 아니요, 성미가 급하여 혀를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또 어떤 영웅심리를 가지고 한 행동도 아니고 감정이 상하여 감정적으로 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복음 진리를 지키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용기 있는 복음의 사도였습니다.

둘째, 복음 신앙에 대한 바울의 간증 (15-21). 바울은 복음진리로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자신의 간증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본래 유대인’이라고 한 것은 개종한 유대인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뜻이고, ‘이방 죄인’이라고 한 것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율법을 모르고 또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꼭 같은 죄인으로서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6절은 바울이 전파한 복음 진리를 요약한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바로 복음 진리입니다. 루터는 “이 칭의의 부분이 없어진다면 참된 기독교 교리를 잃는 것이다. … 우리가 이 부분을 잘 깨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계속하여 그들의 뇌리에 박히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크랜머(Cranmer)는 ”이 복음 진리는 반석과 같은 기독교의 기초이다. …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고 하였습니다.

의롭게 된다는 ‘칭의’는 로마 법정 용어로서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반대어는 ‘정죄’로서 유죄로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은 나다나엘 호오손이 쓴 ‘주홍 글씨’라는 책을 읽어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출교 당하여 교회에도 갈 수 없었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외출할 때마다 ‘A’(Adultery, 간음)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정죄를 받은 여인은 그 영혼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늘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정죄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로서 영원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9:27). 이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으로서 둘째 사망을 의미합니다(계 21:8). 정죄 받은 인간은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산다 할지라도 죽으면 빈손으로 돌아가고, 또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에 처해진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게 됩니다. 이렇게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정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 무서운 정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외부에서 던져 준 구원의 밧줄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정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주 예수님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죄인을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는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된 것은 이루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국적, 인종, 성, 교육, 부나 사회적인 지위와 같은 인간적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 돈 많은 죄인, 가난한 죄인, 열심히 일하는 죄인, 말 많은 죄인, 교육 받은 죄인, 잘 생긴 죄인 등 여러 종류의 죄인이 있을 뿐 하나님께는 꼭 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죄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죄로 인해 죽고 영원한 정죄 가운데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에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정죄함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보시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가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그가 물질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 하는 것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바울은 17-21절에서 자신이 어떻게 복음 진리대로 행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면 믿음으로만이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행위를 따라 살지 않게 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그러면 신자는 결국 죄인으로 판정되며, 그리스도는 죄를 짓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이런 해괴한 주장을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로 단호하게 배격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헐었는데 다시 율법에 복종함으로 율법을 세우게 된다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자가 됩니다(18). 그러나 바울은 더 이상 율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을 향하여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이 나를 지배하여 나를 종으로 삼고 괴롭혔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율법이 나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나도 함께 못박히고, 예수님이 무덤에 묻혔을 때 나도 함께 묻혔으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말해 줍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이전의 삶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새 주인이 되셨습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모시고 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육체를 입고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다만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21절은 15-21절의 결론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폐하여 집니다.

이상에서 볼 때 복음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결혼을 하든지, 자녀들을 키우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내 자신의 영광과 행복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고귀한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 때 우리는 참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진리대로 살므로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