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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8-22(조상들의 믿음)

by Mark Yang   08/14/2019  

Message


1998년초 히브리서 제 11 강

조상들의 믿음
 말씀: 히브리서 11:8-22
 요절: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지난 10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믿음의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믿음의 증거를 얻게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무슨 일을 하든 형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잘 될 것 같은 일도 안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건 사건을 만날 때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믿음의 증거를 얻기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의 조상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기사가 히브리서11장에서 거의 3분의 1이나 차지할 만큼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이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인정을 받아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될 수 있었는가, 또한 조상들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약속을 믿는 믿음 (8-19)

첫째,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8): 아브라함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보편적인 관계를 유지하셨으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관계를 맺으심으로 인류역사에 있어서 새롭고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말씀은 창12:1-4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는 문화의 발달과 함께 죄악도 관영하여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죄악된 본성을 좇아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시대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인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장엄한 인류 구원 계획이 숨어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아브라함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임한 큰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 부르심에 순종하는 데에는 많은 아픔이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터를 닦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5세의 늙은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사고가 경직되어 미래지향적이 되기보다 과거지향적이 되어 모험을 원치않고 안정을 구합니다. 늙은 나이에 개척정신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나아가고자 할 때 누구에게나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지 않고 단지 짤막한 약속의 말씀만을 주셨습니다. 또 그 약속의 말씀도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목적지를 분명히 제시해 주시지도 않고 막연히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이라고만 말씀하심으로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부르심을 좇아 나아가고자 했을 때 친척이나 친지들이 필사적으로 말렸을 것입니다. 치매에 걸렸다느니, 하나님을 너무 열심히 믿더니 미쳤다느니 갖가지로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유익인가 아닌가 계산하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을 때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순종하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권위와 최고의 공신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앞날을 인도하시고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미래를 보장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상을 쓰며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르심의 은총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의 순종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쓸모없는 늙은이를 부르사 구속역사에 복의 근원으로 귀히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격하여 나아갔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을 부르며 나아갔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믿음의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먼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야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으로서 우상숭배하는 세상이요, 쾌락을 추구하는 음란한 세상이요, 인본주의 세상입니다. 믿음이란 소극적으로는 죄악된 세상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로 향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장막생활(9-10):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가서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 아무도 살지 않는 에덴동산과 같을 것이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예기치않게 그곳에는 원주민들이 파란 눈을 껌벅거리며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기가 죽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본토 친척 아비집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우거하며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우거한다’는 것은 나그네가 이민족의 땅에서 영주권도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주인으로 행세하려 하기보다 나그네처럼 우거하며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장막생활은 늘 자주 옮겨 다녀야 하기 때문에 삶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생활을 갖기가 힘듭니다. 또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도 없고 자녀교육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장막생활은 안주하지 않고 군인과 같이 주님께서 명하시면 언제든지, 어디로든지 떠나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동성이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꾸리지 않고 항상 깨어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안주하고자 할 때 심령이 부패해져서 무기력해지고 욕심에 사로잡혀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장막생활을 하게 되면 늘 흐르는 물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장막생활이란 나그네 생활이요, 사명을 중심으로 한 사명인의 생활입니다.
대개 처음에는 믿음으로 장막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잘 살게 되면 더 이상 고생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게 되었을 때도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 처음부터 끝까지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 생활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당대에 고생을 많이 하면 나는 고생을 하지만 자식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은 개척정신과 투쟁심과 자립심을 잃어버리고 나약하고 의존적이 되어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역사성의 결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역사성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당대만을 위해 신앙생활하지 않고 후손들도 장막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살도록 함으로써 역사의 기초를 잘 놓았습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준 것입니다. 이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었습니다.
믿음에는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것이지만 나와 내 가정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이웃과 후손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웃과 후손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항상 “너와 네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역사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 함부로 살 수 없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역사부재의 시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신앙생활도 롯과 같이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이기적인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후배들과 후손들이 우리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올 수 있도록 역사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때 우리는 현실의 작은 유익에 연연하거나 현실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우거하면서 장막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가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그 땅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소망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는 모든 것이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이 허무하고 일시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종국에는 파멸하지 아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이기신 부활로 건설된 나라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건설하신 나라로서 낙원이라 일컬어집니다. 이 낙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영원히 거할 본향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중에는 이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불탔기 때문에 기쁨으로 장막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희망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현실 생활의 삶의 기초와 삶의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람이 순수하게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때 그 삶도 순수해지고 영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밝고 힘찬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참된 희망이 없을 때 아무리 부족함이 없이 산다 할지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심령이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잉태하는 믿음(11-12): 11절은 사라의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사라는 90세가 되어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창18:10), 사라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책망하시는 음성을 듣고 인간 조건을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이때 그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사라를 통해서 우리는 나이가 많아도 믿음으로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30대 후반 40대가 되면 세대차 때문에 캠퍼스 영혼들을 잉태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에 피싱하러 나갔다가 학생들이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면 문득 나이를 의식하고 자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캠퍼스 영혼들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파블로 오 목자님은 40대 중반의 아저씨입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외무부의 과장으로서 내노라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틈만 있으면 스피릿이 충만한 가운데서 캠퍼스에 나아가 아쉬운 소리를 하며 피싱을 하십니다. 