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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1-24

by Mark Yang   05/04/2022  

Message


여호수아 제 2 강

라합의 믿음

■ 말씀: 여호수아 2:1-24
■ 요절: 여호수아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1장에는 우리 믿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두 사람의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사라와 라합입니다. 라합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라합의 믿음이 사라 못지 않게 위대한 믿음임을 말해 줍니다. 열국의 어미인 사라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나안 이방 여인이요, 기생인 라합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정탐군들을 숨겨 준 것이 역사에 기록될만큼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라합이 정탐군들을 숨겨 준 것은 겉으로 볼 때 평범한 사건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는 목숨을 걸고 믿음으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한 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한 믿음의 사건은 라합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한 믿음의 사건의 중요성과 이를 쓰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믿음으로 정탐군을 숨겨준 라합 (1-7)

  1a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두 사람의 정탐군을 은밀히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그의 손에 붙여 주시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셨으므로 무조건 공격만 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맹목적으로 무식하고 용감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40년전 모세가 가나안 정탐을 위해 열두 명을 공개적으로 선발하여 보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기억했는지 이번에는 믿음있는 두 사람을 선발하여 비밀리에 보냈습니다. 전쟁에서 승패는 전략을 어떻게 짜느냐에 달려 있고, 전략은 정보에 달려 있습니다. 전쟁은 정보를 얻기 위한 첩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국가간에 정보를 얻기 위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전쟁 시대에서는 산업스파이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대만에서 조종한 삼성전자의 산업스파이 사건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과거 모세가 정탐군을 보내었을 때 자신이 정탐군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정탐군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쉬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 정탐군들을 보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략가 여호수아를 배웁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단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수집하여 세밀하게 전략을 짜야 합니다. 한 영혼을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전략을 짜야 하고, 캠퍼스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도 전략을 짜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각 나라별로 정보를 수집하여 구체적인 선교전략을 짜야 합니다. 아무런 전략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할 때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정탐군들이 여리고성에 들어가 유숙한 곳은 바로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이었습니다. 이곳은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므로 민심과 군사의 동태를 파악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유숙하며 가나안 사람들의 민심을 알고 군사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도자 여호수아의 명령에 복종하여 목숨을 내놓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그린베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여리고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물샐틈 없이 완벽하게 자체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정탐군들이 침투되자마자 주민에 의해 즉각 113에 신고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정탐군들의 행동이나 말씨가 여리고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여리고 왕은 보고를 받자마자 라합의 집에 수색대를 급파하고 라합에게 기별하였습니다.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3). 정탐군들은 독안에 든 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운명은 라합에게 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잡히는 날에는 심한 고문을 받고 개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정탐을 하러 왔다가 정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절망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이상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유숙하고 있는 집 주인인 라합을 예비하시고 라합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모든 정보를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예비하신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사람을 예비하시고 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은 비천한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이라는 말은 표현을 누그러뜨린 점잖은 번역이고, 본래 그대로 번역하면 ‘창기’, 곧 ‘매춘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 이런 자를 예비해 놓으신 것일까요? 그러나 이 순간에는 정탐군들에게 있어서 라합보다 더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은 때로는 우리가 전혀 기대치 않은 곳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완벽하고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섬세하게 배려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정탐군들을 끌어내라고 하였을 때 그녀는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즉시 정탐군들을 끌어내어 왕에게 넘겨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 백성으로서 마땅한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의외의 행동을 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군들을 데리고 삼대를 늘어 놓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숨겼습니다. 라합이 이렇게 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만일 이 일이 들통나는 날에는 간첩 은닉죄, 불고지죄로 삼족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라합은 그들을 숨길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기지와 재치로 수색대들을 감쪽같이 따돌렸습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어요. 또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기 때문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급히 따라가면 틀림없이 그들을 잡을 수 있을거에요. 정말 쥐새끼 같은 놈들이네요”(4,5). 그러자 수색대들은 확신에 찬 라합의 말을 듣고 조금도 의심치 않고 요단길을 따라 나루터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들이 나가자 곧 성문이 닫혔습니다(7). 라합은 기지와 재치가 뛰어난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라합은 보통 기생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라합은 미모와 지혜가 뛰어나 여리고 왕과 고급 관리들을 상대하는 고급 기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지혜와 센스는 믿음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만일 라합이 믿음의 확신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회의하고 머뭇거렸더라면 수색대들에게 의심을 사서 정탐군들은 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라합의 이런 행위는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행위였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간첩을 숨겨주었고, 그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또 그들이 안전하게 도망가도록 도와 줌으로써 조국을 파멸시켰습니다.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라합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라합은 죄로 관영한 가나안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라합은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선이냐 악이냐,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서 분명하게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우리도 때로 하나님과 물질, 하나님과 권세, 하나님과 학문,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선택하게 되면 내가 선택한 그것과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로도 대치될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경배하고 섬기고 복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라합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믿음의 여인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31절은 라합의 믿음의 행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의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기록되는 한 위대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믿음의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한 기사를 살펴 보면 아브라함의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난 사건에서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분명 하나의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75세의 나이에 갈바를 알지 못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후사 문제로 고통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여 주시면서 “네 자식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인치셨습니다. 이것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위대한 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외에도 아브라함이 소시민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열국의 아비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영접하고 할례를 행한 사건이라든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친 사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한 믿음의 사건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한 것도 위대한 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출애굽의 역사를 창조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의 사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우리의 믿음은 실제 삶에서 믿음의 사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의 사건이 없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으로 산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믿음으로 불신 환경을 이기는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믿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죄악된 습관을 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어떤 분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분은 믿음으로 선교사로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박준은 목자님이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레지던트 1년차로 들어갔을 때 일이었습니다. 