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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11-6:20(영혼의 닻)

by Mark Yang   08/14/2019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5 강

영혼의 닻
 말씀: 히브리서 5:11-6:20
 요절: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우리는 지난 주일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굳게 결심하지만 연약하여 쉽게 넘어져서 이로 인해 자학하고 절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또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고, 유혹에 넘어져서 죄를 짓고 깊은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우리 연약함을 깊이 이해해 주시고 동정해 주시고 담당해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늘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근본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나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영적 성장과 소망의 중요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것을 권면한 후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경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영적 성장을 위해 투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소망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선한 투쟁을 할 수 있으며, 영적인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굳게 붙듬으로 어떤 인생의 풍랑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성숙한 데로 나아가자 (5:11-6:8)

첫째, 영적 어린 아이와 성숙한 사람 (5:11-14). 11절을 보십시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저자는 6절과 10절에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임을 언급한 후 멜기세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이 영적인 깨달음이 둔하고 너무 어려서 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성을 논한 후에 7장부터 멜기세덱 대제사장론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점에서 영적으로 어린 아이였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게을렀습니다. 11절에서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에서 둔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노드로스’(νωθρ )인데 이것은 ‘게으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6:12절에 나오는 ‘게으르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말씀을 듣는 데 게으른 것은 타성에 빠져서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깨닫고 이를 내 것으로 삶고자 노력하는 영적 의욕이 없는 상태로서 영적인 게으름뱅이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말씀으로 자기 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다 그렇고 그렇지 뭐 별다른 것이 있을까” 하는 식으로 듣습니다. 말씀에 대한 영적 소원이 없기 때문에 영적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늘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험한 세상을 살 힘을 공급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은 날로 날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스피릿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에 게으른 자들은 신앙생활이 타성에 빠져서 점점 스피릿을 상실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둘째로, 그들은 가르침에 있어서 영적으로 어린 아이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므로’라는 말씀은 그들이 말씀 교육을 받은지 상당 기간이 흘렀음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말씀을 들은 기독교 제 3세대에 해당되는 사람들로서 오랫동안 말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선생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성경선생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쌓기에 힘써야 하고, 형식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져서 영적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영적 성장을 위해서 부단한 자기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산모가 갓난 아기에게 젖을 풍성하게 먹이기 위해서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섭취하듯이, 성경선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젖을 풍성히 먹이기 위해서 많은 것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경륜으로 보면 마땅히 성경선생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서 오히려 가르침을 받아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오래 믿은 자들이 다시 말씀의 초보를 배우는 것은 대학원생이 국민학교 교재를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빼어난 성경선생이 되기까지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고 권면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영적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영적 체험 면에서 영적으로 어린 아이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는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적으로는 알 수 없고 체험으로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론적인 믿음은 힘이 없지만 말씀에 기초한 체험적인 믿음은 내적인 힘이 있습니다. 무디 선생의 성경 가장자리에는 T. P. 즉 Tested and Proved (해 봤더니 그대로 되더라)는 표시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기만 하면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으며 그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4절은 그 비결을 말해 줍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어린 아이의 특징은 소화력이 약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유나 죽 같이 이미 소화된 음식은 잘 먹지만 고기와 같이 씹어서 소화해야 할 단단한 음식은 뱉아 버립니다. 또 연약하여 잘 넘어지고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또 분별력이 없어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축복에 관한 말씀은 잘 받아들이지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헌신, 희생, 주권신앙 등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은 다 뱉아 버립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입니다. 지각은 지적인 감각이 아니라 심령의 감각으로서 도덕적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또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김나조’(γυμν?ζω)로서 “벌거벗고 운동하다”는 뜻입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에 보면 보면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습하는 것이 바로 ‘김나조’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body)과 혼(soul, 정신)과 영(spirit)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운동을 통해서 연단할 때 튼튼해지고 강건해집니다. 또 정신세계도 책을 많이 읽거나 학문적인 연마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고 또 수련을 통해서 건전하고 강인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세계도 영적인 연습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성개발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영성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에 힘쓰고, 신앙생활에 기름 역할을 하는 신앙서적을 읽기에 힘쓰고,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요사이 타이거 2에서는 Pablo Star Oh 목자님을 중심으로 새벽기도의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자님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새벽기도에 힘씀으로써 영역을 덧입고 힘차게 하루를 출발합니다. 이렇게 영성개발에 힘쓸 때 영적인 분별력이 생겨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인지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적인 단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훈련한 후에 당장에 성과를 보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메달을 얻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이 뒤범벅이 된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요구되듯이,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영적 성장에 힘쓸 것 (6:1-3).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으로 어린 상태를 지적한 후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영적 성장에 힘쓸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죽은 행실이란 죽음 혹은 정죄를 유발시키는 행실들을 가리킵니다.〈12사도의 교훈집〉에 보면 사망의 길에 이르는 죄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인, 간통, 색욕, 간음, 도적질, 우상숭배, 마술, 마법, 강탈, 위증, 외식, 표리부동, 사기, 교만, 악의, 거만, 자랑” 이런 죄악들은 죽음을 낳는 죄악들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진실된 회개 후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입니다. 세례들은 당시 유대인의 결례와 요한의 회개의 세례, 그리스도의 세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성령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성령의 내적 세례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안수는 세례시, 환자 치료시, 직무 위임시, 성령 강림시에 안수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세상 종말에 있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요5:28,29). 영원한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으로서 둘째 사망을 의미합니다(계21:8).
이상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 도의 초보인데도 상당한 수준처럼 보입니다. 이는 기초를 견고하게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교훈의 터를 견고하게 닦아야 합니다. 그 후에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영적으로 어려서 자기 중심적인 요소,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또한 인간적인데서 벗어나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반발심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매사에 불평하는 불평의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장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영적 성장이 막힌 자는 자신도 답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됩니다. 특히 가까이에 있는 동역자를 가장 많이 괴롭힙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신도 기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 연륜이 성숙을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시간이 성숙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어떤 고등학교 교장이 학교의 행정직에 자리가 나서 십년 교육의 경험을 가진 한 교사를 그 자리에 승진 시켰습니다. 이 인사발령이 발표되자 한 다른 교사가 매우 기분이 상하여 교장을 찾아와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왜 그를 승진시켰습니까? 그는 10년의 경험밖에 없고 나는 25년의 경험을 가졌습니다.” 이때 교장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당신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25년의 경험을 가진 것이 아니라 1년간의 경험을 스물 다섯 차례 반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도 초기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해마다 반복할 뿐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영적 성장은 연륜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입니다.

