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7 강
성령을 좇아 행하라
말씀 / 갈라디아서 5:16-26
요절 /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저차원적인 자유가 아니라 고귀하고 수준이 높은 고차원적인 자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얻은 이 자유를 어떻게 지킬 수 있으며, 이를 지킬 때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육체와 성령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왜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되며, 또한 왜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하는가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I. 육체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는 길 (5:16-18)
바울은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시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제시한 후, 16절부터는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고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일반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는 길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불행한 것은 욕심 때문이므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일절 마음을 비우고 무소유의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울 수도 없고 비운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비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비우라고 하지 않고 채우라고 합니다. 말씀으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고 사랑으로 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채울 때 자연히 육체의 욕심이 우리의 마음에 거할 자리가 없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의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마음을 비우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육체의 욕심이 우리 마음에 거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17절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와 성령은 공존할 수 없고 상호 역행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다툼의 관계가 지속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절대로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대적하여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육체의 소욕이 힘을 쓰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게 되면 성령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육과 영의 싸움입니다. 육은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으로써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 저급한 본성을 말합니다. 이 육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정욕적입니다. 영은 성령으로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주체가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성령께서 내 안에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요 3:5).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거듭난 자의 마음에 거하여 그 사람을 다스리게 됩니다.
육과 영의 갈등은 인간이면 누구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육체에 거하는 동안은 육과 영의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전보다 더 갈등이 심해지게 되면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말씀공부를 그만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이런 갈등이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유익한 갈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고,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육과 영의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 갈등하는 것은 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갈등하는 것이지 육과 영의 갈등은 아닙니다. 또 비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조류를 따라 살기 때문에 갈등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본받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려 싸우기 때문에 갈등이 심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둥둥 떠내려가기 때문에 갈등할 필요가 없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려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과거에는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갈등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육간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내가 영적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고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롬 8:9b). 사람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고, 이성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냐에 따라 육체 주도적인 사람, 이성 주도적인 사람, 성령 주도적인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육체 주도적인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육체에 이끌려 다닙니다. 이성 주도적인 사람은 이성의 판단을 중시합니다. 사람에게는 판단하고 추리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신사적입니다. 도덕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인정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사람은 육체의 욕망을 부인합니다. 또 이성적인 판단대로 살지 아니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삽니다. 자기 생각이 옳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를 고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도 그 성숙도에 따라서 육체 주도적인 그리스도인, 이성 주도적인 그리스도인, 성령 주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체 주도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것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앞세웁니다. 이성 주도적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앞세웁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생각을 더 의지합니다. 성령 주도적인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로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하고자 할 때, 특히 결혼을 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잘 드러납니다. 육체 주도적인 사람은 용모가 어떠냐? 돈이 있느냐? 직업이 무엇이냐? 학벌이 어떠하냐? 등 육체적인 조건을 많이 봅니다. 이성 주도적인 사람은 외모보다도 집안 형편이나 성격과 같이 결혼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실제적인 것들을 많이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주도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느냐? 기도하는 사람인가를 따집니다. 다른 것이 다 부족할지라도 영적인 것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18절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에 빠지는 근본 원인은 율법 아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육체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거나 봐 주는 경우가 절대로 없습니다. 육체가 조금이라도 율법을 어기면 율법은 가차 없이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율법은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 역사하여 죄를 짓게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정죄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정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자 하지만 내 안에는 이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정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정욕적인 생각에 시달리게 되고 마침내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16절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였고, 18절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능동적인 자세를 의미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이끌림을 받는 수동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자세가 다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성령을 좇는 생활인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이 되십니다. 나는 더 이상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애쓰게 됩니다. 나를 기쁘게 하기보다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과거 육체의 욕심을 좇아 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고자 투쟁하게 됩니다(엡 4:22-24). 이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3:17). 우리는 성령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마귀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좇든지, 성령을 좇든지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성령을 좇아 산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 곧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자는 그 마음에 영적인 일,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영적인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게 됩니다. 영적으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육의 소원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인간은 일하기보다 쉬고 싶고, 공부하기보다 놀고 쉽습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교수가 휴강을 한다고 하면 ‘와!’ 하며 좋아합니다. 전혀 좋아할 일이 아닌 데도 좋아합니다. 쉬면 뭐 재미있는 것이 없는가 찾게 됩니다. 시간이 있으면 잔재미를 찾아 즐기고자 하게 되고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일로 정신없이 바쁘면 죄질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조금만 풀어놓아도 죄를 짓고자 하게 되고 시험에 빠지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 정신없이 바빠서 죄 지을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II.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5:19-23)
사도 바울은 19-23절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구체적으로 싸워야 할 육체의 소욕이 무엇이며, 또한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성령의 소욕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육체의 일 (19-21). 육체의 일이 현저하다는 것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불을 보듯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육체의 일인지 몰랐어”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본성은 그 실체를 알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언어와 행동이나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 언급된 15가지는 육체의 일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육체의 일을 통해 나의 영적 상태의 현 주소를 알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일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로서 감각적인 죄요,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죄로서 종교적인 죄요, 셋째는, 타인에 대한 죄로서 사회적인 죄입니다.
