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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2:1-3:13

by Mark Yang   05/01/2022  

Message


2006년 데살로니가 전서 제 2 강

바울의 목회 철학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울)

말씀 / 데살로니가 전서 -

요절 / 데살로니가 전서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2,3장에서는 바울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으며, 그들에 대한 애정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목회 철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겨야 하고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목회론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가 하는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에 대한 배경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것은 3주였습니다(살전 17:1,2). 여기서의 짧은 선교 활동은 굴욕적인 결말을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습니다(행 17:1-3).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영접하는 자들과 배척하는 자들, 두 종류의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행 17:4). 반면에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눈이 멀어서 바울의 복음 활동을 대중을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법정에 고소하는 등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그 도시로부터 야반도주를 하도록 권유를 받고 베뢰아로 와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백전노장 바울에게는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이용하여 그의 권위와 그가 전한 복음을 손상시키고 교회를 없애버리기 위해 악의에 찬 중상모략을 하며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바울이 2장과 3장에서 자기 방어를 한 것을 기초로 살펴보면 그들의 중상모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도망가서 한 번도 나타나거나 소식을 전한 적이 없다. 비열하게도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줄행랑을 친 삯군이다. 그는 분명 에그나티아 가도를 비열한 동기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엉터리 교사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단지 돈과 명성을 위해 일하는 직업적인 선교사다. 그래서 많은 반대가 일어나고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너희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너희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다. 그는 너희들을 버렸다.” 사단은 언제나 목자의 인격을 공격함으로서 교회를 파괴하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마구 쏟아지는 이런 비난을 들었을 때 회의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바울이 갑자기 떠났고 아무 소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돌아오지 않은 사실들은 이런 비난들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비난을 들었을 때 몹시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판단 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고전 4:3). 왜냐하면 자기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고전 4:4,5). 바울이 자기에 대한 비난들에 대해 답변을 하고자 한 것은 단지 자기를 변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복음 진리와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어떤 동기로 복음을 전했으며, 또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며, 거룩한 생활을 했으며, 유모와 같이 그들을 돌보았으며, 아비와 같이 각 사람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살전 2:1-12). 그리고 잠시 그들을 떠났으나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라는 것과 그들에게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막았다는 것, 그들은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2:17-20). 그리고 참다못해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가를 말하고(3:1-9),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3:11-13). 오늘 말씀에서는 그가 어떻게 복음역사를 섬겼으며,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참된 목자 상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그는 복음의 투사였습니다(1-2). 1,2절에서는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그는 ‘형제들아’는 말로 그들을 따뜻하게 부릅니다. 이 호칭은 본문 전반에 걸쳐 14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1:4, 2:1,9,14,17, 3:7, 4:1,10,13, 5:1,4,12,14,25). 그리고 데살로니가 방문이 결코 실패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1).

