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초 히브리서 제 14 강
예수님을 바라보자
말씀: 히브리서 12:1-13
요절: 히브리서 12:2a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열거했습니다. 12장에서는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당면한 고난을 직시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욥 5:7).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애매하게 고난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괴로워하고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받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를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감당함으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믿음의 경주 (1-3)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저자는 1b절에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라고 함으로써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경주는 믿음의 경주요,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이 믿음의 경주는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주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원하든 원치 않든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해 달려가는지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으로 경주를 마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그 순간부터 영원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습니다.
저자는 1a절에서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하도록 격려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증인들이란 헬라어로 ‘마르티론’(μαρτ ρων)으로서 ‘순교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달려간 길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영광의 길임을 목숨을 내놓고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가치관을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았으며, 어떤 손해와 아픔과 핍박 가운데서도 뒤로 물러가거나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 승리의 면류관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있도록 박수를 치며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증인들은 오늘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2b). 마라톤 선수는 두꺼운 오바코트를 입고 워커를 신고 007가방을 들고 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팬티와 런닝셔츠만 입고 뜁니다. 마라톤 선수는 모든 것을 절제하여 체중도 가볍게 조절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있어서도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유대 신자들에게는 율법과 율법적인 사고방법이 신앙생활의 큰 방해요소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 율법에 기초한 생활 때문에 무엇을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쉬웠습니다. 이런 생활은 무엇을 열심히 하게 되면 자기 의가 생겨 교만하게 되고, 또 못하게 되면 불의에 빠져 자학하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사고방법을 벗어버리고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늦잠자는 것과 같은 좋지 못한 습관이나 컴퓨터, 신문, T.V, 비디오, 영화, 만화가 믿음의 경주에 방해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뉴욕의 10대 깡패들의 목자였던 데이빗 윌커슨은 하루 2시간씩 T.V보는 대신 기도하고자 결심하여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외적 장애물 뿐만 아니라 내적 장애물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저자는 죄를 얽매이기 쉬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우리의 생각과 생활을 얽어매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특히 불신의 죄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모임을 분열시킵니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하게 되면 미움과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세상 욕심에 사로잡히면 영적소원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또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정욕의 죄가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정욕의 죄를 범하면 죄의식과 수치심과 무력감이 엄습하여 믿음의 길을 달려가지 못하게 됩니다. 죄짐은 그 어떤 짐보다도 가장 무거운 것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벗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회개로써 아담 안에서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출애굽을 하였으나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고 목자를 불신하고 원망하는 노예근성을 벗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 엎드러져 멸망했습니다. 회개란 이러한 노예근성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정욕의 죄를 범하였을 때 그 뼈가 쇠할 정도로 심한 고통 때문에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없었습니다(시32:3). 그러나 그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눈물로 회개했을 때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무거운 죄짐을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진실되게 회개함으로써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날아갈듯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어 힘차게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신앙생활은 단거리가 아니라 일생 동안 달려가야 하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장거리 경주에는 인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아무리 잘 뛰더라도 중도에 힘들어서 포기해 버린다면 상을 얻지 못합니다. 마라톤 경주를 해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힘든 고비가 있습니다. 대개 10km 지점과 35km 지점이 고비라고 합니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상이고 뭐고 당장에 포기하고 주저않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를 참으면 발이 저절로 움직이게 됩니다. 고비를 참는 것은 오로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경주에도 힘든 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타협하고 주저앉고 싶습니다. 또한 사명의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질 때 사명인의 생활을 포기하고 소시민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만족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막 8:34).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 유혹이 오거나 세상 욕심이 생길 때, 또한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꼬일 때, 더 이상 자기를 부인하고 싶지 않고 힘써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하고 싶지도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힘들 때 인내하게 되면 더 큰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내는 결코 소극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이는 역경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내적 힘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평소 말씀공부와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부단한 훈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인내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1:19).
셋째로,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됩니다. 2a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바라보자’는 말은 헬라어로 ‘압호라오’( φορ?ω)로서 “오직 그것만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한 ‘바라보자’( φορ ντε )는 말은 현재분사로서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경주에 있어서 바라 보아야 할 목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목표를 놓치게 되면 달려갈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목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푯대요, 목적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한 분을 얻고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길을 달려갔습니다(빌3:7,8,12-14). 그때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영광스러운 의의 면류관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딤후4:7,8).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두려워집니다.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믿음으로 살다가 낙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 주위 친구들을 바라보면 불의에 빠져 자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 은혜 충만, 감사 충만, 기쁨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설교가인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구원 문제로 고민하던 중, 어느 주일 아침 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날은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길이 막혀 목사가 교회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때 구두 수선공이거나 재단사 같은 한 남자가 설교단에 서서 좀 어색한 목소리로 이사야 45:22절 말씀에 근거하여 외쳤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라.”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는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수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일어났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들리움을 받았노라.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 있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스펄전이 이 메시지를 듣고 단순히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즉시 영적인 눈을 뜨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돈도 필요없습니다.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는 예수님께 시각을 고정시키고 모든 것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플 때도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축복의 때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고난의 때도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성공했을 때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실패했을 때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로마서 8:6절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예수님과 관련시켜 영의 생각을 할 때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고자 힘쓸 때 우리의 내면은 점점 아름다운 예수님의 형상으로 조각되게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믿음의 개척자가 되시고 주관자가 되시고 완성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출발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믿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서 믿음의 경주를 하시고 우리가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올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는데 있어서도 우리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2b절을 보십시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멸시와 고통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자존심이 상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만민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잠시나마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받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큰 소리로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와 멸시를 다 참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에게 거역하는 모든 죄인들을 참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인들까지도 참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로 인한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심령에서부터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믿음으로 십자가를 참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믿음이 있을 때 십자가를 참을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로기조마이’(?ναλογ?ζομαι)로서 "깊이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데 애매하게 고난을 받게 되고 그 고난이 장기화 될 때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받아야 되는가 피곤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피곤한 생각이 들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겨울 나그네가 되고 싶습니다. 목자 사표를 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사표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피곤한 마음과 낙심하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나의 허물과 죄를 오래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교만과 정욕과 불순종과 반항심을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로운 힘과 은혜를 덧입고 기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게 됩니다.
