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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8-31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갈라디아서 제 5 강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바울

말씀 / 갈라디아서 4:8-31

요절 /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

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오늘 본문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목자의 심정과 포기치 않는 도전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위대하게 한 것은 그의 학자로서의 자세보다는 그의 목자의 심정과 포기치 않는 도전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목자의 심정과 포기치 않는 도전 정신은 인간적인 기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전적 헌신(total dedication)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한번은 무디(D L Moody)가 자기의 전도 강연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이런 충고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강연은 문법적으로 틀리는 게 너무 많습니다. 대중연설은 좀 삼가시는 것이 좋겠는데요.” 그는 학자였습니다. 그러자 전도자 무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예, 미안합니다. 저는 그렇게 부족하지요. 그래서 말하는 것도 서투르고 많이 틀립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을 위해 쓰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당신의 그 좋은 지식과 통찰력과 판단력이 참 부럽습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목자의 심정과 포기치 않는 도전 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갈라디아 성도들을 염려하는 바울 (4:8-20)

8-20절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염려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책망합니다(8-11). 그리고 과거 그들과의 관계를 회상하며, 다시 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고자 합니다(12-20).

첫째, 갈라디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바울 (8-11).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중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사도 바울은 먼저 그들이 과거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상기시킴으로써 현재 영적 상태를 깨닫고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헤맬 때 Life testimony를 써 보도록 함으로써 과거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았는가를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새롭게 믿음으로 살도록 돕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습니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란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태양이나 달과 같은 천체를 섬기기도 하고, 고목나무나 산과 같은 어떤 물질을 섬기기도 하고, 소나 뱀, 독수리나 매와 같은 짐승을 섬기기도 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간들을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각종 우상들에 얽매여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하나님에게 얽매여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고 부자유한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없이 과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로마서 1:21-23절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은 빈 상태로는 존재할 수가 없고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섬겨야 참 만족과 행복이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얽매인다고 생각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각종 우상들을 섬기고 잡다한 미신에 얽매여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한 큰 일 중의 하나는 각종 미신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그 사슬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1893년 한국에서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서 1940년 일본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의료 선교사로서 헌신한 Dr. 셔우드 홀 선교사가 쓴 <조선회상>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각종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조선인은 자기 주위의 많은 혼령들이 여행길을 방해한다고 믿는다. 푸른 나무, 물방울을 튀기면서 흐르는 개울물, 초록색 언덕, 초가지붕, 벽이나 마루 등 모든 것에 보이지 않는 혼령들이 있어서 사람의 여행길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병이 들면 가장 먼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는데 어떤 경우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사람을 때리기도 하고 불로 지지기도 하여 사람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면 거기에 혼이 생기기 때문에 미리 자르지 않으면 나중에는 나무를 죽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무를 마구 베어 산은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결혼도 사주팔자에 얽매여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자 각종 미신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사 11:9).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 때 우리를 얽어매는 각종 미신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숭배에서 벗어나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개척적이고 창조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일찍이 서구에서 자연과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성경 공부를 통해 자연을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시고 찾아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 율법의 종노릇을 하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강한 것 같지만 죄로부터 구원해 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약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약한 것 같지만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줄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강합니다. 또 율법은 수준이 높은 것 같지만 죄를 정죄하는 역할만을 하기 때문에 수준이 낮고 저급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넓고 깊은 내면성을 가지고 고결한 삶을 살도록 하기 때문에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수준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

10절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여기서 ‘삼가 지킨다’는 것은 치밀하고 엄격하고 열심히 지킨다는 뜻입니다. 날은 안식일이나 금식일을 말하고, 달은 월삭을 말하는데 그들은 매달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 데이와 같이 11월 11일을 빼빼로의 날로 만들어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외에 거의 매월 절기를 지켰습니다. 해는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 매 50년에 맞이하는 희년을 말합니다. 문제는 모든 날들을 거룩한 날과 속된 날, 하나님께 속한 날과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로 엄격하게 구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은 하나님께 속한 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지키고, 다른 날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날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문제는 이런 것들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이슬람교에는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하고 1년에 한달간 금식을 하는 라마단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지키고자 애를 쓰는 것은 영적 소원이 충만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라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벽기도와 일용할 양식, 일대일 성경공부, 전도와 봉사와 구제와 같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런 것들을 지킴으로 믿음을 떠나 구원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한 모든 수고가 헛되기 때문입니다(11).