 그는 먼저 데살로니가에 오기 전에 빌립보에서 받은 고난과 능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 개척 동역자를 얻고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신 들린 여종의 점으로 말미암아 많은 돈을 벌고 있던 종의 주인들이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고소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많이 맞고 발에 착고를 채이우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행 16:11-24). 그들이 애매하게 고소를 당하고 재판을 받고 옷을 벗기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그들의 발이 착고에 묶이게 되었을 때 그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애매하게 이런 고통과 수치를 당하게 되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용기를 잃고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은 복음전파에 대한 용기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힘입어 이 고난을 이겼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기뻐하고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이 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간수가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행 16:25-40). 그들은 이렇게 많은 고난과 곤욕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을 힘입었을 때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역경을 새 역사 창조의 기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많이 받고 데살로니가에 이르렀기 때문에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는 고난과 능욕이라고 하였으나 데살로니가에서는 많은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자는 이방인에게서 받은 것이나 후자는 동족인 유대인에게서 받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옥에 갇혔었기 때문에 전과자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힘입어 강한 반대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절에서 'dare'(감히...하다)라는 동사는 ‘파레시아조마이’(parressiazomai, παῤῥησιάζομαι)로서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용기를 가지고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을 때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주께 돌아오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연약한 중에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주님의 강함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통해서 주께서 크게 역사하셨습니다. 진정한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바울이 복음의 투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그가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자였으나 하나님을 힘입었을 때 모든 연약함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투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였습니다(3-5). 3-5절에서는 어떤 동기로 복음을 전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이 거짓 가르침을 가르쳤으며, 그의 동기가 불순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가 전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부탁받은 하나님의 복음이며, 순수한 동기로 전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간사는 속임수를 말하고 부정은 성적 부정을 말합니다. 당시 우상숭배는 언제나 성적부정이 따랐습니다. 기독교의 습관에 있어서 화평의 입맞춤과 성만찬과 애찬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이 그를 따르는 귀부인들과 뭔가 수상쩍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궤계는 철학자들의 궤변이나 마술사들의 요술을 의미합니다. 이는 속임수를 써서 부정한 목적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궤계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목적이 순수하면 방법도 순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적도 순수하고 방법도 순수했음을 증거합니다. 5절에서 ‘아첨의 말’은 이익을 얻기 위해 알랑거리는 것으로써 복음 전파를 통해 돈벌이를 하고자 한 것을 말하고, ‘탐심의 탈’은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에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참되며, 그의 동기는 순수하고, 그의 방법들은 공개적이고 솔직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집 주인이 재산을 청지기에게 맡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복음을 바울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특권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식을 말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옳게 여기심을 받았다’는 단어는 금은을 제련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복음전도자로서 적격여부를 시험하여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전도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신임하고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시험을 받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너희가 친히 아나니”(1), “너희 아는 바와 같이”(2), “너희가 알거니와”(5), “너희가 기억하리니”(9), “너희가 증인이요”(10) 라는 구절과 5절에서 “하나님이 증거하신다.”와 10절에서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는 구절은 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증인으로 삼을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에게는 숨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역사를 섬기는 동기와 목적이 진리에 근거하여 순수하고 방법도 순수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투명성과 공개성이 결여되고, 위선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셋째, 그는 유모였습니다(6-8). 바울은 사도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서든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섬기되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들이 자신을 섬기도록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 주었습니다. 여기서 유모는 젖을 먹여 주고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의 역할을 말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들의 모든 것을 참고 돌봐 줍니다. 이는 자기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자녀들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감당해 줄 수 없습니다. 자기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어머니와 같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그들에게 복음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할 만큼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3:16절에서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희생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의무적으로 양들을 섬기면 오래 가지 못하고 고난이 있거나 손해가 되면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길 때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양들을 위해서 희생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넷째, 그는 아비였습니다(9-12). 9절은 바울이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의 일군으로서 재정적으로 얼마든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개척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재정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실생활에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기에 힘썼습니다(10). 더 나아가 바울은 그들에게 아비 역할을 하였습니다. 7절에서 유모는 자녀들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고 끝없는 사랑으로 섬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아비는 자녀들에게 교육적인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또 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타일러야 합니다. 권면은 무지할 때 가르치는 것이고, 위로는 연약할 때 부드러운 말로 격려하는 것이고, 경계는 그릇된 길로 갈 때 바른 길로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살도록 아비와 같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습니다(12). 자녀에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둘 다 필요합니다. 유모와 같은 부드러움과 아비와 같은 훈련은 은혜와 진리와 같이 사랑의 동전의 양면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때로는 유모와 같이 섬겨야 하고, 때로는 아비와 같이 그들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합당한 자들이 되고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말씀의 종이었습니다(13-16).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말씀의 종”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새 사람 되게 할 수 있음을 믿고 단순하게 말씀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말씀에다 자기 생각과 사상을 섞어서 전하지 않고 말씀만을 전하였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변화의 역사는 상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이 힘이 있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또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 때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여 그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받는 자세도 매우 중요함을 배웁니다. 아덴에서는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철학자들이 무슨 새로운 사상인가 하며 들었기 때문에 조롱하고 아무런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진지하게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17:11,12).

 그들이 말씀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자연히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그들 나라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14).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도들을 쫓아내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역사를 반대하고 인류 구원 역사를 방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선민이라는 교만 때문에 모든 인류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배타적 태도를 요약한 사행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소수자이다. 다른 모든 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천국에는 너희들이 있을 방이 없다. 우리들은 천국이 만원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로써 자기들의 죄를 항상 채우매 하나님의 진노가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A.D. 49년 유월절에 성전 구내에서 있었던 잔인한 유대인 대학살,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세계 2차 대전 중 히틀러에 의한 600만명의 유대인 대 학살 등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여섯째, 그는 양무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랑의 목자였습니다(2:17-3:13). 2:17,18절은 바울이 갑자기 데살로니가를 떠나 무책임하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비난에 대해 그가 왜 그들을 떠났으며,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났다’는 것은 바울이 자의적으로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그들로부터 억지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잠시 그들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바랐으나 사단이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과 사랑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9,20) 주의 강림하실 때에 무엇이 우리의 자랑이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될 수 있을까요? 돈일까요? 업적일까요? 사회적 지위나 권세일까요? 이런 것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은 우리가 마음을 써서 돌보고 키운 양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양들이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의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돌보고 섬긴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양을 돌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의요 자랑거리가 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극진히 사랑한 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양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힘썼으나 사단이 막았기 때문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는 참다못해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위로하고자 하였습니다(3:1,2). 이는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3). 바울은 전에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믿음으로 살게 되면 고난은 불가피한 것임을 가르쳤습니다(4). 고난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고난을 통해서 의심과 두려움을 심고 궁극적으로 믿음을 버리고 사명을 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목자와의 사랑의 관계성을 파괴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됩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복음신앙 위에 굳게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5).

 디모데가 바울에게 가지고 온 소식은 참으로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에 굳게 서 있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목자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크게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 이는 바울이 그들로 인해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제 바울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과 그들의 사랑이 더욱 증진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들로 인해 노심초사하고 마음 아파하고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참된 목자 상을 보게 됩니다. 

 이상에서 바울은 복음의 투사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서, 유모로서, 아비로서, 말씀의 종으로서,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랑의 목자로서 자신의 목회사역을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목회사역은 두 가지 면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투사요,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이를 지키고자 힘썼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선포하기에 힘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로는 유모와 같이, 때로는 아버지와 같이 그들을 사랑하고 양육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연구하고 귀히 여기고 복음신앙을 지키고 변명하고 가르치고 순종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영적 자녀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양육하고 훈련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양들로 인해 염려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바울의 목자의 심정은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양들의 형님이나 누나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들의 영적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의 투사요,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요, 유모요, 아비요, 말씀의 종이요, 양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랑의 목자로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