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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18

by Mark Yang   04/29/2022  

Message


갈라디아서 제 8 강

심은 대로 거두리라

말씀 / 갈라디아서 6:1-18

요절 /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서신을 끝내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항상 십자가가 그어져야 합니다. 수직적으로는 나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나와 이웃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일반적인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근거로 한 신앙 윤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과 아내 간에 가정 윤리나 상관과 부하간의 사회 윤리도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4,2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5-7) 하나님이 없는 윤리는 사람들이 보나 안보나 절대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적당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 윤리는 사람들이 보나 안보다 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바쳐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할 때 인간관계도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동전에는 "In God we trust"(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신뢰할 때 신용사회를 건설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버릴 때 신용사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윤리는 개인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공동체 내에서 짐을 서로 지는 문제와(1-5),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과(6-10), 마지막으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바울에 대해서(11-18)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짐을 서로 지라 (6:1-5)

1-5절은 교회 내에서 믿음의 형제들 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범죄한 자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1).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교회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 어떤 사람에게서 범죄한 일이 드러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치리(治理) 문제로서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를 잘못 다룰 경우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사단의 노략질을 당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범죄’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나 ‘불법’(아노미아, ἀνομία)이 아니라 ‘실수‘ 또는 ’과실‘(파랍토마, παράπτωμα)을 말합니다. 죄나 불법은 결정적인 범죄행위를 말하지만, 과실은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넘어진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덕(德)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을 알고 있다면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해야 합니다. 허물을 들추어내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를 정죄하려 든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범죄한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서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무관심하여 그 일을 방치해서도 안 되고,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 멸시하고 멀리해서도 안 됩니다. 대개 형제의 허물이 드러나면 뒤에서 쑥떡거리기 쉽습니다. “그럴 줄 몰랐다. 잘난 체 하더니 뒤에서 호박씨 까고 있었구먼” “자업자득이지 뭐, 고생 좀 해 봐야 돼” 그리고 한편으로는 형제의 실수를 고소해하며 이를 즐기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설 자리를 잃고 실족하게 됩니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합니다. ‘신령한 너희’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사는 자, 영적인 자, 곧 신앙적으로 성숙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만이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바로 잡는다’는 것은 몸 안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거나 탈골이나 위골이 된 수족을 바로잡아 교정하는 것으로써 외과의사의 수술을 말합니다. 이는 징벌이 아니라 몸이 건강하게 되도록 치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잡되 ‘온유한 심령’으로 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심령이란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 사랑과 긍휼의 마음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에게로 달려가 당신의 팔로 그를 일으키시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를 당신의 팔에 안으십시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15-17절에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장 먼저 형제에게 가서 일대일로 조근 조근 깨우쳐주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만일 그 형제가 권고를 듣고 회개하면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고를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형제의 죄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1b절에서는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실수하여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킥킥거리며 웃습니다. 넘어진 사람은 허리가 아프고 뼈가 쑤셔 죽을 지경인데도 사람들은 웃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넘어져서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면 다시는 웃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실수할 때 나도 얼마든지 그와 같이 실수할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시험에 들어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과실을 보면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입니다.

둘째는, 짐을 서로 져야 합니다(2,3).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이 말씀은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할 경우 그 형제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지체의식을 가지고 형제를 바로잡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상대방에 대해서 세 가지를 원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둘째는, 자기를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불신당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고, 상대방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고 나를 믿어주는 것처럼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셋째는, 나의 실수를 용서해주고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잘못이 있을 때 덮어주는 것이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2절에서 짐과 5절에서의 짐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2절의 짐은 ‘바로스’(βάρος)로서 한 사람이 들기에는 힘겨운 크고 무거운 하물을 의미하고, 5절의 짐은 ‘포르티온’(φορτίον)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짐꾸러미를 의미합니다. 2절에 나오는 짐은 복수로서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될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 가운데 가정 교회를 이루는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견고한 성을 쌓는 것과 같이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사단이 이를 싫어하여 여러 모양으로 훼방합니다. 또 믿음으로 가정 교회를 이룬 후에도 사단은 이를 파괴시키고자 이런 저런 모양으로 불신과 의심을 심습니다. 가정 교회를 이루고 가정 교회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져야 할 짐입니다.