첫째로, 감각적인 죄는 성적인 죄로서 음행과 더러움과 호색을 말합니다. 음행은 모든 종류의 불법적 성행위를 말합니다. 요사이 강남의 부유층에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애인을 두고 로맨스를 즐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키지만 아무리 합리화하고 미화해도 모든 종류의 불법적 성관계는 음행입니다. 음행은 자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고전 6:18). 자신의 순결을 해하는 것입니다. 이 감각적인 죄는 나의 존재를 동물처럼 비하시켜 비인간화하는 것입니다. 음행에 대해 칼 바르트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간음이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여 상대방을 비인간화 하는 것이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세계에 도입시킨 새로운 미덕은 순결입니다. 기독교는 성적인 부도덕이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던 그런 세계에서 성적인 부도덕이 죄라는 것과 순결이 미덕임을 가르쳤습니다.
‘더러움’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속된 것으로서 음행의 결과로 오는 더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동성애와 같이 변태적인 성욕을 말합니다. 요즘은 너무 속되어 인간이 동물보다 더 천해졌습니다. 우리는 욕을 할 때 “개 같은 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가 사람보다 훨씬 깨끗합니다. 왜냐하면 개는 동성 끼리 변태적인 성관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람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야 할 판입니다. 호색은 음탕, 방탕, 음란, 색욕거리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노골적인 방종한 생활을 말합니다.
둘째로, 종교적인 죄는 우상 숭배와 술수를 말합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헛된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것을 말하고, 술수는 마술행위를 말합니다. 술수는 헬라어로 ‘파르마케이아’(φαρμακεία)인데 이는 영어의 pharmacy(약)의 어원입니다. 옛날에는 마술사들이 약물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속여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만들어 영적으로 타락시키는 모든 행위는 술수입니다.
셋째는, 사회적인 죄로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을 말합니다. 원수 맺는 것은 마음에 원한을 품는 것으로서 한번 섭섭한 마음을 품으면 기어이 원수를 갚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 때문에 복수심을 품으면 그 순간부터 마음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떠나고 마귀의 종이 됩니다. 분쟁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고,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픈 것입니다. 분냄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노여움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은 이기적 야심이요, 분리함은 분열과 분파를 일으키는 것이요, 이단은 파당으로서 완전히 굳어버린 분열을 말합니다. 투기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함은 음주와 관계가 있습니다. 방탕함은 난음난무로서 축제 때 술에 취에 떠들며, 가면극을 쓰고 육욕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전혀 통제 받지 않고 자제력을 잃은 환락을 의미합니다. 독일 쾔른에서는 해마다 4월이면 카니발 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가면극을 쓰고 육욕에 빠짐으로 사생아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이들을 가리켜 ‘카니발 베비’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죄는 본인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사회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육체의 일에 대한 가장 심각한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1b).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일을 할 때 그렇게까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술취함과 방탕함은 그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죄처럼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호탕하고 남자다운 것처럼 생각되어 이를 자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꽁생원처럼 생각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령의 열매 (22,23). 육체에 관해서는 일이라고 하였지만, 성령에 관해서는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육체의 일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지만, 성령에 관한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씨를 심어 가꾸듯이, 애써 가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그냥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반드시 밭에 씨를 뿌려서 가꾸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하고, 좋은 나무가 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좋은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열매를 기초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좇고, 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을 할 때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세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랑은 아가페(Agape)로서 상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말에도 친구에 대한 사랑을 ‘우애’라고 하고, 형제에 대한 사랑을 ‘형제애’라고 하고,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효심’이라고 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애국심’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헬라어에도 남녀간의 애정을 ‘에로스’(Eros), 친구간의 우정(friendship)을 ‘필리아’(Philia),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스토르게'(Storge),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Agape)라고 합니다. 아가페는 우리의 마음에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을 때 우리 안에 열매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열매로 맺히게 되면 그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될 때 우리는 무한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희락은 기쁨(joy)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기쁘고 슬픈 것이 아니요, 소유나 지식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강 같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있을 때 힘든 현실을 이길 수 있고, 나를 슬프게 하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달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평화로서 세상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평화는 바다 속의 저류와 같습니다. 바다 위는 아무리 파도가 거세게 치더라도 바다의 저류는 면면히 흐르는 것과 같이, 세상이 아무리 요동할지라도 심령 깊은 곳에는 잔잔한 평화가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됩니다.
