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Display


히브리서 8:1-9:22(새 언약의 중보자)

by Mark Yang   08/14/2019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7 강

새 언약의 중보자
 말씀: 히브리서 8:1-9:22
 요절: 히브리서 9:14,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7장에서 예수님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난 분으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의 제사직분과 비교하여 그리스도 제사직분의 우월성을 말해 줍니다. 7장에서는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강조하였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직분의 우월함은 그 제사직분과 관련된 언약이 훨씬 더 우월하고,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새 언약이 어떤 점에서 옛 언약보다 뛰어나며, 특히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새롭게 덧입고 은혜와 감사와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새 언약 (8:1-13)

저자는 1절에서 지금까지 전개해 온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1a) 여기서 ‘있다’( χομεν)는 말은 현재형으로서 항상 언제나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곁에 있으면 든든함을 느끼고 마음껏 뛰놀지만, 부모가 곁에 없으면 불안을 느끼고 기가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늘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두려워 하거나 불안해 하거나 고독에 빠지거나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고아와 같이 늘 외로움을 느끼고, 세상 사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게 됩니다.
1b,2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어떤 대제사장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섬기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섬기는 곳은 땅의 장막이 아니라 하늘의 참 장막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신 구원의 역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역사를 완성하신 후에 하늘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통하여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영광과 존귀로 옷 입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은 얻었지만 아직 몸의 구원은 얻지 못했습니다. 이 몸의 구원은 끊임없이 성화(聖化)를 해 나가다가 마지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화롭게 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까지 구속되는 이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의 사명은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예수님도 대제사장으로서 드릴 예물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예물로 드리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는 땅에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장막에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에서는 율법을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2절에서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섬기시는 장막을 참장막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참’이라는 말은 거짓과 반대 개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형으로서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이스라엘의 장막과 대조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참’이라는 말은 실질적이고 견고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참장막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하늘에 참장막이 있고, 땅의 장막은 그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모세가 장막을 지을 때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참장막을 본따서 지은 데서 알 수 있습니다(5). 예수님은 바로 이 참장막에 들어가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구약의 제사장 직분도 아름다운 직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제사장이 입는 옷은 거룩한 옷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이었습니다. 그 옷은 모두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엮어져 있었고, 어깨와 가슴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열 두 보석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사장의 옷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한 것은 그 직분이 영화롭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훨씬 뛰어나고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얻으신 제사장 직분은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며, 모형에서 섬기지 않고 원형인 참 장막에서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제사가 아니라 영원하고 신령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하는 역할을 맡은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보자는 양편을 다 만족시켜야 합니다. 완전한 중보자가 되려면 그 자신의 인격 속에 양편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성질들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의 쌍방 모두에게 환영받고 신뢰받고 인정받는 중보자이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중보자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세운 제사장은 그 인격도 불완전하고 그가 드리는 제물도 불완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에게 다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중보자로서 합당합니다. 디모데 전서 2: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그 인격면에서 완전한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제물도 흠없는 자기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을 다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7절은 첫 언약에 흠이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을 필요로 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 언약이 파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8,9).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하였다”고 탄식했습니다(렘31:32).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돌아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첫언약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들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때문에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10-12절에는 새 언약의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새 언약은 어떤 점에서 첫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과 생각에 기록해 주십니다(10a). 첫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겨 주시고 이를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함으로 이를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첫언약은 행위언약으로서 인간이 99가지를 잘 지켜도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은혜언약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다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성령에 감동되어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할 때 심령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보편화 됩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이스라엘 민족과 그 중에서도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모든 민족으로 확대되었으며,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큰 자로부터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보편화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한번은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요14:8). 이 때 예수님은 빌립을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예수님께서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요1:18).

셋째로, 다시는 죄를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약속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첫 언약 하에서 드린 제사는 죄의 형벌은 면했으나 죄 자체가 완전히 사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 형벌을 면해야 했습니다. 또 죄가 생각났기 때문에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나오는 자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저희 죄를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한 후에도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를 두고 두고 기억하고 분노하고 괴로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상처가 나아도 그 흔적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용서는 했지만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기억 속에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지워버리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은 추하고 더러운 죄를 기억하고 슬퍼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은 죄는 너무 커서 한번에 용서받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반복해서 죄용서함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후 기억도 안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온전히 믿을 때 다시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아니하고 사죄의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정립입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랑의 질서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그 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해 주신 것은 파괴된 영적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질서 속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둘째 언약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 번째 언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 언약은 육적이요 조건적이기 때문에 불완전합니다. 이는 모형으로서 원형이 올 때까지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내적인 것이요 신령한 것으로서 완전한 것입니다. 원형이 나타나면 모형은 필요없듯이 새 언약이 왔을 때 첫 언약은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II. 새 언약의 중보자 (9:1-22)

