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초 히브리서 제 13 강
승리하는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29-40
요절: 히브리서 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오늘 말씀은 믿음의 승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힘든 환경을 이기는 승리요,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는 승리요, 환난과 핍박을 이기는 승리입니다. 또한 믿음은 감정을 이기고 자존심과 교만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승리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한 내적, 외적 승리의 역사를 통해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신자의 세상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Ⅰ. 믿음으로… (29-31)
29-31절에는 믿음으로 행한 세가지 사건들, 곧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한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넘 (29).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희망찬 진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푼 희망 가운데 찬송을 부르며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희망은 절망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들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가로 놓여 있었고, 뒤에서는 중무장한 애굽의 전차부대가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장자 재앙으로 얼떨결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후에는 손해의식에 사로잡혀 “우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을 우리의 섬김에서 내어 보내었는고”하며 억울해 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앞에는 시퍼런 홍해요, 뒤에는 노도와 같은 무서운 애굽 군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다시 끌려 가든가, 치욕스런 삶을 사느니 물에 빠져 죽든가, 아니면 사생결단하고 싸우든가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홍해를 건너갈 배도 없고, 뗏목을 만들 수도 없고, 더군다나 하늘을 날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홍해나 애굽 군대와 같은 외적 환경보다도 내면에 깊이 형성된 노예근성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나 그 내면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데는 하루 밤이 걸렸지만, 애굽을 이스라엘에서 이끌어 내는 데는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조그만 어려움에 부딪쳐도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기를 잘하고 지도자를 불신하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이것은 믿음의 언어였습니다. 모세도 시퍼런 홍해와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바라볼 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도자 모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면의 두려움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진군 명령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믿음으로 지팡이 든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심으로 물이 갈라져 거대한 물벽이 생기고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길을 건넌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길을 건너는 도중에 물이 다시 합쳐져서 그들을 삼킬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홍해가 열리고 길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29b).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것을 보고 노예 백성이 건너는데 선진국 백성인 우리가 못건너랴 생각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건너 가는데 우리가 병거를 타고 못건너랴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믿고 건너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물에 다 빠져 죽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는 것과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할 때 탄탄대로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홍해가 있고 여리고가 있고 험한 광야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러한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홍해는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반드시 건너야 할 홍해가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영어가 홍해요, 어떤 분에게는 제자양성하는 것이 홍해입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임용고시와 같은 시험이 홍해입니다. 어떤 분은 괴팍한 성격을 고친다거나 혈기를 죽이는 것이 홍해요, 또 반복되는 죄악된 습관을 끊는 것이 홍해처럼 보입니다. 또 요사이 우리 나라는 IMF가 홍해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강은 인간이면 누구나 건너야 할 홍해입니다. 우리는 이런 홍해 앞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원망하며 오도방정을 떨기 쉽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도전할 때 불가능한 가운데서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우리 앞에 있는 홍해는 믿음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없을 때 홍해가 아니라 접시물에도 호들갑을 떨다가 빠져 죽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길을 내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사야 43:2절은 말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둘째,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함 (30). 3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니” 29절과 30절 사에는 4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 엎드러졌던 기간입니다. 이 불신앙의 기간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기간이요, 무의미한 기간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이런 기간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불신앙의 세대가 다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새로 태어난 세대가 믿음의 용장인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 입구에 위치한 성으로서 40년전에 10두령들이 보고 겁을 먹었던 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가나안의 많은 성 가운데서도 주도적인 요새로서 성읍이 크고 견고하여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성을 정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약속된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성이었습니다. 또 여기서의 승패 여부는 앞으로의 정복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속의 땅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쟁취해야 됨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자 할 때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여리고 거민들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일과 아모리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싸울 의욕을 상실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 버렸습니다. 문을 열고 싸우고자 해야 결판을 내겠는데 문을 굳게 닫고 싸우려고도 하지 않으니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군사 전술학에 의하면 방어만 하는 적군을 공격하려면 적군의 3배 이상의 군사와 전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전력의 10배가 되어야 포위를 하고 최소한 5배는 되어야 정면공격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차나 대포는커녕 칼과 창조차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을 포기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성 안의 사람을 굶어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성 안에서 다 자급자족이 이루어졌고 또 장기전으로 가면 이스라엘에게 불리했습니다. A.D. 73년 로마가 최후의 유대 항전지인 암벽 성채 맛사다를 공격하기 위해 그 옆에 그와 동일한 성을 쌓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여리고 성 옆에 성을 쌓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또 북한과 같이 땅굴을 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와 자재들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성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상한 작전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앞에 두고 매일 조용히 성을 한번씩 돌되 엿새동안 그리하고 제 칠일에는 일곱번을 돌고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 때 큰 소리로 외치면 성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작전지시였습니다.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성을 돌다가 적으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대로 한다는 것은 실로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모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합리적인 생각과 불신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지혜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매일 매일 합심기도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러자 전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성이 놀랍게도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요,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약속의 성취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믿음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전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여리고 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1대1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 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고 말씀공부하면 자신의 꿈과 이상이 다 깨어지고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좀처럼 열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사주고 사랑으로 녹일려고 해도 안됩니다. 때로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협박 공갈을 해도 안됩니다.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는 한 사람의 마음의 문도 열 수 없습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와 계획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양들의 마음의 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세계 187개국을 정복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1대1 말씀공부와 기도의 작전을 주셨습니다. 또 주님의 제자를 양성하여 한 사람 한 사람 선교사로 파송하는 제자양성의 작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느리고 어리석은 방법 같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1대1 말씀공부와 기도와 제자양성을 통하여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함 (31).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이방 여인으로서 여리고 백성과 함께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녀는 창기로서 도덕적인 면에서도 소망이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몹쓸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듯이 라합의 구원은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라합은 죄로 멸망할 성에 살면서 소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 즉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 때문에 가나안 땅을 심판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갈 때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멸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것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기꺼이 은혜 베푸실 것을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심판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라합은 수많은 여리고 사람들 가운데 홀로 믿음을 가졌습니다. 자기가 가진 믿음의 가치를 알아줄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홀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녀는 실로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군을 영접하므로 역사적인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군이 쫓기는 몸으로 자기 집에 들어왔을 때 즉시 간첩신고를 하여 상금 5천만원을 타고 기생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정탐군을 숨기게 되면 민족의 배반자가 되고, 또 숨긴 것이 발각되면 동조죄와 불고지죄로 인해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라합이 정탐군을 숨기는 것은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이때 그와 그 집이 멸망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후 라합은 유다의 방백 살몬과 결혼을 하여 보아스를 낳고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마1:5). 살몬은 정탐군 중 한사람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현희의 보디가드가 김현희에게 연정을 느껴 끈질기게 구혼하여 결혼한 것처럼, 살몬도 라합의 믿음의 용기에 감동을 받아 끈질지게 구혼하여 결혼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이방 여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을 때 구원하시고 구속역사에 귀하게 쓰시는 분이심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실로 은혜의 하나님이시요,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민족, 도덕, 신분, 성별 등 모든 인간조건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상에서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한 사건은 사람들이 볼 때 하찮은 사건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믿음으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내가 하는 1:1, 기도하는 것, 피싱하는 것, 선교사님들에게 편지쓰는 것, 양들을 식사초대하는 일이 하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볼 때 하찮게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을 귀하게 보시고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시고 복음역사에 귀히 쓰십니다.
