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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5

by Mark Yang   05/01/2022  

Message


디모데전서 제 2 강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 

말씀/ 디모데전서 2:1-15
요절/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제 1 강에서 우리는 열매맺는 목자 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기억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할 때 그 은혜에 힘있어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사명의 십자가를 힘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 2 강에서는 우리가 성공적인 목자 생활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어두움의 세력을 잡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엡6:12). 이 영적 싸움에서의 무기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엡6:16,17).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기도의 영이 사라질 때 사단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과 불신과 정욕적인 생각을 심어서 우리를 괴롭히고 악령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평강을 상실하고 온갖 두려움과 불안, 회의와 죄의식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영이 충만할 때 사단은 얼씬도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영을 충만히 허락하사 성공적인 목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1-7) 

첫째, 중보기도 (1-4).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장 먼저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비생산적이고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할 때는 네로가 로마 황제였습니다. 네로는 광기가 있는 과대망상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시인이요, 가수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헛된 영광에 사로잡혀 도시 중앙에 밀집해 있는 목조로 된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도시를 보고 비파를 뜯으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성난 군중들이 폭도가 되어 왕궁으로 쳐들어오고자 했습니다. 네로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자들은 화형을 당하기도 하고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는 등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신자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서 깊이 6m나 되는 지하 아파트와 같은 거대한 무덤인 카타콤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은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빛이 없고 습기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비참했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과 불평 대신에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마음에 하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복음 역사를 감당하다가 힘든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에게 "복음 역사를 섬기느라고 얼마나 힘드냐"하며 인간적으로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강력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간구는 절박한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는 특별한 기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김마리아 선교사의 건강을 위한 기도라든지, 미국 메릴랜드 선교 후보들의 비자를 얻는 문제라든지 또 개인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모든 기도를 의미하고, 도고는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감사는 감사기도입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기도함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세상을 승리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계층의 사람과 모든 족속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는 디모데가 품기 힘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와 관련된 사람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할 수 있지만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민족, 모든 족속,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품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이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자기와 관련된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하게 되면 자기 중심적이 되고 마음이 좁아지고 편협해지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내키든 내키지 않든 억지로라도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넓어지고 보편적이 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2절 말씀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특별히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정책을 내리는가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평온하고 복음역사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큰 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정자들에 대해서는 반발심을 갖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특히 네로와 같이 기독교를 핍박하는 왕들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갖고 저주하기 쉽습니다. 기도를 하되 저주기도를 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대통령을 위시하여 정치가들을 비판합니다. 비판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판을 하게 마음에 은혜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정치가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너무 유치하여서 신물이 나서 아예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비판의 대상이나 저주의 대상이나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목자의 자세를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김영삼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김정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 나라가 2000년도 내에는 남북통일이 되어서 21세기에는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클린턴 대통령과 옐친 대통령, 강택민 주석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요사이 불안한 러시아의 정치가 안정되어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교활동을 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중국에 복음전파의 자유가 허락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공산주의 세력을 무너뜨리기도 하시고 쿠데타를 잠재우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전세계 지도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영적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한 사람도 죄 가운데서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벧후3:9절을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느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두 손을 벌리시고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하시며 탕자와 같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기도는 결코 응답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중심적인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가끔가다 들어주시지만 기쁨으로 잘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기쁨으로 잘 들어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자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입니다. 중보기도에 힘쓰는 자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실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아무도 멸망치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기를 원하실 뿐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사귐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영지주의의 직관적인 지식과는 달리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참된 지식, 구원에 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둘째,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5-7). 5절 말씀은 모든 사람이 왜 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원문을 보면 '한 분'(   )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중보자도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중보자가 여러 명이라면 눈치를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중보자를 여러 명 주지 않고 한 분만 주신 것입니까? 이는 독생자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여러 길이 있듯이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길도 여러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독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종교를 믿든 양심껏 진실되게 믿으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 같지만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 편에서 편리한대로 생각한 것일뿐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14:6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인간 사이에도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서로 원한이 맺힌 사람끼리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요사이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화의 사도로서 중재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도 중재자가 필요한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 사이는 서로 동등한 입장이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무나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지만 우리 인간은 무력하고 또 시공간의 제한을 받아 한계적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분이지만 우리 인간은 죄로 얼룩져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과 생명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랑과 생명의 교제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이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는 너무나 차이가 커서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셨습니다. 그 때 연기가 옹기점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우뢰와 번개로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두려워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20:18,19) 그들에게는 모세라는 중보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과 교제하시기 위해 성막을 만드시고 대제사장을 세우사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보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중보자를 통해서만이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마련하신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했고 또 죽음으로써 자주 갈렸습니다. 또한 제사도 온전치 못하여 범죄할 때마다 번거롭게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올 참된 중보자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중보자는 완전해야 합니다. 불완전하면 중보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중보자는 어느 한 편으로 치우쳐서는 안되고 양편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류의 중보자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보내사 온전한 중보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1:18).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온전한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기를 속전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속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속전은 단회적인 것이지만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속전으로 내어 주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때에 증거되어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입니다 (히10:19,20). 