셋째, 배교에 대한 경고 (6:4-8). 저자는 4-8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타락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은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완전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반하는 배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배교하는 것이나, 신자가 믿음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현저히 욕할 정도로 불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유일한 구원의 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자도 배교할 수 있는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단호히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자기 맹세로 보증되고 확증되는 것임을 강조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 구원을 보장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참된 그리스도인의 배교의 가능성이 없는데도 이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배교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지를 보여 주고, 배교하면 영원한 파멸에 이른다는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는 절벽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책인 것과 같습니다.
저자는 7,8절에서 농사 비유를 통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땅이 하늘에서 자주 내리는 단비를 받아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지만, 만일 가시와 엉겅퀴 같은 악한 열매를 맺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아드리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비와 같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내립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밭이 좋은 마음 밭이 되어 말씀의 단비를 잘 흡수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생에 이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 마음 밭이 교만하고 완악하여 불순종과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되면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됩니다.

II.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자 (6:9-20)

지금까지 배교의 위험성에 대해 엄숙하게 경고한 저자는 이제 부드러운 음성으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저자는 편지를 받는 독자들은 앞에서 경고한 배교와는 거리가 멀고 구원에 밀착되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의치 아니하사 그들이 그 이름을 위해 성도를 섬겨 온 선행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합니다(10).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시고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배고픈 형제를 위해 라면을 끓여 준 것조차도 잊지 아니하시고 다 갚아 주십니다.
11,12절에는 저자의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자는 각 사람이 시작할 때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을 끝까지 나타내어 선행을 행함으로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른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대한 소망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실현되는데 방해되는 것은 게으름과 오래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19:15절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감추고 장사를 하지 않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게으름은 사람을 쓸모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래 참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함으로 약속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 참기만 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성취해 주실 것인데 오래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는 13-15절에서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인치심을 받고 확정된 때는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은 때였습니다(창22:17,18). 이는 신앙생활을 출발한지 30년이 넘은 때였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오래 참았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면서까지 그 약속을 인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이 말씀은 확실히 복주고 확실히 번성케 하신다는 반복을 통한 강조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오래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18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확고부동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말의 확고함과 엄숙함을 강조하기 위해 맹세하는데 맹세할 때는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을 두고 맹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없으므로 자기를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이런 맹세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성을 보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의 완전성을 걸고 자신의 약속이 자신의 존재만큼 확실하다는 것을 맹세로 보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확고부동한 불변의 약속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체가 확인이 필요없을 만큼 확실하지만, 사람들이 약하기 때문에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서 그 약속을 맹세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맹세로 보증하신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이 약속을 맹세로 확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시고 또 맹세로 확정하셨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약속과 맹세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앞에 있는 소망”이란 우리 믿는 자들이 소망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안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피하여 가는 것은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장차 멸망할 도시인 장망성을 피하여 천성을 향해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장차 멸망하고 말 세상에 헛된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 믿는 자들이 바라야 할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소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상황에 따라서 변개되거나 취소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약속을 믿고 신앙생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즉 맹세를 통한 약속이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하고 확고부동하다는 사실은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아서 다 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붙들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뿐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닻은 배가 폭풍우에 떠내려 가지 못하도록 바다 밑바닥에 내리는 갈고리와 같은 쇠덩이를 말합니다. 조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정이삭 목자님의 말에 의하면 10만톤과 같은 배에서 내리는 닻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합니다. 닻이 일단 바닷 속에 던져져서 바다 바닥을 붙잡게 되면 배는 폭풍우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과 같아서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장이 됩니다. 배의 닻은 바다 밑으로 내려가지만 영혼의 닻은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선구자가 되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휘장 안에 있는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어떤 인생의 폭풍우에도 깨어지지 않는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입니다. 닻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평소 잔잔할 때는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배의 안전여부는 닻이 얼마나 튼튼하고 견고한가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얼마전 Ruth Tucker 교수님을 모시고 부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약 30년 전에 사라호 태풍이 불 때 13m의 파도가 일었는데 그때 수십 척의 배가 떠내려가고 대파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닻을 견고하게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언제나 순풍을 달고 항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역풍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만나 배가 파산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질병의 폭풍우를 만나기도 하고, 교통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의 폭풍우를 만나기도 하고, 갑자기 직장을 잃거나 시험에 낙방한다거나 부도가 나는 등 실패의 폭풍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최후에는 죽음의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폭풍우를 만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영혼의 닻이 됩니다. 이 영혼의 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닻입니다. 지옥의 특징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고통하는 것보다 그 고통에서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다시 말하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참된 희망이 없을 때 절망하게 되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희망은 영원토록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하고 인생의 역경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욱 희망에 불타게 됩니다. 이 희망을 그 마음에 간직한 사람은 어떤 인생의 폭풍우가 불어닥치더라도 요동치 않고 그 심령은 잔잔한 호수와 같이 평안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희망을 굳게 붙듬으로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