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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1-18

by Mark Yang   05/01/2022  

Message


2006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3 강

그리스도인의 소망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4:1-1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

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장과 4장 사이에서 주제가 갑자기 바뀝니다. 1-3장에서 바울은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말살하기 위해 그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이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으며, 현재 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개인적인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썼습니다.  4,5장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그들을 바른 신앙 위에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 신앙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재림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두 가지 삶의 태도는 첫째, 이교도의 영향을 받은 부도덕한 생활이며, 둘째, 재림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규모 없는 생활을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4,5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이 재림 신앙입니다. 우리는 재림 신앙이라고 할 때 미래의 일로서 현재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삶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이미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를 오해하여 잘못된 신앙을 가짐으로써 실제 삶에서 폐단이 많았습니다. 재림 신앙을 가지면서도 이교도의 영향을 받아 여전히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든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하여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을 하며 변론만 일삼는다든지 등 그들의 잘못된 재림 신앙은 잘못된 삶을 낳았습니다. 올바른 재림 신앙은 올바른 삶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망이 무엇이며, 이런 소망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I.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1-12)

 ,13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랑과 거룩함에서 자라도록 기도한 후에 4장에서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종말로’라는 말은 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기 위한 표시입니다. 바울이 주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구하고 권면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그들이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만 더욱 잘 하도록 하기 위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준 가르침은 바울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명령으로 준 것으로서 그 권위가 주께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2).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항상 전반부는 교리에 집중하고, 후반부에는 윤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복음 진리를 말하고, 후반부에는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가르칠 때 뿐만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삶, 곧 윤리를 가르치고 있을 때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이름 권위를 힘입어 말했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의 윤리도 마찬가지로 중요함을 말해 줍니다. 만일 기독교 윤리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빛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쓸 뿐만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므로 복음을 빛나게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부도덕함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탐욕을 미덕으로 삼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검소하고 자족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며, 자녀들은 부모들의 따듯한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자라면서 이혼과 부정이라는 것을 모르도록 안정된 가정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자기만족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규범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거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남용하여 자기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선택해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음란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3-8).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성적 순결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그들은 초 신자로서 순결을 이상한 단어로 생각하고 성적인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던 옛 생활에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결한 생활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옛 생활로 되돌아가기 쉬웠습니다. 또 그들은 아직도 순결을 모르는 사회 가운데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혼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는 “여자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 이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당시의 헬라 및 로마 세계는 성적 방종이 매우 심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었는데 고린도는 방탕의 대명사였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아프로디테 여 사제들은 밤마다 창녀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카비리라는 신을 경배하는 의식 가운데 엄청난 부도덕이 행해졌습니다. 그들은 성적 방종이 공공연하게 자행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려되기까지 했던 이교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헬라 종교의 경우는 매춘은 사제와 같은 특권으로 생각되었고, 혼외정사는 예배의 한 의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향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덕은 부패하였고, 그들의 신전들은 부패와 향락의 소굴이었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우리는 향락을 위하여 매춘부를 둔다. 매일 매일의 육체의 요구를 위하여 정부를 두고, 아들을 낳고 가정의 충실한 후견인으로 하기 위하여 아내를 둔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인류 사회에 기여한 최고의 공헌 중의 하나는 성에 대한 새로운 윤리 법칙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베네수엘라의 기독교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신자들 가운데 “결혼 한 후에 여자가 생겼는데 이혼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질문이 종종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레위기 11:45절과 19:2절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며, 점차 하나님께로 헌신해 나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특징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거룩’이라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음란은 ‘모든 종류의 비합법적인 성 관계’를 말하는데 곧, 간음, 혼전성교, 혼외정사, 동성연애 및 기타 비정상적인 성행위 등입니다. 최근에 미국 복음주의 협의회 회장이 게이임이 밝혀져서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음란은 소극적으로 피해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거룩함과 음란은 상호 배타적인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음란을 버려야 합니다. 음란을 버리라는 말은 단지 육체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적인 것도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음란한 생각을 하고 좋지 못한 영상물을 봄으로써 몸과 마음을 더럽힙니다. 은밀하게 행하는 이런 행위도 버려야 합니다.

