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제 3 강
신자의 비범한 생활
말씀/ 베드로전서 2:11-3:7 요절/ 베드로전서 2:21
I. 신자의 사회생활(2:11-25)
1. 신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자와 같습니까(11a)? 우리가 나그네로서 자 기 자신과 어떤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11b)?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갈5:16,17)?
2. 또 신자는 불신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12a)? 이런 삶을 살 때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까(12b)?
3. 신자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와 이를 집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13,14)? 근본적으로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해 야 됩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15)?
4. 신자는 어떤 점에서 자유인입니까(요8:32,34, 갈3:13) 그러나 자유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자유하나 어떤 사람같이 살아야 합니까(16,17)?(갈5:13)
5.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18)? 까다로운 상관에게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아름답습니까(19,20)?
6. 애매히 고난받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본이 되셨 습니까(21-24)?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심으로 이루신 역사가 무엇입 니까? 이 가운데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죄인들에 대한 사 랑을 생각해 보시오.
7.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24,25)?
Ⅱ.신자의 가정 생활(3:1-7)
1. 아내는 남편에게 말로 하기보다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1a)? 이 때 불신자 남편이라도 어떤 은혜를 얻게 됩니까(1b,2)?
2. 여인들은 자신을 어떻게 단장해야 합니까(3,4)? 여인의 진정한 아름 다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사라는 여성들에게 어떤 본이 되었습니까 (5, 6)?
3.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가져야 할 두 가지 마음자세가 무엇입니까(7)? 그리할 때 영적생활에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제 3 강
신자의 비범한 생활
말씀/ 베드로전서 2:11-3:7
요절/ 베드로전서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는 제 2강에서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가졌음을 배웠습니다. 신자는 비록 세상에서는 초라하게 보이지만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신분이 높지 못하고 종과 같이 비천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신자의 실제 생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을 등한히 하여 불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실제 생활에서도 선을 행함으로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신자들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있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Ⅰ. 신자의 사회생활(2:11-25)
사도 베드로는 11a절에서 신자들을 가리켜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외국인으로서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행인은 지나가는 길손으로서 그곳에 호적이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NIV에서는 stranger 즉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상한 자들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언어와 풍습과 문화와 생활양식 등 모든 면에서 본토인과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자들은 인생의 목적과 소망, 가치관과 삶의 스타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이 영원히 살 곳이 못되며 잠시 지나가는 여인숙에 불과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소망이나 정을 두지 않습니다. 신자의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가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생은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정처 없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은 인생이 나그네라는 분명한 인생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집을 짓지 않고 이동하기 쉬운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히11:9). 격언에 "이 세상은 다리와 같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 위에 집을 짓지 않고 건넌다"고 하였습니다. 나그네의 인생 철학을 가지고 사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들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
첫째,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11b)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신자는 외부의 세력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육체의 이기적인 욕망으로서 육욕, 식욕, 물욕, 명예욕, 권세욕 등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욕망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릅니다.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자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호모섹스와 같은 변태적인 행위를 즐기다가 결국에는 AIDS에 걸려 죽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권세욕도 끝이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인간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욕망은 우리의 영혼을 거스립니다. 인간에게는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죄의 소욕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소욕은 공존할 수가 없고 서로 대적합니다. 사람이 육체의 소욕에 사로잡히면 영적인 소원이 사라지게 되고, 반면 영적인 소원으로 충만하게 되면 육체의 소욕이 물러가게 됩니다(갈5:16,17). 육체의 정욕은 우리의 영적인 소원을 앗아가고 결국에는 실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활화산과 같이 솟아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까? 이는 육체의 정욕이 생길 때마다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초기에 제압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욕망이 점점 자라나서 마침내는 그 욕망이 나를 삼켜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방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영적인 소원을 갖고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갈5:16). 다시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롬6:13). 그 때 우리의 삶은 자유롭고 활기 차고 희망에 넘치게 됩니다.
