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히브리서 제 2 강
구원의 주 예수님
말씀 : 히브리서 2:1-18
요절 : 히브리서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지난 제 1 강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인류 구원역사의 계시의 완성자이심을 배웠습니다. 이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계의 창조자가 되시고, 영존하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우월성과 절대성을 두고 인생의 기초를 견고히 놓을 때 생명력이 충만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제 2 강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주가 되셨으며, 또 이 구원의 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I. 큰 구원 (1-4)
히브리서에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는 경고와 권면의 메시지가 많이 나옵니다. 2:1-4절은 그 첫 번째 경고의 메시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불순종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 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저자는 1장에서 천사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논증한 후에 우리가 들은 바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함을 권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센 죄악의 물결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온갖 거짓된 사상과 철학, 미신, 이단 종교,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거센 죄악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4일에 러시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행한 연설에서 오늘날 세계문화가 쾌락만능주의로 문화가 저질화되고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과학기술이 정교한 도구들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정신까지 개발하지는 못한다. 문명의 번영은 무한한 부와 편리를 이룩해 낸 동시에 영혼의 빈곤화를 초래하고 있다. 대중은 쾌락만 추구하고 있고 돈에 눈이 어두운 영화제작업자들과 출판업자들은 이들의 천박한 취미에 영합함으로써 문명의 저질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타락한 저질 문화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진리의 말씀에서 눈을 돌려도 거센 죄악의 파도에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삼가며 붙들어야 합니다. 흘러 떠내려 가는 것은 죽음의 표요, 간절히 삼가는 것은 생명의 표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흘러 떠내려 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결코 떠내려 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아 있는 잉어는 폭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2,3a절은 이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할 때 어떻게 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란 천사의 중보를 통해 모세가 전수한 율법을 가리킵니다(행7:53, 갈3: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순종치 않았을 때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심판은 문둥병이나 폐병이나 종기와 같은 질병을 통해서, 기근이나 한파와 같은 자연적인 재난을 통해서, 불의의 사고나 물질적인 궁핍을 통해서, 내란이나 전쟁 등을 통해서 다양하게 임하였습니다. 이처럼 천사가 전해 준 율법을 어겨도 공의로운 심판을 받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구원’이란 율법을 통해 주신 불완전한 구원과 대조적으로 아들을 통해 주신 완전한 구원, 절대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질병이나 물질적인 궁핍, 이민족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등 현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영원한 멸망으로부터의 구원과 같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요, 또한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들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입니다(3b).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많은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으로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시고, 특히 믿는 자의 마음에 내적 증거로 주시는 성령으로 확실히 증거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러한 증거의 역사가 잘 나옵니다. 이 구원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증인들과 증거들을 통해서 확정된 가장 믿을 만하고 가장 신뢰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란과 핍박과 유혹이 오더라도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인 욕심이나 권세나 명예욕이나 학문이나 세상 쾌락으로 인해 이 큰 구원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소홀히 여긴다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이 큰 구원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보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 큰 구원 만큼은 가장 귀히 여기고 굳게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큰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파멸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5-18)
저자는 1-4절에서 경고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의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구원의 주가 되셨으며, 우리가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축복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통한 영광 (5-10). 5-8a절은 예수님이 본래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케 하시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케 될 만큼 영광스럽고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님을 봅니다.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지렁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렁이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비하입니다. 이는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것이요, 영존하시고 무한한 분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가 되신 것이요, 가장 영화로우신 분이 가장 비천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 계실 동안에 섬기는 종으로서 죄인들을 돌보시느라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나아가 마침내는 우리 죄를 위해 온갖 조롱과 멸시와 치욕과 채찍질을 다 받으시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할 때 한없는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 지셨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볼 때 패배하고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문선명은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 너무 분하고 원통하여 자신에게 그 실패를 만회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재림주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문선명이 주장한 대로 실패의 십자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사 영광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만유의 주관자로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요, 대속의 십자가요, 사명의 십자가가 됩니다.