Ⅱ. 믿음의 용사들 (32-40)
저자는 이때까지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람 한 사람 믿음으로 행한 믿음의 선진들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열거하다가는 언제 편지를 끝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이때까지 말한 믿음의 증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이 말한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이 있음을 말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으로 행한 일들을 총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믿음의 용사들이 나옵니다.
첫째, 믿음으로 이룬 외적인 승리의 역사 (32-34). 32-34절에 언급된 믿음의 용사들은 대부분 사사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연약하고 운명적인 자였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고 운명을 극복하여 새역사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이 두렵지만 먹고 살기 위해 숨어서 포도주 틀을 밟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집은 극히 미약하고, 나는 아버지 집에서도 제일 작은 자이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다는 깊은 운명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가운데서 믿음으로 연약함과 운명주의를 극복하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기드온 300용사로 막강한 미디안 군사들을 물리쳤습니다.
바락은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스라가 쳐들어오자 두려워서 여선지자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게 가지 아니하면 내가 가지 않겠노라.” 그는 이렇게 내면이 연약했으나 드보라의 도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삼손은 힘이 센 장사였으나 육신의 정욕에 눈이 멀어 여우같은 들릴라에게 홀려 머리털을 깎이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두 눈이 다 뽑히고 원수들의 노리개 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후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삿16:28). 이때 그는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고 기둥을 쓰러뜨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으로 원수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입다는 서자라는 인간조건 때문에 비관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운명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소년 다윗은 연약한 소년에 불과했으나 믿음으로 거인 골리앗에 도전하여 통쾌하게 물리쳤습니다. 사무엘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기도함으로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삼상7:5-12).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자들로서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연약함을 극복하고 승리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를 볼 때 연약함이 결코 핑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연약함을 이해해 달라며 동정을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연약하여 죄악된 습관을 끊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연약함을 합리화하여 죄를 즐기고자 하는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연약한 것은 악한 것입니다. 연약함을 핑계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능력을 덧입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저는 과부의 외아들로서 몸과 마음이 연약한 자였습니다. 저에게는 나는 연약하니 지도자가 될 수 없고 큰 일을 할 수 없다는 운명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 공부를 해 나가는 중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가 약한 것이 아니라 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저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덧입혀 주셨습니다.
33,34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행한 역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에 부딪쳤을 때 절망하여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도전하여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이 넘치는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여러가지 크고 작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좌절하고 포기하고 도피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연약함을 이길 수 있고, 믿음으로 슬픈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내 마음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는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나를 유혹하는 죄의 세력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어학도 정복할 수 있고, 믿음으로 결혼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나이가 많아도 신입생을 잉태할 수 있고, 믿음으로 선교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개인에게 있어서나 민족에게 있어서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역경을 이긴 내적 승리의 역사 (35-38). 35-38절에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내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믿음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이렇게 가련하고 처참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연적인 재앙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하나님을 믿고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며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세상과 조금이라도 타협을 했더라면 세상에서 얼마든지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편히 살 수 있었습니다. 조롱과 핍박 대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영혼을 팔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 진리를 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아무리 핍박하고 학대할지라도 조금도 기가 죽거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변질시키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세상은 저들을 가치 없다고 함부로 대하였으나 사실은 세상이 그들의 살기에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38).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패배의 인생, 낙오의 인생을 산 비참한 자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의 인생을 산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고난을 이긴 믿음의 내면성이 강한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는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우리를 괴롭히고 못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은 우리를 연단시키고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시키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품격, character)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롬5:3,4).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이 못되고 잠시 거쳐갈 여인숙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다가 때가 되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으로 역경을 이기고 새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선진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39,40). 39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믿음의 선진들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므로 말미암아 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하다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면 손해의식에 사로잡히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회의하고 믿음을 저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볼 때 약속을 받는 것보다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40절에서 ‘더 좋은 것’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의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속역사의 정점이 되십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살았으며, 신약의 크리스챤들은 오신 메시야를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선진들과 오늘날의 우리가 합하여 온전함을 이루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한 분 한 분이 믿음으로 연약함을 극복하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