 4-8절은 가정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性)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성경적인 두 가지 원리는 첫째, 하나님이 정하신 범위 안에서 즉 이성간의 일부일처제 결혼 내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바 범위 안에서 유일하게 육체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성 간의 결혼 관계뿐입니다. 혼전에 이성관의 관계(음란), 혼외의 관계(간음), 동성간의 관계는 모두 죄입니다. 둘째, 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함과 존귀함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1)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이 정하신 범위, 즉 이성간의 결혼 관계 내에서는 배우자에게 함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혼 관계 내에서도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이는 배우자에게 물리적 또는 언어적 폭력이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정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대방을 정욕의 대상으로 보고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하는 비열한 성관계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성 관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성은 거룩하고 존귀하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색욕을 좇는 이유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5).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하게 되어 마음이 어두워지고 가치관이 전도되어 마음의 정욕대로 살게 됩니다(롬 -24).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면 성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될 때 성적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을 덧입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부도덕한 삶을 살 때 이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규제하기보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는 행복한 일이며, 더 나아가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자녀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쳐서 자녀들이 영 육간에 건강하게 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 삶에서 본을 보여 주며 가르쳐야 합니다. 반면에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순간에는 기쁠지 모르지만 죄의 열매를 맺고 자녀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쳐서 엄청난 고통을 주게 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6절에서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 하다”는 것은 부부 관계의 분수를 넘어서 색욕으로 인해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으로서 형제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6b). 우리가 음란을  피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음란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이며, 둘째로,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며,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7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적인 순결을 강조하는 바울의 교훈은 당시 사회의 가치관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바울 자신의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고 저버리기 쉬웠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 교훈을 무시하고 저버리는 자는 자기를 저버림이 아니요,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8). 성령은 믿는 자의 마음에 내재하시고 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좋지 못한 환경의 영향을 핑계 삼아 정욕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적극적으로 음란을 피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한 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거룩하지 않은 것 위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형제 사랑에 힘쓰는 것입니다(9-10). 형제 사랑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 ,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요 ).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요일 ). 이처럼 믿는 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였고, 더 나아가서 또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들도 사랑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칭찬하고 더 많이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0b). 이를 볼 때 형제 사랑에는 한계가 없음을 배웁니다. 우리는 현재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자만해서는 안 되고 더 많이 행함으로 형제 사랑에서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9)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형제에 대한 사랑도 성장하게 됩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 자신도 성장하게 됩니다. 형제 사랑은 상대방에게만 은혜가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은혜가 되고 유익이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나의 영혼에 하늘나라의 기쁨이 임하게 되고 영혼에 참 만족이 있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내면에 힘이 생겨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서 사랑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 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은 단합대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과 실수를 감추어 주고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필요를 것을 채워주고 돌봐줌으로써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형제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마음으로부터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문이 외부에도 퍼져서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자연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기심과 경쟁심과 열등감이나 우월감과 비교의식으로 서로 미워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서로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서로 요구하는 마음 때문에 늘 속이 시끄럽고 남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헛수고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에 힘쓰게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고 교회도 살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비결은 성도 간에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일을 하며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11-12).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흥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일상의 일을 포기하고 수다스럽게 말만 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조용한 가운데서 일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 헬라인들은 육체의 노동은 자유인에게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노예들이나 하는 일로 생각하여 육체의 노동을 경멸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헬라인들과 같이 육체노동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노동이 아니라 말씀 전파에 몰두해야 한다는 초 영성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무위도식하는 자들은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의 노동에 대해 존엄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말만 하고 떠돌아다니지 말고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특히 자신의 손으로 일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불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12a절에서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so that your daily life may win the respect of outsiders)라는 말씀은 매일의 삶에서 불신자들로부터 존경함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 생활에서 좋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더 충실하게 하고, 가정생활도 더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우리의 말보다도 우리의 삶을 보고 행위를 봅니다.

