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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5:1-15

by Mark Yang   05/04/2022  

Message


여호수아 제 5 강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

■ 말씀: 여호수아 5:1-15

■ 요절: 여호수아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직전에 길갈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할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 두가지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의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의식은 구약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에서 세례와 성찬으로 발전됩니다. 세례와 성찬은 우리 주님께서 명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행해야 할 의식입니다. 이 시간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 자세가 무엇인가 살펴 보고자 합니다.

I. 할례의 의미 (1-9)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단강 도하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모든 왕들은 마음이 녹고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요단강 도하사건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고, 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은 저주하시고 심판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소망을 두지 않으시고 포기하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에 스피릿이 충만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사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손자병법에 보면 사기가 충천하면 일사천리, 닥치는 것을 파괴하고 걸리는 것을 밀어 넘어뜨리면서, 힘이 계속되는 한 곁눈질도 않고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내닫는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이나 운동에서나 공부에서나 기업활동이나 복음역사 등 모든 면에서 스피릿은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피릿이 충만하고 가나안 백성들은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공격하기에 매우 좋은 기회였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라고 하였고, 쇠도 달구었을 때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셨습니까? 공격명령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전혀 예상치 못한 명령으로서 이해하기 힘들고 순종하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길갈 들판에서 대대적인 외과 수술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시점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행하게 되면 적어도 일주일동안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오게 되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게 됩니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야곱의 외동딸 디나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겜은 디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고, 아비 하몰에게 디나를 아내로 얻게 해 달라고 날마다 졸랐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이 만일 할례를 받게 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부지중에 그들을 습격하여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민족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적진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주체의식(Identity)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양피를 베어 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살에 새겨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주체의식을 갖도록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할례는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면 반드시 받아야 되는 전공필수 과목이었습니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백성중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창17: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때도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사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삼상 17:3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주체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신약에 와서 세례로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우리는 세례를 받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을 공적으로 인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인치는 의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받은 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것 같이, 세례를 받은 자는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다’ 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 때 어디를 가든지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떳떳이 나타낼 수 있고 이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미국 국민들에게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자는 이상을 불어넣어 준 J. F.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 로즈 여사는 불굴의 투지로 자녀를 키운 어머니입니다. 케네디가는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민에서 이민 온 캐토릭 집안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전통적으로 WASP, 곧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아니면 지도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여사는 자녀들에게 케네디가에 대한 긍지를 심어 주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건 너는 케네디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로즈 여사는 자녀들에게 케네가의 일원이 된 것은 하나의 특권이며, 그 특권은 동시에 의무를 수반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모든 운명과 역경을 뛰어넘어 미국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 설 수 있었습니다. 케네디가의 일원이 되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인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다’ 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할례는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할례의식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위기는 항상 믿음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의 믿음을 크게 인정해 주셨습니다(창15:6).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실수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사를 얻기 위해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후 그는 인생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자족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소시민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가 책망하시며 그의 이름을 '아브람(고상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하심으로 아기자기한 작은 꿈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영접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안일한 소시민적인 삶을 청산하고 열국의 아비로서의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향에 즉시 순종하여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이후로 아브라함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섬기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한 후에 그의 신앙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그의 신앙은 깊어지고 넓어졌습니다. 이는 그가 18장에서 손님대접하는 것과 멸망해 가는 소돔․고모라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데서 잘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하루 속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정된 가운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신 뜻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온 천하 만민을 품고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고상한 소시민적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섬기는 열국의 아비요, 열국의 어미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단의 표시로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6:4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욕심과 정욕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할례는 죄악된 옛습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체의식을 갖도록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에 있는 표식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표식이 이마에 붙여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마에 표시하게 되면 누구나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인격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대단히 해학적인 방법을 고안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육체의 모든 부분 중에서 이 부분을 하루에도 몇번씩 생리적으로 반드시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손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소변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표시를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적 범죄로부터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성적 범죄에 대한 소욕을 품을 때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 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마다 할례를 행한 몸의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나는 하나님의백성인데 이러면 안되지’ 하며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 중에서 많은 부분이 성적 범죄에서 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할례는 성적인 죄의 소욕 뿐만 아니라 죄악된 옛습관을 벗어버리도록 합니다. 4-9절은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내력과 아울러 그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1세들은 애굽에 있는 동안 할례를 받았으나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광야에서 다 죽었고, 출애굽 2세들은 광야생활하느라 할례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았더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한 출애굽 1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또한 출애굽 2세들이 광야에서 훈련을 많이 받았다해도 할례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또 육적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과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신30:6).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할례 행하기를 마친 후 고통 가운데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8).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행한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애굽의 수치를 없애기를 원하셨습니다. '애굽의 수치'는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때의 수치를 말합니다. 노예 생활의 특징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고 있을 때에는 열심히 하는 척하지만, 보지 않으면 대충 대충 해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가 보나 안보나 청지기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립적이고 책임성 있게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예백성은 청지기 사명이 없기 때문에 떼우기식으로 사람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합니다. 이는 하나님앞에서 반드시 벗어버려야 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노예백성은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며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갑니다.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명도 없이 현실에 얽매여 단지 생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또한 노예백성은 인내하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지도자를 원망하며 불평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노예근성은 모두 굴려 버려야할 수치스러운 일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수치를 그들에게서 굴러가게 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성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할례에는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들을 쓰실만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4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들에게 애굽의 수치를 벗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에게 아직도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좇아 사는 애굽의 수치가 생활 가운데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수치는 세월이 지나가고 상황이 바뀐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야 합니다. 또 이는 내 힘과 의지로는 없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부싯돌만이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는 아버지의 망령된 행실을 증오하며 나는 결코 그와 같은 자가 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지만 지내놓고 보면 원치 않게 자신도 꼭 같은 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우리 힘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끊고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은 성경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애굽의 수치를 잘라내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변화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목적도 죄악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1,12절은 말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9,10절에서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아담 안에서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게 됩니다.