둘째, 신자는 불신 세상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합니다(12).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신자는 불신 세상에서 불신자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불신자들은 신자가 얼마나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가를 보기보다 신자의 행동과 실제 삶을 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불신자와 똑같이 행동할 때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불신과 좋지 않은 선입감을 갖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에게 높은 삶의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불신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이는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미명 아래 실제 생활은 등한히 하여 불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한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여 경고를 맞거나 또 직장 일을 소홀히 하여 상관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책망을 듣습니다. 또 아르바이트도 책임성있게 충실하게 해주기보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가 결국에는 쫓겨납니다. 또한 자매님들은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하지 않고 피곤하다고 퍼져 자거나 성경만 들여다 보고 앉았을 때 부모님들은 미쳐도 이상하게 미쳤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선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킵니까? 선행이란 인사나 청소하는 것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좋으며 또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가를 보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인사를 얼마나 잘하고 말을 얼마나 공손히 하며 맡은 바 일을 얼마나 책임성있게 충성스럽게 감당하는가를 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인사도 잘 하지 않고 윗사람에게 불손하면 되먹지 못한 놈이라고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불성실 할 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사성이 밝고, 말도 싹싹하게 하고, 청소도 부지런히 하고, 자매님들은 설거지를 열심히 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여 궂은 일을 하고, 맡은 바 일을 책임성있게 감당할 때 사람들은 믿는 사람은 과연 다르구나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선행이란 자기를 희생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신자를 가리켜서 손해 안보고 자기 유익만 구하는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이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영육간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와줄 때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아야 됩니다.(13-17)
신자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와 이를 집행하는 자들에게 순복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롬13:1). 신자들이 국가의 권력 기관이나 이에 종사하는 관리들에게 반항하기보다 순복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주를 위하여"입니다. 이는 "주님께 욕되지 않고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주를 위하여" 이것은 신자의 행동의 지침이요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장사를 하거나, 밥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주를 위하여"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4:8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6절 말씀은 신자는 근본적으로 자유인이지만 불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는 과거 죄와 율법의 종노릇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배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갈3:13). 우리는 이제 진리 안에서 우리를 얽어매던 죄와 율법으로부터 참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하다고 해서 자유를 남용하기 쉽습니다. 즉 자유를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버는 연구는 많이 하지만 번 돈을 어떻게 가치있게 쓸 것인가는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번 후에는 어떻게 써야 될 줄 몰라 무가치한 데 허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를 갈망하지만 막상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는 이를 어떻게 써야 될지 몰라 허랑방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입시 때문에 얽매여 있다가 대학에 들어오면 그 많은 자유를 감당치 못해 죄 가운데 빠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유란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악을 가리우는데 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데는 자유하지만 악을 행하는 데는 자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써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고전9:19-22). 그리고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는 가장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서 인생들을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심으로 놀라운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7).
넷째,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참아야 합니다(18-25).
2:18-25 절까지는 종의 의무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종의 수는 자유 시민의 4배에 이르렀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자 많은 종들이 교회에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주안에서는 주인과 종의 구별이 없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종들이 교만해져서 주인에게 불손하고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종들에게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8).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하십니다. 까다로운 상관에게 순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아무 죄도 없는데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참기 힘듭니다. 직장에서 예수님을 진실되게 믿고 술, 담배를 안한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상관에게 항의하고 권리 주장을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신자로서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게을러서 맡은 바 일에 불충성하므로 상관에게 야단 맞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므로 크게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나 맡은 바 일에 충성하고 열심히 섬기는 데도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 되어 큰 은혜가 됩니다. 그리할 때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병원에서나, 군대에서나, 대학원에서나, 신자로서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참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본받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아무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거짓이나 속임수)가 없으신 점 없고 흠 없는 어린 양과 같이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힘이 없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광풍도 잠잠케 하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으실 때 "너희들 내가 누군줄 아니? 무서운 심판을 받을 줄 알아" 하며 위협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받으실 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참으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23b).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반드시 선악간에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9절은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역사는 선이 반드시 악을 이김을 증거해 줍니다.
둘째로, 죄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친히 저주받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죄인들에 대한 그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마음의 모든 상처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방황을 그치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로 돌아와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25).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떤 고난도 능히 참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우리의 내면에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새길 수 있습니다.
Ⅱ. 신자의 가정 생활(3:1-7)
사도 베드로는 이제 부부의 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부간의 동역이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내된 자들에게: 아내된 자들은 기본적으로 남편에게 순복해야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5:22,23절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불신자 남편이라도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한다고 해서 종과 같이 상하관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 안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동등합니다. 동등하지만 질서를 세우기 위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대꾸를 하고 자기 주장을 하게 될 때 비행접시가 날아가는 소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인들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하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하십니다. 여인들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자고이래로 여인들은 머리를 단장하고 귀고리를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 외모를 단장하는 데 많은 시간과 물질을 썼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허영심과 사치에 들뜨기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온갖 장신구를 무겁게 몸에 달고 요란하게 옷을 입고 다니면 아름다움은 커녕 악취가 풍기게 되어 구역질이 나게 됩니다.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습니다. 내면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 될 때 아름다움이 은은히 풍겨 나오게 됩니다. 온유함은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스하고 부드럽고 친절함을 뜻합니다. 이러한 온유함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또 안정한 심령은 조용하고 정숙한 내면을 의미합니다. 여인은 순종적이고 온유하고 조용하고 정숙할 때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아름다운 향기가 은은히 풍겨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도 빗지 않고 옷도 아무렇게 입고 다니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 내면을 단장하기에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열국의 어미인 사라는 여인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6).
둘째, 남편들에게: 유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일방적인 윤리만을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상호윤리를 가르칩니다. 남편된 자들은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순종만 강요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가져야 할 의무에 대해 두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됩니다. 남자들은 여자를 생각할 때 종이요 정욕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그릇된 지식 때문에 여인들은 남자들로부터 많은 학대를 당하고 슬프고 운명적인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내는 남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동역자(helper)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올바른 지식과 아내에 대한 이해 가운데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임을 알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엡 5: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약합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남자보다 더 연약합니다. 여인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잘 받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고 기도가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이해와 사랑으로 대하고 귀히 여길 때 그 가정에는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길 때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는 반찬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간에 아름다운 동역이 이루어질 때 이를 기초로 복음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또 자녀들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건전하게 자라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믿는 자들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이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신자 생활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비범한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