둘째,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고자 하는 바울 (12-20). 이때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왜 율법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가를 이론적으로 설득하였지만, 이제는 과거 그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상기시키면서 설득하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12).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들을 위해 이방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선민이라는 특권의식과 자신이 성장해 온 율법에 기초한 전통을 포기하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을 어찌하든지 구원코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고전 9:20-22).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하자 아그립바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결박한 것 외에는 다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행 26:28,29).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과 같이, 갈라디아 성도들도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12b-15절까지는 과거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영접했을 때 목자 바울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육체의 약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육체의 약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절에 보면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하였는데 전승에 의하면 가시는 매우 지독한 두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또 육체의 약함은 15b절에서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기초로 안질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강렬한 빛을 본 이후로 시력이 약해져서 늘 아픔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밤빌리아 연안의 늪지대에서 창궐하는 모기로 인하여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심한 두통을 동반하는 말라리아에 걸렸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은 갈라디아의 고원지대를 찾는 길 밖에 도리가 없어서 갈라디아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이 간질환자라고 말합니다. 14절에서 ‘버림’이란 단어는 ‘침을 뱉는다’는 뜻으로 업신여기고 배척하는 극적인 표현입니다. 고대 소아시아인들은 간질병 환자를 만나면 침을 뱉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그 환자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의 영향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육체의 약함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신체적 허약함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어 시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그의 외모를 보고 그를 경멸하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중시하기 때문에 인물이 잘 생긴 미남 미녀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지만, 외모가 시원찮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무시하고 거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자신들의 눈이라고 빼어 주고자 할 만큼 아낌없이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너무나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도 바울을 극진히 섬긴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종을 이런 자세로 섬긴 것은 그들에게 큰 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마 10:40)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영접한 것은 극히 잘한 일이었는데 이제 그 복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6절은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를 버린 후에는 바울을 원수 같이 대했음을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 진리에 올바로 서도록 책망도 하고 참된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진리에 올바로 서 있을 때는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 준 목자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눈이라도 빼어 줄 것처럼 귀하게 여기고 섬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복음 진리를 떠나게 되면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 준 목자에게 “너 때문에 망했다”고 원망하며 원수처럼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렇게 된 것은 거짓 교사들의 이간질 때문이었습니다(17). 거짓 교사들은 “성경에 보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였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율법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바울은 율법을 파괴하는 아주 못된 놈이다.”라고 말하며 이간질을 했습니다. 사욕(私慾)으로 하지 않고 선한 동기를 가지고 좋은 일에 대해 이렇게 열심을 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열심은 사도 바울도 얼마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18).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동기에서 한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첨하여 마음을 사서 결국에는 자기들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쓸모없게 된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온 마음을 쏟아 부어서 쓸만한 사람으로 양육하였는데 그가 은혜를 배반하고 떠나갔을 때의 심정을 잘 압니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요놈! 괘씸한 놈! 네가 은혜를 배반하고도 잘 살 줄 알아!” 이렇게 그에 대한 괘씸한 생각 때문에 그를 새롭게 돕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써서 사람을 키워놓아도 또 저렇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로 발전하여 더 이상 마음을 써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양육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합니까? 바울은 말썽 많은 그들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돌아볼 양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치 않았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망나니짓을 한다고 포기할 수 없듯이,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때까지 바울의 모습은 복음 진리의 수호자로서, 변증가로서, 위대한 교사요 신학자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바울의 모습은 한 인간으로서, 목자로서, 어머니로서의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한 영혼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바울의 호소가 나옵니다. 이는 지적인 호소가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호소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이는 사랑이 많은 어머니가 자녀들을 부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바울의 그들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 숫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바울을 괴롭혔고, 바울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바울을 잡아 돌로 쳐 죽여 그를 성밖에 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사조와 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며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그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행 14:22)고 하며 제자들이 믿음에 굳게 거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습니다(고전 4:15). 다시 말하면 그들을 낳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데에는 반드시 죽는 듯한 해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해산의 수고는 생명을 낳는 것만이 아니라 낳고 양육하는 것까지 다 포함됩니다. 한 사람을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자식을 낳고 키워 본 사람만이 압니다.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을 복음으로 낳고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그릇된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식을 낳으려고 애를 쓰다가 유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되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기까지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포기치 않고 끝까지 섬기고자 결단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에게서 양들에 대한 불타는 목자의 심정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치 않고 다시 도전하는 스피릿(never give up spirit)을 배웁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에 빠진 것은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가고, 세상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골로새서 2:6,7절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고 그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박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중심한 인생관과 가치관, 역사관과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15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충성, 온유, 인내, 순종 등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에 조각되어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은 하였지만 애굽에서 살던 노예근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감정적이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이 조각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이미지가 사라지고 거룩하고 진실되고 온유하고 인내심이 많고 순종적인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형성되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양들에게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그 내면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기까지 도와야 합니다.

II. 이삭과 이스마엘 (4:21-31)

사도 바울은 하갈과 사라의 비유를 통해 율법과 약속의 차이를 말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복음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며, 율법주의는 몰아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21절에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곧 율법주의자들에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만,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육적인 후손이 아니라 영적인 후손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둘 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하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중대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들은 각각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이고, 둘째로, 각각 다른 방법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낳고, 이삭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후사를 얻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계집 종 하갈을 취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로서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되어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때에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태어났습니다(롬 4:19).

두 여자들은 두 언약을 가리킵니다. 하갈은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 곧 율법을 비유하고, 사라는 자유자로서 위의 예루살렘, 곧 약속을 비유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각각 어머니의 신분을 따릅니다. 이스마엘은 계집 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노예 신분이고, 이삭은 자유자인 사라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인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좇아 사는 자들을 핍박합니다(29).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30) 율법주의와 복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를 조금이라도 용납하면 복음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형식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철저하게 복음을 기초로 살아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이스마엘은 옛 언약을 가리키고, 이삭은 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옛 언약은 “너희는 〜 하라, 너희는 〜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시고 친히 감당해 주십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내가 〜 하리라.” 그리고 “너는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옛 언약은 시내산으로 땅에 있는 예루살렘, 곧 유대교를 가리키고, 새 언약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28절과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 결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에 율법주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절 말씀인 4:1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말씀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꼬임에 빠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그들을 멸망의 수렁에서 구원해 내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목자의 심정은 바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파멸해 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삼으시고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 3:16). 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온갖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세상으로 향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모양으로 도와 주셔서 오늘날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포기한 양들을 다시 한번 눈물로 기도하며 해산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