저자는 9장에서 더 좋은 약속으로 세워진 새 언약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첫째, 땅의 성소 (1-10). 1절을 보십시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성막)가 있었습니다. 성막은 성소(the Holy Place)와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the Most Holy Place)로 나뉘어 졌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출26:33). 성소에는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등대는 금으로 만든 일곱 등잔을 놓아 성소를 밝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등잔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 빛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8:12). 상위에 있는 진설병은 거룩한 떡으로서 제사장이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바꾸어 진설했습니다. 이 떡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6:35).
그리고 지성소에는 금향로와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금향로는 본래 성소에 있는 것인데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향로에서 향을 사르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계5:8). 언약궤는 사면을 금으로 쌌는데 그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 곧 언약의 비석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만나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친히 먹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을 먹이시고 돌봐주실 것을 보장해 주는 표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우신 자만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증거물입니다(민17:10).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고, 속죄소 위에는 좌우에 황금으로 된 영광의 천사들이 있어 그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으로서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속죄소는 ‘자비의 보좌’라고도 불리웠는데 이는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 용서함을 받은 은혜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대로 첫 언약 아래서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너무나 좁았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뜰에서 기다려야 했고, 제사장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날마다 등불을 켜야 했습니다(출30:7,8). 또 매 안식일마다 진설병을 바꾸어야 했습니다(레24:8).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는 감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년에 한번 있는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날에도 그냥 들어갈 수 없고, 자기와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위해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기를 위해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렸고, 백성의 죄를 위해서는 속죄소 염소의 피를 취하여 동일하게 뿌렸습니다(레16:14,15).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땅에 있는 성소와 섬기는 예법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은 아직 하늘 성소에 들어갈 길이 열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 이 첫 장막을 헐고 참 장막으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할 자가 있어야 함을 암시해 줍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 첫 장막에서 섬기는 예법은 완전한 제사와 예물이 올 때까지 맡겨 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피 (11-22).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물과 제사를 어떻게 개혁하셨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장막 곧,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있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첫 언약 아래 속한 대제사장들은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뿌려 자기와 백성들의 죄를 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짐승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속죄는 완전한 속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우리 인간이 치루어야 할 죄값을 완전히 다 치루시고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온전히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사단이 지배하는 세력권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다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바로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짐승의 피와는 달리 죄를 없이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수송아지의 피를 속죄소에 뿌림으로서 속죄함을 덧입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시체를 보았거나 만진 자는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는데 이들은 부정을 씻지 않으면 공동사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체를 정결케 하려면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그 몸에 뿌려야 했습니다(민19:19). 짐승의 피와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정결케 했거든 하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죄로 죽은 양심을 회복시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14)
염소나 송아지의 피는 짐승의 피이지만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입니다. 또 짐승은 외적으로 흠이 없는 것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조금도 흠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짐승은 강제로 끌려가서 희생제물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의 피로 드린 제사는 율법을 좇은 것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드린 제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땅에 있는 성소와 인간의 육체에 뿌려졌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뿌려지고 양심에 뿌려졌습니다. 아무리 부정한 자라도 암송아지의 재를 뿌리면 정결케 되었거든 하물며 우리 양심에 뿌려진 예수님의 보배 피가 어찌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을 깨끗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양심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우리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이성과 양심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이성은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이요,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입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부끄러워 합니다. 범죄한 자들이 잡히면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가리우는 것도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깨끗한 양심, 더러워진 양심, 화인 맞은 양심, 세 종류의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깨끗케 된 거듭난 사람의 양심이요, 더러워진 양심은 범죄한 인간의 양심이요, 화인 맞은 양심은 회개할 수 없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다된 양심을 말합니다. 더러워진 양심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것을 씻기만 하면 얼마든지 깨끗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선한 행실도 깨끗케 못하고 고행도 깨끗게 못하고 교육이나 철학이나 사상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되고 힘써도 안됩니다.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라도 깨끗케 하여 양심을 회복시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양심이 깨끗케 될 때 조그만 죄도 예민하게 느끼게 되고, 전에는 죄로 생각지 않았던 것도 죄로 깨닫고 애통히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과 같이 사죄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88년 국군 체육부대에서 열린 세계 장애인 올림픽대회 때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허모씨가 당시 무심코 철제의자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난 97년 5월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그동안 거짓말하고 도덕질하고 향락에 젖어 살았던 지난날을 청산하고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허씨는 예수님의 보배피로 더러워진 양심이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되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9년 전의 일이 생각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철제의자 한 개 값에 해당되는 현금과 회개의 편지를 부대장 앞으로 보냈습니다. “주님은 저의 지난 날의 모든 죄들을 보여 주시면서 회개케 하셨고 저의 시커멓던 죄악을 그리스도의 피로 말끔히 청소해 주셨습니다.” 부대장은 새의자를 구입하여 “양심의자”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는 죽은 양심을 회복시키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보배피를 흘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그 마음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불신과 교만과 반발하는 나의 죄 때문에 모진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타오르는 정욕과 음란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범죄하는 나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양심의 가책을 받고 죄를 애통해 하며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우리는 유명한〈벤허〉영화를 잘 압니다. 벤허는 자기를 노예로 보내고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문둥이가 되게 한 친구 멧살라에 대한 증오심에 불탔습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마차 경기장에서 멧살라를 통쾌하게 물리침으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러나 벤허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증오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는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끌려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는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벤허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복수의 칼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증오심에 불타던 벤허의 마음에 용서와 사랑과 참 평안을 심어 주었습니다. 찬송가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찬송가 186장은 큰 은혜가 됩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줍소서.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됩니다. 내 기도 소리 들으사 다 허락합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줍소서.”
15절을 보십시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피흘리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부르심을 입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피로 건설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16-22절은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어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언약과 유언은 동음이어(同音異語)로서 헬라어로 ‘디아데케’(διαθ?κη)라고 합니다. 이는 언약은 유언적인 성격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죽어야 하셨고, 그것도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첫 언약도 피로써 인치고(18-20),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었습니다(21,22).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입니다(레17:11).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인치셨습니다. 죄로 병든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피 뿌림이 없이는 깨끗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넘치고,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새롭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더욱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되는데 오히려 심정이 무덤덤하고 왠만한 충격없이는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음으로 은혜와 감사와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