그때 환영 회식 자리에서 과장이 직접 따라 주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레지턴트 초년생이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박준은 목자님은 신앙인으로서 분명한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믿음으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과장은 박준은 목자님에게 소아과의국에서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의 중심을 굳게 지키고 맡은 바 일에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1년 뒤에 과장이 오히려 박준은 목자님에게 1년 전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체가 모인 술 좌석에서 과장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박준은 목자님에게 공식적으로 먼저 콜라를 따라 줌으로써 그 후부터는 어떤 사람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박준은 목자님이 신앙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과장이 주는 술을 거절한 것은 하나의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서울 구치소 경비교도대 대대장인 박효진 장로님이 쓴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재명 집사님이 쓴 지존파들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인 「낙엽이 지기전에 사랑을」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박효진 장로님은 교도소에 근무하면서 처음에는 죄인들을 법과 공의대로 엄격하게 다루는 공포의 교도관이었습니다. 죄수들은 그만 보면 두려워서 슬슬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갖 흉악한 죄인들을 눈물로 섬기는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의 섬김으로 인해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새사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1년에 제사를 13번이나 지내는 철저한 유교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나서 복음과는 거리가 먼 자였습니다. 8촌 이내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집안에 사당을 모셔놓고 조상을 받드는 것을 필생의 자랑으로 알고 살아온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런 집에 시집와서 철저하게 제사를 지내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아내가 복음을 듣고 회심을 한 후에는 제사를 거부하였습니다. 시부모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들은 3개월만에 아내를 설득시켜 예수 믿는 것을 끊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3개월만에 오히려 남편이 아내에게 설득을 당하여 교회에 나가게 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된 것은 놀라운 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회심으로 인해 감옥소에 있는 수많은 흉악한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년 전에 전국민을 경악시켰던 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존파의 살인행각입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을 증오하며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소각시켰습니다. 그들은 돈이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무차별 죽임으로써 영원한 악마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독일의 짜이퉁지는 이 사건은 광주 사태보다 100배 이상의 충격을 주는 사건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들이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여 한스럽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김현양은 자기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에 한이 되어 부자들을 증오하고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 붙잡혀 감옥에 있을 때, 이재명 집사님은 새벽기도 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재명 집사님도 처음에는 ‘저런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욕을 하며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결심했습니다.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매 5일마다 넣어줄 수 있는 3만원의 영치금과 시시때때로 옷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외면하고 심지어 가족 조차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했던 그들을 이재명 집사님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로 돌보았을 때 그들 마음 가운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따뜻한 사랑을 맛보고, 자기들 같은 엄청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들의 장기를 사회에 기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교도소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김현양은 가장 악랄한 사람이었는데 가장 많이 변화되어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곳 교도소를 죄 짓고 들어온 삭막한 범죄자들이 우글대는 곳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이곳이 천국 같은 곳이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거든요. 교도관 형제님들의 따뜻한 보살핌, 그리고 천사님처럼 밖에 계신 분들의 사랑을 쉴 새 없이 받고 있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수없이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난날의 세상을 어지럽히던 김현양이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을 이제야 깨닫고 믿게 되었답니다. 그 귀하고 귀한 사랑을 저는 이곳에서 수없이 체험하고 있지요. 그리고 지난날 한없이 증오스럽기만 하던 세상이 지금 저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답게만 보인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형을 당할 때는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송을 눈물을 흘리며 끝절까지 부른 후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외치며 갔습니다. 그가 벗어놓은 운동화 신발에는 볼펜으로 성구 두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쪽 신발에는 누가복음 23: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과 다른 한쪽에는 야고보서 4: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현양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증거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위대한 믿음의 사건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건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II. 라합의 신앙고백 (8-14)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주는 믿음의 사건을 가능케 한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두 사람이 눕기 전에 지붕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였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여리고 성의 백성들은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튼튼하고 높은 성벽과 요새를 의지하고 자랑하였지만 실상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그들의 내면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간담이 녹을만큼 벌벌 떨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라합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는 라합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때 여리고 백성들은 절망하고 낙담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낙담이 되어 술을 더 많이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소문이었지만 라합에게는 그가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소문이지만 이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되었고, 이를 영접한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롬 10:17). 그의 믿음은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서 역동하는 믿음이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약 2:25,26). 그러면 그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그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11). 상천하지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창조하신 세상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가나안 사람들이 의지하는 우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죽은 신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또 그 앞에서 아무리 정화수를 떠놓고 새벽부터 정성을 모아 두 손이 닳도록 빌어도 우리의 실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라합이 믿은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세상 역사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실제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상천 하지의 하나님을 믿었을 때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상천 하지의 하나님을 믿을 때 좁고 편협한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인 원대한 세계관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라합은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12-14). 12,13절을 보십시오.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정탐군들을 선대하며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 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2,13). 그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과 동시에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용납하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죄악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왕과 고위 지도층들이 얼마나 음란하고 부패한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국회에서 포커판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심판의 하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이 몹쓸 죄인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영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심을 믿었습니다.
   라합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나 참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생득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영적 소원이 약화되고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접하게 되면 영적 소원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마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 불씨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게 되면 이 영적 불씨에 불이 붙어서 타게 되는 것입니다. 라합의 마음에는 참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 불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리고의 우상들을 숭배하면서 우상들의 허상을 알게 되었고 깊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상 숭배 뒤에 따르는 음란한 행위에 대해서도 신물이 나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며 절망 가운데 울부짖었습니다. 그는 기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악된 행위를 하면서도 언제가는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이 소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라합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찾았고 마침내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라합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만나 주셨습니다(렘 29:13). 우리는 라합을 통해 어떤 몹쓸 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새 인생을 살 수 있음을 배웁니다.
 