제자양성도 함께 져야 할 무거운 짐입니다. 우리 모임의 특징은 일대일로 말씀을 가르치고 돕는 것입니다. 일대일로 한다는 것은 한 영혼을 천하와 같이 귀히 여기고 인격적으로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대일로 돕다 보면 그 사람에게 깊은 애정이 들어 내 양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내 양이므로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그 양은 한 목자의 그늘 밑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그 양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게 되어 결국 양은 실족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양은 내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이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팀을 이루어 도와주어야 합니다. 제자양성은 함께 져야 할 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직장문제나 자녀들의 문제로 인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도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함께 나누면 반감이 되고, 기쁨은 함께 나누면 배가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스크바의 김 바나바 선교사님이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 많은 분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헌금을 하여 희생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이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실제적으로 도와줌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서로 짐을 지지 않고 또 그렇게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겨 스스로 높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3). 무엇이나 된 줄로 생각하면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것을 거절하게 됩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가져야 할 자세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라고 생각할 때 우쭐해 질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짐을 기꺼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살펴 볼 때 나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티끌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셋째로,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합니다(4,5). 4,5절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행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웃의 일을 자신의 일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의 일을 살피어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짐을 서로 지다 보면 자기 일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또 자기 일을 남과 비교하여 무가치 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기 일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자기 일을 책임성 있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은혜를 끼칠 수 없게 됩니다.

II. 심은 대로 거두리라 (6:6-10)

6-10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심음과 거둠의 법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6). 6절은 독립된 구절로 보이지만 7절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마음에 말씀을 심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가 말씀을 깊이 파서 잘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교역자라고 할 수 있고, 가르침을 받는 자는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일대일 성경선생이나 목자를 말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는 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교인들이 교역자를 물질적으로 잘 부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교역자는 생명을 바쳐 말씀을 연구함으로 영양가 있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반면에, 교인들은 교역자가 안심하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환경을 잘 만들어 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종은 말씀을 파서 먹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교인들에게 당연히 나를 잘 섬겨야 한다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의 종은 다만 마음을 바쳐 하나님께로 부여 받은 사명에 충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섬겨야 합니다. 또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공급하는 말씀의 종을 귀히 여기고 잘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영혼을 위해서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잘 섬길 때 축복받지 아니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잘 섬기는 사람을 축복하지 아니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좋은 것’이란 단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사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므로 가르치는 자의 수고를 잘 모르고 감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기보다 좀 더 수준 높은 것을 요구하며 불평을 하기가 쉽습니다. 교역자와 교인 사이에 서로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면 불만이 생기게 되고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는 긴장감이 감돌게 되고 사단이 역사하는 장(場)이 되어버립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감사하고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목자를 초청하여 식사도 대접해 줌으로써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눔으로써 사랑의 교제를 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이노네오’(κοινωνέω)인데 이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즉 친교(fellowship)의 동사입니다. 이 말은 특별히 대접하라는 말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를 대하는 것과 같이 교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7,8). 7,8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기서 씨앗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서 육체나 성령이라는 밭에 심어집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심음과 거둠의 법칙으로써 자연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과 영적인 면, 인생 전반에 걸쳐 다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농사를 보십시오.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은 땅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심음’과 ‘거둠’(파종과 추수)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8:22). 농부는 추수를 기대하면서 씨앗을 심습니다. 만일 심으면 반드시 거두게 된다는 법칙이 없다면 씨앗을 심지 않을 것입니다.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씨앗의 품종, 질, 양에 다 적용됩니다. 밀을 심으면 밀을 거두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거두게 됩니다.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고, 나쁜 씨앗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되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됩니다. 속담에 “콩 심은 대 콩 나고, 팥 심은 대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콩을 심어놓고 팥 나기를 기대할 수 없고, 나쁜 씨앗을 심어놓고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추수하게 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추수꾼이 아니라 씨를 심는 파종자입니다. 이를 볼 때 심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심는 사람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좋은 씨앗을 심었다면 그는 분명히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도덕적, 영적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욥기 4:8절을 보면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화가 나서 욕을 하게 되면 욕을 거두게 되고, 칭찬을 하게 되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이는 마치 메아리와 같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야 나쁜 놈아!” 하고 소리쳐 보십시오. 그러면 “야 나쁜 놈아! 나쁜 놈아!”라고 되돌아 올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외쳐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라고 되돌아 올 것입니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의 열매를 거둘 것이요,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으면 원망과 불평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되면 감사와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음란한 생각을 하고 좋지 못한 영상물을 보고 게임을 즐기게 되면 인격이 파탄되고 삶이 파괴될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일본에서 23세의 청년이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 어린이 4명을 차례로 유괴하여 죽여서 시체를 토막 내어 상자에 넣은 다음 유괴한 집으로 보낸 끔찍한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범인의 집을 조사해보니 음란 폭력 비디오테이프가 무려 2천여 개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집안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나쁜 것만 보았으니 결국 그 열매가 끔직한 범죄로 나타난 것입니다. 듣고 보는 것은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5:16-26절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해 대조했습니다. 그리고 6:8절에서는 육체와 성령을 밭에 비유하여 어디에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5장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고, 6장에서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성령의 밭에 심지 않고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이나 기질 또는 환경이나 인간조건에 의해 자신의 생애가 좌우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는 우리의 행동양식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그런데 행동은 생각에 의해 좌우됩니다. 로마서 8:5,6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말에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심는 씨앗은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을 하면 그 인생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열매를 맺게 되고, 매사에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밝고 긍정적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고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지만,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추구하게 되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만고불변의 법칙으로서 속일 수 없습니다. 만일 육을 심고 신령한 것을 거두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롱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씨앗을 심습니다. 말의 씨앗을 심고 생각의 씨앗을 심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심은 씨앗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소년이 자신을 비관하다가 철로에 뛰어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자세히 알아본즉 어머니가 평소에 화가 나면 “밖에 나가서 죽어라 죽어” 라고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소년의 마음에 심기어져 죽음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은 이 법칙에서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만홀히 여기다”는 헬라어 동사는 ‘무크테리조’(μυκτηρίζω)인데 이는 ‘무크테르’(μυκτηρ), 영어의 코(nose)에서 유래하여 “콧방귀를 뀌다” “코를 씰룩거리며 비웃다” “우롱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거나 우롱당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틀림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보나 안 보나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며 영적인 말을 하고 영적인 생각을 하기에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9,10). 9,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여기서 씨앗은 선행이며, 공동체 안의 사람들의 삶 속에 심어집니다. 8절은 개인적으로 무엇을 심을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라면, 9,10절은 교회와 사회 속에서의 선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선행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로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선행입니다. 죄로 인해 고통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그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복음을 전해 줌으로써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선행 중의 선행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데 낙심하기 쉽고 피곤하기 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선행을 하는 데에는 희생이 따르고, 희생하더라도 열매가 맺혀지면 기쁨으로 감당하겠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매가 쉽게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받고 핍박을 받게 될 때 낙심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의욕을 상실하고 선행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선행에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다가 싫증이 나고 힘들다고 해서 뿌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선행의 씨앗을 심지 않는다면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로써 선행의 씨를 많이 뿌리게 되면 사회는 그만큼 밝아지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선행은 빛과 같아서 어두운 세상을 밝힙니다. 선행은 소금과 같아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게 됩니다. 선행은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을 신뢰할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듭니다. 선행을 많이 할수록 건전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가 건설됩니다. 또한 선행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선행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라는 말은 기회가 없으면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먼데 있는 자는 열심히 도와주지만 가까이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있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하기에 힘쓸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III. 십자가를 자랑하는 바울 (6:11-18)