둘째는,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친절)와 양선(선)으로써 인간을 향한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뜨립니다. “내가 이때까지 얼마나 참았는지 아냐?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하며 그동안 참았던 것을 한꺼번에 터뜨립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을 참다가 한꺼번에 폭발하니 그 폭발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것은 오래 참음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참지 말고 진작 터뜨려야지 10년 동안 참고 있다가 터뜨리니 더 문제가 됩니다. 오래 참음이란 참다가 보니까 나중에 참을 것이 다 사라져서 다시는 참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자비는 친절함을 말하는데 이는 말도 싹싹하게 하고, 행동도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양선(良善)은 선(善)을 말하는데 이는 자비에 비해 훨씬 능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자비는 잠재적인 양선이요, 양선은 현실적으로 힘을 나타내는 자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선은 기다리는 선이 아니라 찾아가는 선입니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베푸는 선이 양선입니다.
셋째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써 자기를 향한 것입니다. 충성은 신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충성이나 진실이나 믿음은 헬라어로 다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충만할 때 진실하게 되고 충성스러워지고 신뢰할만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온유는 길들여진 온순한 말을 의미하는데 이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온유는 까다롭고 악한 자도 품고 섬길 수 있는 부드러운 내면성을 말합니다. 절제는 자기를 다스리는 힘입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욕심을 다스리고 교만을 다스리고 정욕을 다스리는 내적인 힘입니다. 잠언 16:32절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23b절에 보면 이러한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와 같은 선한 덕목들을 금지하거나 정죄할 율법은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는 생활은 그야말로 일거양득, 일석이조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육체의 본성대로 살다가 죄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좇아 살므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지 나쁜 열매를 맺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런 열매 없이 허무하게 인생이 끝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원치 않게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맺은 열매들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어서 꽃과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지만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의 인격과 삶에는 점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행복이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갈수록 점점 못쓰게 되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좇아 살기 때문에 갈수록 점점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롬 6:21,22).
III.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5:24-26)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성령을 좇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기에 힘씁니다.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죄에 대한 미련을 단호하게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심과 정욕 등 인간적인 생각은 하지 않고자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때 우리는 이를 용납하고 은밀히 즐겨서는 안 되고 즉각 쫓아 버려야 합니다. 수많은 새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듯이,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우리 마음에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가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이 내 마음에 둥지를 틀지 못하도록 단호히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이를 수용하고 은밀히 즐기게 되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미련을 단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다시 못을 뽑고자 해서도 안됩니다. 미련 없이 단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고 새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성령을 좇고 성령의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생각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2) “위엣 것을 찾고…위엣 것을 생각하라.”(골 3:1,2) “모든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모든 옳은 것과 모든 순결한 것과 모든 사랑스러운 것과 모든 영예로운 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이러한 것들은 가정, 친구, 직장 등 우리의 삶의 전 국면에 반영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하려면 믿음 있는 배우자와 결혼을 하여 가정교회도 이루어야 하고, 좋은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직장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곳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사랑과 선행에로 고무하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 예배출석, 정기적인 성경공부, 양서 읽기 등 끊임없이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령을 좇는 생활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게 죄를 짓고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실패로 주저앉아 자학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넘어지면 믿음으로 일어나고 넘어지면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서 계속해서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투쟁해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꾸준히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과 삶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과 가정과 사역에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