 또한 12b절에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and so that you will not be dependent on anybody).는 말씀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매일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는 것을 통해 불신자들로부터 존경을 얻고, 동료 신자들에게는 짐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 일을 소홀히 함으로써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 사랑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이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부양하는 것도 역시 형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기본적으로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아야 합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은 첫째, 음란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셋째, 자기 일을 하며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II. 그리스도인의 소망 (13-18)

 우리가 음란이 보편화되고 자연스러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 마음 가운데 참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참된 소망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어야만 구원의 영광에 확실히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은 살아 있는 성도들이 받는 영광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들이 죽었을 때 그들을 인하여 불신자와 다름없이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영원한 복을 놓칠 것인가? 심지어는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은 인간의 체험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사후에 다시는 기회가 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헬라인들의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와 물질은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은 선한 영혼이 악한 몸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한번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고 또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갖는 공통적인 사상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사후에 소망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깊은 체념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섹스피어의 오델로(Shakespeare, Othel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촛불은 꼈다가 다시 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은 한번 끄면 다시 켜지 못한다.“ 한 젊은 러시아 여류 시인의 유고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오오 사람이 한번만 살 수 있고 또 이렇게 짧게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끔직한 일이다. 나는 이 생각만 하면 미친 자처럼 되고, 나의 머리는 실망으로 소용돌이친다.“

  바울은 이들이 영적 무지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13a). 그들이 소망 없는 불신자와 같이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아니했습니다(13b). 슬퍼하는 것을 완전히 금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애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슬퍼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를 위로하시고,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슬피 우는 두 자매들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눅 , 요 -35). 문제는 소망 없는 비탄이 문제입니다. 다시 만날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잠시 슬퍼하지만 곧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을 때 슬픔에 빠져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일이요, 주위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음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울은 13a절에서 주안에서 죽은 자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미래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를 보실 때도 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막 , 요 ). 성경은 주 안에서의 죽음은 안식하는 것으로 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 불신자들은 죽음은 최대의 불행이며 죽은 자들은 어둡고 침침한 망각지대인 음부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히 잠들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 영광스럽고 찬란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죽음관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고전 ).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 같이 그를 믿는 자들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만져보게 하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눅 -43, 요 ,27)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살리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리셔서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14b). 데살로니가 성도들 가운데는 주님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전에 주의 강림을 맞이하는 자들이나 죽은 자들이 주의 재림 시에 부활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지 누가 앞서고 뒤서고 하는 문제가 아님을 주께서 말씀하신 신적 권위로 말하고 있습니다(15).

 이상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음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다는 미래의 희망의 근거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장차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하고 영원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고전 -44).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는 자는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도 근본적으로 슬퍼하지 아니합니다.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는 “내가 죽을 때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찬송을 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소망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참된 소망을 그 마음에 간직한 자는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참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가치 있는 일에 물질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습니다. 조금 희생해 놓고 손해의식에 빠져 신음하지 아니하고 전 일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 있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근본적으로 슬퍼하지 아니하고 찬송을 부르며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음란의 거센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고 삼키려고 하는 환경 가운데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7절은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 그를 믿는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에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이야기 하시면서 인류 역사가 만국 복음 전파를 중심으로 진행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대 단원의 막을 내릴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27)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류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으로서 인류역사의 종말을 의미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이는 악에 대한 심판으로 악의 종말을 의미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실로 장엄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십니다. 그 호령은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실 것입니다. 한마디 호령, 천사장의 한 외침, 하나님의 나팔의 한 울림이 있은 후, 주님이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세 개의 다른 소리(호령, 소리, 나팔)들을 각각 달리 상상하기보다 그 부르심의 압도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특성이 다양하게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은 매우 강력하고도 극적으로 하늘로부터 임함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는 구주로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초라한 말구유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운명적인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는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시기 위한 심판장으로서 가장 장엄하고 위엄 있고 가장 강한 모습으로, 또한 모든 인류로부터 존경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며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부활을 말합니다. 불신자도 부활하는데 이는 둘째 사망입니다. 요한복음 ,29절은 말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계시록 20: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후에 살아 있는 자들이 홀연히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 분 안에서 자고, 그 분과 함께 부활할 것이며, 그 분과 함께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것입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사방에서 주의 모든 백성을 모을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흩어진 몸을 순식간에 다시 모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한 후에는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별은 순간이고 만나서 함께 있는 것은 영원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영원한 교제가 바로 영생입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분리가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주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참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슬픔과 절망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참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