9b절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죽음을 맛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는 일에 있어서 저희 구원의 주 예수님을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방법이 고난을 통한 영광임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고난 없이 영광에 이르고자 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 떼돈을 벌고자 하고, 사전을 열심히 찾지 않고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하고자 하고, 1대1의 고난 없이 많은 양무리를 거느린 큰 목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어떤 일도 고난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고난 없는 승리나 영광은 진정한 승리나 영광이 아닙니다.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증오한다. 이는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는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로서 그의 영광이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고난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인생의 깊이를 배우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내면에 조각되어 우리의 인격이 깊어지고 넓어져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사도 베드로도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숙명적으로 고난을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으로 참된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기쁨으로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완전하게 되셨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완전에 관한 것에는 두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격에 관한 국면이요, 다른 하나는 사역에 관한 국면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에 있어서는 항상 온전하셨지만 그의 하시는 사역에 있어서는 아직 온전치 못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온전한 인격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사역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생긴 우리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병약함을 담당하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온전히 치루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완전히 성장하신 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월요일에 오셔서 산상보훈과 다락방 강화 등 수많은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금요일에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예수님도 온전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러한 예수님도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는 한 온전하게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물과 실수와 연약함과 병약함을 담당하시는 데 있어서는 온전하게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현재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리가 먼 분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우리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똑같이 당하시고, 고난의 삶의 현장에서 고난을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온전한 구주가 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 인한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죽음을 맛보셨다는 것은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흔히 죽음의 고통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합니다. 남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합니다. 신바람 건강을 강의하는 황수관 박사는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없지만 고통 중에서도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치통보다 다섯배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앞에서 강의를 듣고 있던 한 아줌마가 100배라고 말했습니다. 또 짓궂은 남학생들이 해산을 하고 돌아 온 여선생님에게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선생은 얼마동안 생각하다가 윗 입술은 머리 끝까지 올라가고, 아랫 입술은 배꼽까지 내려 갈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유구무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고통은 이런 해산의 고통보다 훨씬 큽니다. 죽음의 고통이란 죽음 그 자체보다 죽는다는 사실로 인해 겪는 고통이 훨씬 큽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 만다는 허탈감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해야 된다는 슬픔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죽음 후에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또한 죽음 앞에서는 부나 권세가 아무 소용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죽음의 고통은 산 사람을 괴롭히고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고통을 맛보지 않아도 됩니다.
둘째, 구원의 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 (11-18). 11-18절에는 구원의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축복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11-13).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고난받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후에 “내 형제”라 부르시기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가 될 자격이 티끌만큼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이면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죄로 영 죽을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 주시고, 예수님의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게 하시다니 이는 실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주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혈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자녀들이 다 혈육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혈육을 입고 오신 목적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고,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 동안 종노릇하는 인간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이 소멸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단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된 것입니다. 14절에서 “없이 하시며”라는 말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하다, 수포로 돌리다, 작용하지 못하게 하다,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귀는 소멸된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다 무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 사람에 한에서만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엡6:12).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의지할 때 사단은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되고 맙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고 훼방합니다. 마귀가 주로 하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를 심고 실족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고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사망의 세력이란 사망의 압박, 사망의 공포, 사망의 무시무시한 성질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공포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스스로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빈번하게 사망 권세를 경험합니다. 허무, 무의미에 시달리면 무기력하게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패배감과 한계와 절망에 빠지게 되면 운명주의와 자살충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모든 현상들은 마귀가 뒤에서 조종하며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을 앓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가 우리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마귀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사망의 세력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를 인식만 하면 우리는 사람과 무익한 싸움을 싸우지 아니하고 우리의 원수인 마귀와 싸울 수 있게 됩니다.
15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소유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내 쾌락대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귀가 우리에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사망을 향하여 나아가게 함으로써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또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을 통하여 사망을 향하여 나아가게 함으로 자유를 박탈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돈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정열을 바쳐 재물을 축적하기에 힘씁니다. 그 결과로 그는 점점 생명의 세계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는 점점 마음의 평강과 안식을 잃고 인생을 소진하고 맙니다. 이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권세나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유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재물 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벧전1:24,25).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속한 것 뿐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중에 많은 것들을 소유했으나 지금은 다 잃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수중에 맡긴 것은 내 소유로 남았다.” 진정한 자유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일단 죄에 빠지면 끊임없이 참소하여 무서운 죄의식에 시달리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보다 받은 바 상처를 기억하게 하고 불신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결국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게 하여 일생동안 어두움의 권세 아래 살게 합니다. 마귀는 이처럼 우리를 노예로 삼아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마귀의 권세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또 죽음의 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참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우리 믿는 자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입니다.
셋째로, 구원의 주 예수님은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 주십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으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주리시고 피곤하시고 슬픔과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정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이 모든 것을 다 참으시고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충성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시고 능히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움을 당할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목자님은 날 이해 못해” 하며 목자를 원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아무도 그와 똑같은 처지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할 때만이 진정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구원의 주란 구원의 창시자 또는 구원의 주관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우리를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참 자유를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는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사 참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