  7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은 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중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8절을 말합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화목하게 하는 중보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Ⅱ. 종용히 배우라 (8-15)
 
  8-15절은 교회 내의 질서에 관한 교훈입니다. 
첫째, 남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 (8).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남자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고 혈기가 많아서 화를 잘 내고 다투기를 잘합니다. 또 남자들은 결혼을 하기 전에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다가도 일단 결혼을 하면 여자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처자식을 잘 때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가정에 평화가 없고 가정이 전쟁터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연약한 자를 때리고 싸우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남자들이 가정에서와 모임에서 분노를 품고 화를 내거나 다투기 보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에 힘쓴다면 가정과 모임에는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은 평화가 깃듭니다. 

둘째, 여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 (9-15).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여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입니다(9,10). 9,10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들은 천부적으로 미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옷에 관심이 많고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항상 새로운 패션이 유행합니다. 또한 화장에 많은 신경을 쓰고 금이나 진주와 같은 보석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상술 가운데 하나는 '귀부인을 노려라'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대부분의 대화의 내용은 치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자들은 꾸미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여자들은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 화려하고 값진 옷을 입기를 좋아합니다. 이 때문에 천만원이 넘는 밍크 코트도 잘 팔립니다. 또한 화장품도 싸면 안 팔리고 비싸야 팔립니다. 그러나 화려한 옷을 입고 귀금속으로 온 몸을 무겁게 치장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대개 속이 없는 여자들일수록 겉을 많이 치장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나옵니다. 잠언31:30절을 말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아담한 옷을 입습니다. 이것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옷을 말합니다. 화려하고 값진 옷을 입지 말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통치마를 입고 다니며 아줌마 티를 낸다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또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화장도 옅게 하여서 은은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풍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염치와 정절로 내면을 단장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염치는 부끄러워하며 존경하는 태도를 말하며, 정절은 모든 열정이나 욕망을 제어하여 극기의 습관으로 도덕적 균형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가 발랑 까져서 수줍은 태도가 없고 정절이 없다면 여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다된 여자가 될 것입니다. 여자는 염치와 정절을 갖춤으로서 여성다운 점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과 단정이 남성의 미덕이라면 염치와 정절은 여성의 미덕입니다. 여자는 선을 행함으로써 내면의 아름다움을 쌓아 나갈 때 내면 깊은 곳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순종심과 종용히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말이 많습니다. 또 요사이는 여성 상위 시대라고 하여서 여자들이 순종하는 일을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하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순종심을 가져야 하고 또 종용한 가운데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자는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2). 이 말씀은 말도 하지 말고 1대1도 하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여자가 공적으로 남자들 위에 서서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지만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여성의 역할은 남자가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뒤에서 돕는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나서서 남자를 주관하고 가르치고자 한다면 가정이나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고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여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사명을 버리고 나서게 될 때 가정이 시끄럽고 모임이 시끄럽고 나라가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여성은 조용히 배우며 순종하고 기도하고 희생적으로 섬기고 헌신하고 믿음의 어미로서 영육간에 자녀를 양육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 때 본인도 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평온하게 되고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이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