넷째로, 할례를 행함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길갈 바로 앞에 여리고성이 있고, 여리고에서 보면 길갈이 내려다 보입니다. 여리고 성의 적군들은 그들을 향해 나아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적군들이 지켜보는 길갈 들판에 누워서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의 무력감을 철저히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심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기 능력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기 지혜와 경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식보다 자기 지식을 더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여 기도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자는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례받는 목적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더 이상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때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는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요15:5).

이상에서 볼 때 할례, 곧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것입니다. 둘째로,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셋째로, 죄악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넷째로,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II. 유월절의 의미 (10-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전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또 하나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때까지 유월절을 지킨 것은 세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는 유월절이 제정되던 출애굽 전날에 지킨 것이요(출12:1-28), 두 번째는 그 다음 해로서 시내산에서 가나안으로 출발하기 전에 시내광야에서 지킨 것입니다(민9:1-5). 그 후 38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받느라고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월절을 잘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하는 것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열왕기서를 읽어보면 믿음이 좋은 히스기야왕과 요시야 왕들이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 만에 유월절을 지켰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 쓸모없는 노예백성을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바로의 속박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 것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장자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날 밤, 이스라엘의 장자도 동일하게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서운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되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에 순종했을 때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유월절이 시작되는 그 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5,26절에서 성만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성만찬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하신 의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주님께서 내 대신 고귀한 살을 찢기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나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사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 값없이 베푸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새롭게 되새기고 감사의 단을 쌓는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의 허물이나 실수는 빨리 잊어버려야 하지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상실하게 될 때 마음이 딱딱해지고 교만해져서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게 되면 심령에 은혜가 생기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킨 그 다음날 무교절 절기에는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그 땅의 소산으로 먹었습니다(11). 그러자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던 만나가 그치고 다시는 만나를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12).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하루도 걸르지 않고 신실하게 공급해 주신 은혜의 양식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섬세하게 돌봐주셨는가를 말해 줍니다.

III.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13-1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영적 전투를 할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작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준비가 부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눈을 들어보니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서 있었습니다. 군인정신이 충만한 여호수아는 반사적으로 칼을 빼어들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그에게 나아가 물었습니다. "암호을 대라!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 대적을 위하느냐!" 현재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는 아군이냐 적군이냐만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가나안 정복전쟁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단순히 침략전쟁이나 약탈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전쟁이었습니다. 이는 빛과 어두움과의 전쟁이요, 살아계신 참 하나님과 거짓 우상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에 군대장관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14a). 그는 적군의 편도 아니요 그렇다고 여호수아의 편도 아니고 하나님 편임을 밝혔습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삼기보다는 여호수아 자신이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의 편이 되어 주시고 이들을 위해 친히 싸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칼을 든 군대장관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은 친히 그들을 위해 싸우시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친히 싸우셨을 때 그들은 칼 한 번 휘둘러 보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전쟁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그 작전지시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만난 여호수아의 자세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14b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엎드려 복종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백성들 앞장서서 명령하고 진두지휘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지휘권을 하나님께 넘기고 자신은 하나님의 작전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이것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위해 먼저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꿇어 엎드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신을 벗으라는 것은 무장해제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느슨한 구두끈을 바짝 매고 싸울 준비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신을 벗도록 함으로써 무장해제를 시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또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세상의 더러운 죄를 벗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신에는 땅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싸움을 하기 전에 먼저 내면에 있는 더러운 죄를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싸우는 싸움은 거룩한 싸움이요, 현재 그가 사명을 감당하는 바로 그 곳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묻은 정욕의 죄, 불신의 죄, 탐욕의 죄, 이기심의 죄를 회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정결케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자신의 더러운 죄악의 신을 벗을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 싸우심으로 반드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마음에 새김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음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