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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1-28

by Mark Yang   05/01/2022  

Message


2006년 데살로니가 전서 제 4 강

재림 소망을 가진 신자의 삶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28

요절/ 데살로니가전서 -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8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망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5장에서 바울은 재림의 시기와 재림 신앙의 가진 자의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재림 신앙을 가진 자는 실생활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올바른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실생활에서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재림 신앙은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재림 신앙의 소유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면 재림의 소망을 가진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합니까?

I. 깨어 근신할지라 (1-11)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에는 재림에 관하여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재림 전에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바울은 -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되고,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 후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재림의 소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둘째 질문은, 세상이 언제 끝날 것이며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최후 심판의 날에 우리는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때는 크로노스(chronos)로서 일반적 시간의 계속을 의미하고, 시기는 카이로스(kairos)로서 한 시점이나 위기 또는 기회를 뜻하는데 이는 결정적인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때와 시기가 결합할 때는 일종의 종말적 시기를 뜻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심판 날을 대비하기 위해 적절한 준비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언제 끝날 것인가 하는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도 모르며 하나님 아버지만 그것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막 ). 그리고 사도들에게도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행 )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모르고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시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막 ,35, 마 ). 바울은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안다”고 함으로써 그들에게 이를 강조해서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임하고 또 멸망이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갑자기 임하는 것과 같이 임하는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주의 날은 구약에서는 크고 두려운 날, 곧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주의 날은 신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날이요,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한마디로 주의 날은 축복과 심판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임하고, 멸망이 해산 고통이 임하는 것과 같이 갑자기 임하게 된다는 비유는 둘 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갑자기 이루어질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강도는 한 밤중에 갑자기 침입하고, 임산부에게는 갑자기 진통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둘 다 갑자기 일어나기는 하지만 강도는 예기치 않게 임하는 반면에, 진통은 예상된 것입니다. 진통은 예상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은 경고 없이 갑자기 임하고, 또 예상은 할 수 있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세의 징조를 통해 세상 끝 날이 이르렀음을 예상할 수 있지만 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알아냄으로써 이를 준비하고자 하는 수고는 헛수고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이 도적 같이 임하는 것은 재림과 같은 궁극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위험이 갑자기 닥치는 것도 포함됩니다. 지진이나 해일이나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적인 재난이나, 교통사고나 화재와 같은 불의의 사고나, 암과 같은 질병 등은 예기치 않게 갑자기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필연적이고 갑자기, 예기치 않게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4-8절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9-10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인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말하고, 11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깨어 근신하는 삶 (4-8). 4-5절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 갑자기 온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주의 날은 최후 심판의 날로서 매우 두려운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두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날이 도적 같이 우리에게 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적의 침입은 한밤에 예기치 않게 온다는 것과 또 집 주인이 잠들어 있다는 것 때문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한밤에 예기치 않게 온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깨어 있게 되면 이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지만 깨어 있어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 말씀은 신자와 불신자는 전혀 다른 영역 속에 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 차이는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낮의 아들이요 빛의 아들입니다. 원래 우리도 밤에 속하여 어두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 외에는 없음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5,3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 12:46)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벧전 2:9).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에 속한 자와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6).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절에서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시켜 주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었습니다. 이는 우리는 낮의 아들이요 빛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지 말고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더 나아가 7-8절에서 깨어 근신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두움과의 영적 싸움을 위해 영적으로 무장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잠자는 자와 취한 자의 특징은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잠자고 취하는 자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각성하여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악의 세력과의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엡 6:12,13).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군인에 비유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장비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우리가 언제나 무장해야 할 영적 장비입니다. 

둘째, 구원의 확실성 (9-10).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근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단과의 영적 싸움을 위해 믿음과 사랑의 흉배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함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9-10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주로 임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 대신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9,10절에서 이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예정하심)은 첫째로,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도록 하심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면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나 죽으나 예수님과 함께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어두움이 없는 빛된 생활이요, 죄를 멀리하는 성결한 생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셋째, 덕을 세우는 공동체 (11). 11절은 결론으로서 믿는 자들이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바울은 4:18절에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고, 여기서는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피차’라는 단어는 위로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일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 일은 어떤 전문적인 위로자나 상담가들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위로하고, 지원해 주고, 돌보아 주고, 격려하고,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집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파괴하기는 쉬워도 건설하기는 힘들고, 허물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힘듭니다. 서로 불신하고 불만을 품고 불평을 하게 되면 공동체는 쉽게 무너집니다. 조그만 실수나 허물과 죄를 용납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면 공동체는 쉽게 허물어집니다. 세상은 고달프고 매정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의해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세상은 자기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 내리고 무자비하게 짓밟습니다. 날카롭게 경쟁하고 잡아먹고자 안달합니다. 약점과 허물과 실수를 찾아내어 공격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살면서 우리는 풀이 죽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마저 세상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와 별 다를 바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곧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감당해 주신 것처럼 서로 허물과 실수와 죄를 용납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II.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12-28)

 12-28절은 교회 내의 실제적인 교훈과 마지막 인사입니다. 