Ⅱ. 하나님의 훈련 (4-13)
저자는 계속해서 신자들이 받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이를 감당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히브리 성도들은 그동안 죄와 싸우다가 피곤하여 낙심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위로와 동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순교하기까지 싸우라는 것입니다. 죄는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결코 봐줄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는 그 뿌리가 뽑히기까지 철저히 싸워야 합니다.
5절 이후부터 나오는 징계는 헬라어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α)인데 이는 ‘교육’ 또는 ‘훈련’으로서 가정교사가 아이를 훈련으로 바르게 양육한다는 뜻입니다. NIV에는 ‘discipline‘이라고 하였고, 표준새번역에도 ‘훈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크고 작은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이때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예로부터 의인에게 왜 고난이 있는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욥기는 이러한 문제를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생이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은 죄로 인한 결과라는 인과응보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욥기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은 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도록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욥23:10).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데 왜 고난이 있습니까? 왜 불의의 사고와 질병이 있고 실패가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훈련인 것입니다. 7,8절 말씀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훈련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훈련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훈련은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과거 우리는 사단의 종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단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적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 우리의 내면은 너무 천박하여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자유인이 되었으나 그 내면은 여전히 노예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이고 감정적이고 규모가 없으며 연약하고 게을러서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만백성을 품고 섬기는 제사장 나라, 목자의 나라로 삼으시기 위해 광야에서 여러 모양으로 연단하셨습니다. 매일 제 때에 일정하게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 안식일을 절대적으로 지킴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훈련, 감정과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말씀을 좇아 사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훈련이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속담에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식은 매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생자는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 제 멋대로 자라나 못쓰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매를 때리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원망하고 쓴 뿌리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고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무엘하 7: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훈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막대기는 목자님이 될 수도 있고 양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형제가 될 수도 있고 직장 상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 채찍이란 질병이나 사고나 가난이나 사업실패 등 인생을 살아가는데 생기는 여러가지 사건들입니다. IMF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막대기요, 채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다양하게 훈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훈련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저자는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를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엄격한 부권제도를 지키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법에 의해 가족에게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때리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종으로 팔거나 사형을 시킬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식을 훈련시키는 훈련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기의 뜻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불완전하고 또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잘 훈련시킨다 할지라도 육체와 정신은 훈련시킬 수 있지만 죄로 병든 내면은 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시고 완벽한 계획 아래 온전히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하사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케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의 성품을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벧후1:5-7).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직스럽고 덕이 있고 절제할 줄 알고 인내심이 있고 경건하며 형제를 품고 섬기며 무엇보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육신적이고 인간적이고 좁고 편협하여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영적이고 경건하게 하시고 또한 넓고 깊게 하셔서 황태자답고 황공주다운 내면의 소유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로, 훈련을 경히 여기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훈련을 받을 때 우리가 경계해야 할 두가지 점은 훈련을 경히 여기거나 낙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훈련을 받을 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훈련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훈련을 싫어하기 때문에 빨리 훈련이 끝나기를 바라고 요령껏 훈련을 받는 척 하다가 적당히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런 자는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그 내면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성장이 없습니다. 잠언 12:1절에 보면 훈련을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훈련을 받을 때 절망하고 깊은 불의에 빠져 자학합니다. 이런 자는 겉으로 볼 때 겸손한 것 같지만 실상은 훈련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않으므로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을 받을 때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재난을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우연한 사건으로 봅니다. 또 목자님이 훈련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목자님을 통하여 주시는 훈련으로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훈련 받지 못하고 사람 앞에서 훈련 받습니다. 우리는 어떤 훈련이든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또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시기로 인해 10년 동안이나 쫓겨 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하나님의 훈련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에 사울과 인간적인 싸움을 싸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참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압살롬의 배반으로 쫓겨갈 때 시므이가 다윗에게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아비새가 분이 나서 단번에 머리를 베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이 말했습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는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8-12).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훈련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어려서부터 감당키 힘든 모진 고난을 받았으나 이를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에 형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오히려 형들을 품고 섬길 수 있는 성숙한 내면성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그 고난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우리를 옭아매는 운명의 쇠사슬이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영접하면 그 고난은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시키는 은총이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시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훈련을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시고 갈구시는가, 찍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 쓴뿌리를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쓰실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기 위해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은 사탕을 주는 저차원적인 사랑이라면,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주시는 훈련은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훈련을 받을 때 쓴 뿌리를 품고 반발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점점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훈련을 받을 때 고분고분 순종하면 좀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하고 반발해야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반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세를 가질 때만이 겸손하게 훈련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무릇 훈련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훈련 받는 것을 보면 재미가 있어 웃지만 훈련 받는 당사자는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받은 후에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훈련의 과정은 쓰지만 그 결과는 답니다. 훈련을 통해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화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되고, 세상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우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해야 됩니다(12,13). 이는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어 감사함으로 훈련을 잘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다가 훈련의 가치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마음과 육신이 원하는 대로 제멋대로 살다가 그 내면이 짐승과 같은 상태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 없이 좋은 군인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훈련 없이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여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나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감당하여 만민을 품고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