III. 붉은 줄 (15-24)  

   15,16절은 라합이 정탐군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려 성밖으로 도피시키는 장면으로서 참으로 스릴이 넘치는 장면입니다.  라합은 연약한 자매님이 아니라 일당 백의 믿음의 여장부였습니다. 라합은 정탐군들이 안전하게 도망하도록 끝까지 책임성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사람을 도우려면 끝까지 책임성 있게 도와 주어야 합니다. 속담에 “애를 봐주려면 애 엄마가 올 때까지 봐주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합은 맡은 일을 책임성있게 끝까지 감당함으로써 그들이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도록 도왔습니다.
   17-21절은 라합이 구원의 약속으로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는 장면입니다. 정탐군들은 라합에게 자기들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두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들을 달아내리운 창에 붉은 줄을 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라합의 모든 가족이 집안에 모여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붉은 줄은 붉은색 실을 여러가닥 엮어 만든 줄로서 먼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붉은 줄은 출애굽시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 양의 피와 함께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여리고성을 심판할 때 창문에 붉은 줄이 매여 있는 집을 구원하겠다고 한 것은 정탐군들과 라합 사이에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라합은 이 약속에 근거하여 붉은 줄을 매어 두었고,  이스라엘은 이를 보고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줄은 구원과 생명과 희망의 표였습니다. 붉은 줄이 매여 있는 집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어떤 몹쓸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끈이 마음의 창에 드리워져 있으면 영원한 심판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됩니다.
   또한 라합의 가족들이 붉은 줄을 맨 집밖에 있으면 멸망하고, 집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라합의 집이 구원의 방주와 같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방주가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신분고하, 빈부귀천, 도덕적인 수준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안에 있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떠나 자기 원하는데로 사는 자는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정탐군들은 무사히 귀대하여 여호수아에게 자초지종과 모든 정보를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22,23).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4).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이 상천 하지의 하나님,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정탐군을 평안히 숨겨 주었을 때 하나님은 그와 그 가족을 멸망 가운데서 구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에는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하셨습니다. 비천한 기생 라합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믿음을 보시고 만민구속역사에 귀히 쓰신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이시요, 온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라합과 같이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믿음의 사건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라합과 같은 믿음의 여인들이 많이 탄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