바울은 이제 서신을 끝내면서 본 서신을 쓰는 원래 목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쓰는 것을 보라!”(11) 보통 바울이 구술을 하면 대필을 했는데 마지막 부분은 바울이 큰 글자로 그것도 친필로 썼습니다. 바울이 큰 글자로 쓴 이유를 어떤 사람은 좋지 못한 시력 때문에 큰 글자를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대문자를 쓰고 글자를 크게 합니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심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면 핍박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게 되면 이런 핍박을 면하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몸에 할례를 행함으로 육체를 자랑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하고 육체로 자랑하게 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12,13).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에 초점을 두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였고, 육체로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육체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로 자랑합니다. 좋은 집을 자랑하고 좋은 차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합니다. 종교적인 자랑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한 것을 자랑하고 금식을 많이 한 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10일 금식했다.” “나는 40일 금식했다.”고 자랑합니다. 별의 별 것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함에다 "미국 대통령 조찬 기도회 참석“이라는 문구를 새겨놓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의 자랑은 다 헛되며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24절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자랑은 모두 헛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리낌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죄 용서함이 있고 참된 평화가 있고 영생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이 십자가를 사랑했습니다. 과거 바울에게는 세상의 자랑거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문을 자랑하고 율법을 자랑하고 높은 학식을 자랑하고 열심을 자랑했습니다(빌 3:5,6).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세상의 자랑거리가 배설물과 같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빌 3:7,8). 그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보화를 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샀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세상이 그를 대하여 못박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세상을 버렸고, 그러자 세상이 그를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입니다(15).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여기서 규례는 목수나 측량 기사가 방향거리를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척도를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규례는 성경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와 중생의 진리입니다.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동격입니다. 규례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요, 이런 자가 참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합니다(17). 여기서 흔적은 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주인의 소유라는 표시를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 몸에 예수님을 위해 받은 핍박으로 말미암은 흔적이 많이 있었습니다(고후 11:3-5). 그에게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흔적과 사도로서의 흔적이 뚜렷이 있었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도로서의 영적 권위를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사로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생각을 하고 성령을 위하여 심음으로써 영생을 거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