시카고의 정요셉 선교사님은 나이가 환갑이 다 되고 손주가 있는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캠퍼스에 나가 피싱하고 학생들에게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십니다. 노인네가 불가능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잉태하면 은혜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실로 죽은 자와 방불한 자였습니다. 그 자신에게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롬4:19-21).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축복하사 불가능한 가운데서 이삭을 허락하시고 또 그를 통하여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믿음의 중요성과 믿음의 가능성에 대해 배웁니다. 우리는 상황이 힘들면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불신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믿음을 축복하사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는 인간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이 다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상황이나 조건을 바라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포기해 버립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이유 때문에 힘들고, 저 사람은 저런 이유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미국이기 때문에 제자양성하기 힘들고, 독일은 독일이기 때문에 힘들고, 러시아는 러시아이기 때문에 힘들고,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이기 때문에 제자양성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나 조건을 보면 힘들지 않는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는 지역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의 사고 방법은 다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어떤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가능성을 보고 희망을 갖습니다. IMF 시대에는 대목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가진 자는 항상 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 냅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 오히려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넷째, 믿음의 조상들의 소망(13-16): 13-16절은 조상들의 믿음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란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장막생활을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은 다 당대에는 약속어음은 받았으나 현금은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자기 돈으로 막벨라 굴을 사야 했습니다. 약속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회의하고 불신하고 원망하고 믿음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불신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결코 부도를 내시는 분이 아니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약속이 성취된 줄 믿고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약속의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함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잠시 머무는 여인숙과 같고 지나가야 할 다리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뿐 그 위에 집을 짓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믿고 살았으나 약속에 집착하지 않고 약속을 초월했습니다. 이는 약속 자체보다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약속에 대한 영적의미를 깨닫고 참된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약속이 당대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 하거나 불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100년전 우리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인해 고통당하다가 나라마저 잃는 국운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100년전과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군함을 앞세운 제국주의적 침략은 없지만 대신에 강대국의 금융자본이 거대한 몸집으로 우리 앞에 다가 서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경제 전쟁 시대로서 소리없는 총성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세계입니다. 요즈음 TV에 나오는 동물의 세계를 보면 자연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는 대원칙은 ‘정글의 법칙’입니다. 여기에는 눈물도 동정도 없는 비정한 세계입니다. 오직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일 뿐입니다. 한치의 방심이나 허점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틈만 보이면 맹수의 밥이 되고 맹수도 조심하지 않으면 약한 짐승들에게 거꾸로 당하기도 합니다. 재작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정글의 법칙’이 국제사회를 지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반문명적이고 반인륜적인 ‘정글의 법칙’에 지배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문명의 가면을 벗기고 보면 인간도 ‘정글의 법칙’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금융위기에 처한 한국에 대해서 선진국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먹이감을 노리는 맹수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냉엄한 국제사회를 직시하고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다보면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의 문제에 얽매여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 살 때 우리는 동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결코 동물과 같이 살 수 없고 현실을 뛰어넘어 보다 차원 높은 세계, 즉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게 됩니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동물과 달리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차원 높은 세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더 좋은 곳을 예비해 놓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고자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갈대아 우르가 참 본향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이는 인생들이 돌아갈 진정한 본향이요, 영원한 본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2)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b). 하나님은 나는 롯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자기를 경멸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삼상2:30b).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아름답고 빛나는 한 거룩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다섯째, 이삭을 바치는 믿음(17-19): 17-19절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성숙한 믿음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산 결과 25년만에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이삭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매우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의 불합리성을 따지며 마음에 쓴뿌리를 품고 불순종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창9:6) 이삭을 죽이라고 하신 것은 윤리적으로 모순이었습니다. 또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이 파기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한마디 불평없이 묵묵히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삭을 드렸습니다. 이로써 그는 영적질서를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살리실 것을 믿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생각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λογ?ζομαι)로서 ‘헤아리다’, ‘추리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시험을 받을 때에 감정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동안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자기를 부르시고 자신을 키우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능히 이삭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이삭을 도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반석과 같은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Ⅱ. 축복하는 믿음 (20-22)

20,21절에는 이삭과 야곱의 축복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야곱은 죽을 때에 믿음으로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손자들이기 때문에 12지파의 조상의 대열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축복은 삶을 종결짓는 시점에서 유언과 같이 행해진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자손들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에 제자에게 이웃에게 빚진 닭 한 마리를 갚아주라는 유언을 하였습니다. 중국 영화를 보면 부모가 죽을 때에 자식들에게 원수를 갚아달라는 한맺힌 유언을 남김으로 피비린내나는 복수전이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손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물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이 얼마나 가치있고 귀한 것인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물질을 유산으로 남겨 줌으로써 자식들이 물질 때문에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 싸우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손들에게 물질적인 유산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유산으로 물려 주어야 합니다.
22절은 요셉의 믿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은 17세 때 애굽에 와서 110세 때 죽었으므로 93년동안을 애굽에서 살았고 그중에서 80년동안을 총리로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애굽 문화에 젖어 애굽 사람이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선진국 애굽 문화를 이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말하고 그때 자기 해골도 가져갈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소망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부족하지만 어떤 어려운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으며, 믿음으로 장막생활을 했으며,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고 믿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믿음으로 후손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므로 말미암아 새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