첫째, 영적 지도자에 대한 자세 (12-13). 12,13절은 주안에서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지도자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교회를 맡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4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를 언급하고 있을까요? 이는 일부 교인들이 지도자들을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자였던 사도 바울과 비교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존경하기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지도자들을 존경하기 힘든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부족하다, 사랑이 없다,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등 그들의 이유는 합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합당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공인으로서 여러 사람들 앞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약점은 쉽게 드러나고 장점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모습을 보고 쉽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연구하는 수고가 참으로 큽니다. 또 중보기도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를 심방하고 상담하고,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 등 많은 수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남몰래 얼마나 수고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영적 지도자는 주 안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다스리다’는 단어는 아버지가 집과 자녀들을 다스릴 때 써는 단어로서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영적 지도자는 권하는 자입니다. 이는 잘못을 행한 사람을 꾸짖고 징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인들은 목회자들에 대해서 없어도 되는 존재인 것처럼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또한 그들이 절대적인 권위자나 군주라도 되는 것처럼 아첨을 하거나 아양을 떨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존경심과 사랑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화목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불화하게 되면 교회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히고 교회 생활과 성장을 저해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서로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겸손하게 동역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고 서로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서로 다른 사역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자기가 맡은 사역을 감당함으로써 동역해야 합니다. 지도자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뒤에서 험담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고 불평하는 자들을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둘째, 성도 상호간에 가져야 할 자세 (14,15). 14,15절은 성도 상호간에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규모 없는 자’의 원뜻은 규율을 어기고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를 말하는데 이는 일하지 않고 꾀부리는 게으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자신의 맡은 바 일을 충실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약한 자들’은 죽은 자들의 장래를 위해 염려하거나 자신의 구원에 대해 염려하는 자들, 곧 소심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낙담케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안위해야 한다. ‘힘이 없는 자들’은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 도덕적 유혹에 약한 자들’을 말하는데 이런 자들은 자립적인 믿음을 갖기까지 잘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교회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잘 감당해 줌으로써 그들이 그 품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1,2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14b) 우리는 다루기 어렵거나 요구 사항이 많거나 실망스럽거나 까다롭거나 무례하다고 해서 인내심 없이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또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개인적인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로나 행동으로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수는 또 다른 형태의 복수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항상 선을 좇아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대 원칙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롬 12:21). 

셋째,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사는 신자의 삶 (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6-18) 흔히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이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으로 인한 영혼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소유나 환경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축복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조건과 형편에 관계없이 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 뿐 아니라 아플 때도 기뻐하고, 축복의 때 뿐 아니라 고난의 때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롬 5:3,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인상을 쓰고 우울증에 빠져 있기를 원치 않으시고 항상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A. J. Mason은 “슬퍼하고 낙담하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는 어떤 면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와 용서를 불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게 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삶과 죽음의 생물학적 메카니즘을 내부에 가지고 있는데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신체에 ‘삶’의 메시지를 보내지만, 우울함과 공포과 갈등은 ‘죽음’의 메시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보스톤의 버나드 휙스 박사는 우울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두 배나 암에 걸리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뻐하게 되면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게 되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흔히 기도는 신앙생활의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는 죽은 신앙생활을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스피릿이 있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기도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기도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막 14:37,38). 그러나 기도하게 되면 분별력이 생겨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게 되면 문제를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한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분이 많은 브닌나로부터 “아이도 못 낳는 네가 무슨 여자냐?” 하고 놀림을 받을 때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인간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고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고 기도함으로써 고차원적인 영적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때 그녀는 사무엘을 낳아 양육함으로써 어려운 그 시대를 섬기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이는 쉼 없이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것은 아니라 기도가 가능할 때면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꾸준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명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그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새벽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벽 시간은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벽 기도를 통해서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을 수 있고, 역경에서 은총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는 ‘절망’, ‘한숨’, ‘눈물’을 ‘희망’, ‘찬양’, ‘미소’로 바꾸어 줍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환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있는 방법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결과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할 때 감사를 빠뜨리는 것은 두 날개에 상처를 입고 날지 못하는 새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치 않는 것은 모든 죄의 원인입니다(롬 1:21).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사치 않은 데에 있습니다. 감사치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원망은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죽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는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면 사단이 역사하게 되지만, 감사하게 되면 성령이 역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니엘은 이방 땅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불신자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사자굴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올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이를 계속하면 굶주린 사자굴에 들어가 사자밥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어떻게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감사기도가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는 그가 이때까지 자기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방 땅에서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하게 되면 내면의 병든 마음이 치료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병균도 죽게 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시대를 원망하고 지도자를 원망하며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가 이런 생활을 계속하게 되자 그의 몸이 돌과 같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은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독실한 크리스천이요 정신과 의사인 후치다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루에 1만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점점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당연하게 생각하던 평범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 개를 주었는데 그는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감사는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불평은 불행을 낳지만 감사는 행복을 창조합니다. 감사하게 되면 행복해 집니다. 감사는 행복과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사할 조건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감사제목을 찾으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둘째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 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의 소망은 우리가 매일 누릴 수 있는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감사제목을 찾지 못하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감사하고자 하면 감사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두 눈으로 보고 두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감사를 하되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한 두 번 감사하기는 쉬운데 범사에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으면 감사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으면 감사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감사는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in all circumstances) 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가 없으시며 우리를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태양을 향해 선다면 그림자는 우리 뒤에 있지만, 태양을 등지고 선다면 그림자는 내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를 괴롭히는 어두운 면은 뒤로 사라지게 되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항상 불만이 가득하여 남편에 대해서 쉬지 않고 불만을 쏟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듣기에 하도 민망하여 남편의 좋은 점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감사하도록 하였더니 감사하기는 하지만 하면서 또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평하는 마음에는 행복이 깃들 수 없습니다. 불평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 없이 기쁨이 있을 수 없고, 감사 없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며, 기쁨이 없는 감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재림의 소망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넷째, 여러 가지 권면과 인사 (19-28).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 성령의 선물 또는 은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광신적 태도를 가져서도 안 되고, 또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여 성령의 역사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또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성령이 소멸되고, 불순종할 때 성령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것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이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은 오늘날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선악을 식별하여 선한 것은 취하고 악은 버려야 합니다(22).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또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기도합니다(23).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24).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기도부탁을 합니다(25). 그리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 인사를 하고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명합니다(26,27).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로 서신을 끝맺습니다(28). 우리가 재림의 소망 가운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써 행복이 넘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