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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20

by Mark Yang   05/01/2022  

Message


디모데전서 제 1 강

미쁘다 이 말이여!

말씀/ 디모데전서 1:1-20
요절/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워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가리켜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이 서신들은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복음역사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목회 지침서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 자신의 목회 철학을 정리한 자아정리적 서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바울이 1차 로마 옥중생활에서(A.D. 61,62) 석방된 후 에베소를 방문했다가 디모데를 남겨 두고 마게도냐를 여행하면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쓴 시기는 A.D. 63-65년으로 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거짓 선생들을 경계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실상 본문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개인의 간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간증을 하는 이유는 디모데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헤를 새롭게 기억함으로써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기억함으로써 이 한 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 (1-11)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1,2). 
1,2절은 편지의 서두이며 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인사는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으며, 또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 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였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령관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절대적인 명령에 따라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사도로 부르심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구원의 주관자"가 되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창세기 3:15절에서 원시복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심으로 인류 구속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절망하지 아니하시고 구속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오셨습니다.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인류 구속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역사를 시작하실 뿐만아니라 이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시고, 마침내는 완성하신 구원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2절은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유대 크리스천입니다(행 16:1).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시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시 디모데를 전도여행의 동역자로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마음이 순수하고 신실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반면 마음이 약하여 눈물이 많고 두려움이 많았습니다(딤후 1:4,5,7). 한 마디로 그는 지도자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식이 아비를 섬김같이 사도 바울을 잘 섬겨서 바울의 가장 신임받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바울의 영적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지도자는 외적으로 훌륭한 지도자감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아 같이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이어야 함을 배웁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딤전 1:2),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고전 4:1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딤전 1:2)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문제 많은 자식들을 가진 아버지와 같습니다. 문제 많은 자식을 가진 아버지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갖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덧입어야 합니다.

 둘째,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계 (3-11)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에베소의 책임 목자로 세운 목적이 무엇입니까? 3,4a절을 보십시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는 항구 동시로서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3년간 있으면서 제자양성에 전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잘 영접하는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도 서원에서 날마다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였을 때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께로 돌아오는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악귀들이 떠나가도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마술 책들을 불태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는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반드시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떠난 후 에베소 교회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다른 교훈은 바른 신앙을 교란하는 이단 사상을 말합니다. 당시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 사상은 유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였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에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는 형이상학적인 세계 즉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는 선하지만, 형이하적인 세계 즉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세계는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 사상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또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또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은 악하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는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육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쾌락주의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신화'는 한 도시나 집안의 유래를 여러 신들에게까지 소급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집안의 유래를 박가스 신에게까지 소급해서 만들어내었습니다. '끝없는 족보'는 유대교의 랍비들이 자신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모세 등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억지로 연결시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여기에는 결론도 목적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경륜을 이루는 것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무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고 경건의 덕을 세우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 사상이나 신화나 족보에 착념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가 모호하게 되고, 혼란스럽게 되어 마음속에 회의와 불신이 생기게 되고,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할 때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논쟁은 이겨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순수하게 믿음을 배우고 심는데 힘써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이 말씀은 목자가 양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권하는 목적이 사랑임을 말해 줍니다. 목자가 아무리 말씀을 잘 가르친다 할지라도 사랑없는 가르침은 울리른 꽹과리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한 목자가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사랑없는 권면은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게 됩니다. 목자에게는 양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양들은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훈련을 주어도 마음으로부터 기쁨으로 받게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변론을 이기고 불신을 이기고 회의를 이기고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이러한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을 때만이 가질 수 있는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은 거듭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거리낌없이 떳떳이 나아갈 수 있는 양심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없는 동기가 순수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핵심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자연히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부패한 이 시대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헛되고 무익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들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 선생이 되려고자 하였지 실상은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율법 선생이 되려 하기보다 말은 잘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은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범법자들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즉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않고 반발하는 자, 경건치 아니한 자, 죄인, 거룩하지 아니한 자, 망령된 자, 아비를 치는 자, 어미를 치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남색하는 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바른 교훈은 복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도덕적인 죄만 생각하기 쉽지만 복음을 거스리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죄를 죄로 드러냄으로써 죄인으로서 자아발견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쓸모없는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구주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러 인도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입니다. 왜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란 하나님께로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나타났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고 죄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죄인들을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진실로 복음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사도 바울 개인에게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II. 바울에게 임한 주의 은혜 (12-20)

 12절을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도 바울은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자기가 훌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를 능력있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원천이 되셔서 자기를 진실되게 의뢰하는 자에게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를 충성되이 여겨 복음 전하는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을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맡은 바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충성심은 예수 믿는 자를 ㅊ핍박하는데도 잘 나타났습니다. 그는 핍박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철천지 원수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관점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충성심을 보시고 그를 체포하사 복음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이 성도를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에 부활하신 에수님께서 홀연히 빛으로 나타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자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렬한 빛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사랑으로 체포하셔서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믿으시고 직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는 그에게 임한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이 몹쓸 죄인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믿고 직분가지 맡겨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는다거나 시험에 합격하거나 취직을 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직분을 맡는 것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는 얽매인다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직분을 맡는 것을 가장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 성령의 역사를 훼방한 훼방자요,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한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이런 자는 주리를 틀고 곤장을 때리고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진노 대신에 도리어 긍휼을 베푸시고 믿음과 사랑까지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에게 임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생각할 때 감격하여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하는 말씀은 허무맹랑한 말씀이 아니라 가장 신뢰할만한 미쁘신 말씀이요, 또한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지만 하늘 나라의 모든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다 버리시고 육신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세계에 들어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죄인들의 허물과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전폭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말은 원어에 보면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과거 비참한 죄인이었으나 현재는 괜찮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여전히 죄인 중에서도 보스가 될 만큼 가장 비참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할 때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런 긍휼을 입힌 까닭은 그에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절망하고 불의에 빠질 때에도 사도 바울을 바라보면 어떤 죄인도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몹쓸 죄인도 예수님의 보배피로 용서함 받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심령에서부터 찬송시가 터져 나왔습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부패하실 수 없는 불멸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안보이시고, 유일하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