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초 히브리서 제 15 강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자
말씀: 히브리서 12:14-29
요절: 히브리서 12:28,29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지난 강의(12:1-13)에서 우리는 믿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를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 훈련을 통해서 모든 불순물을 걸러내고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고, 그 내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조각하여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만드십니다.
오늘 말씀은 마음에 쓴 뿌리를 품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경고하고, 나아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아야 하며,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14-17)
14-17절은 공동체 윤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인친 옛언약을 기초로 한 언약 공동체였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보배피로 인친 새언약을 기초로 한 언약 공동체입니다. 이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세상의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우리는 이 언약 공동체를 귀히 여기고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언약 공동체를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까?
첫째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합니다(14). 1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과 거룩함은 신자가 언약 공동체 내에서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덕목입니다. 평소 아무 문제가 없이 평온할 때 화평을 좇는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매하게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고자 하는 자기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생겨 마음이 위축되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 버립니다. 독선에 빠져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거나, 배타적이 되어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의 벽이 생겨 다른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맺기 힘들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에 화평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 화평은 우리가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요,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일방적으로 받게 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평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이 맺어진 데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참된 평화입니다. 우리는 아무 값없이 마음에 이 하늘나라의 평화를 소유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과 적극적으로 화평을 추구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의와 타협한다거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그 마음에 나를 핍박하는 자에 대해서 미움이나 정죄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상대방을 용서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적극적으로 화평을 추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롬 14:19)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화평을 추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 5:9)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함을 추구하는 것이 이웃과의 관계라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한 자는 아무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고 그분을 볼 수 없고 그 분과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사랑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또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계 4:8). 거룩이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고 또 죄를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순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있는 것과 같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대접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존귀함과 섬김과 높임을 받고 찬송과 경배를 받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 인간은 죄인으로서 거룩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죄악됩니다. 로마서 3:10-18절은 말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요, 또 죄와 싸움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며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애를 쓰지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권세와 명예 등 소유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소유를 얻고자 목을 내놓고 투쟁하지만, 믿는 자들은 소유보다 존재를 중요시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진실되게 살고자 투쟁합니다. 과거에는 죄를 즐기는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는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신자의 생활은 순수하고 진실되고 근검 절약하게 되어 건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건전한 삶을 살 때 자연히 건전한 가정을 이루게 되고, 건전한 가정안에 자녀들도 건전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게 될 때 행복의 기초를 쌓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경계해야 합니다(15-17). 우리 믿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기에 힘써야 합니다. 15-17절에는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아 경계해야 할 것들이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자가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15절에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자가 없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무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교만하여 못쓰게 된 자들을 살펴보면 구원의 은혜를 상실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를 새롭게 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쓸모없는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나를 구원하시고 생명의 길을 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받게 하시는가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시시때때로 이 구원의 은혜를 상기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 바울이 구원의 은혜를 굳게 붙들었을 때 그의 심정에는 늘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쳐서 복음역사를 힘있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마음에 쓴뿌리가 나서 자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쓴뿌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쓴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명기 29:18,19절은 쓴뿌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쓴뿌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할 때 생겨납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해 쓴뿌리가 생긴 것은 그가 예수님 보다도 돈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쓴뿌리는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불평 불만을 일삼을 때 생겨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새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험한 광야 생활을 하게 되자 노예근성이 발동하여 틈만 나면 지도자 모세를 불신하고 원망하고 대적하고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기가 먹고 싶으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하였고, 물이 없으면 우리로 하여금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불평하였고, 길이 험하면 길이 험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자신을 향함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출 16:8). 이를 볼 때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쓴뿌리를 품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해 쓴뿌리를 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때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베푼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좋지 못한 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방이 나에게 아홉가지의 은혜를 베풀어도 한가지 잘못하게 되면 잘못한 그 한가지로 인해 마음에 섭섭한 감정을 품고 두고 두고 기억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베푼 은혜는 잘 까먹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한 것은 결코 까먹는 법이 없이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상대방에게 쓴뿌리를 품게 되면 그것이 내 마음에서 점점 자라게 되어 나를 괴롭히고 못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상대방에 대해서 미운감정이나 불신을 품게 되면 마음에 평안을 상실하게 되고 심령이 황폐하게 되어버리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회자는 신학교 다닐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1학점이 모자라서 한학기를 더 다녀야 되고 힘든 대학원에 합격한 것도 취소될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님에게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였으나 그 교수님은 냉정하게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한이 되어 근 10년 동안이나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생활에 큰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아홉가지를 잘못하고 한가지 은혜를 베풀었다면 나에게 잘못한 아홉가지는 다 잊어버리고 받은 바 한가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입니다.
불평, 불만, 불신, 미움의 감정, 증오심, 시기심, 분냄은 육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이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쓴뿌리로서 독소를 지니고 있고 또 전염성이 있어서 신앙 공동체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파괴시키게 됩니다. 적은 누룩이 순식간에 온덩이에 퍼지듯이 불평, 불만, 불신, 증오심과 시기심은 순식간에 퍼져서 모임을 파괴시키게 됩니다. 속담에 “진실이란 가치가 신발도 신기 전에 거짓말은 세계를 반바퀴나 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때문에 “진실이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찾기도 전에 거짓말이 세계를 두바퀴나 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지 못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모임을 오염시키고 파괴시키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은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기 보다 좋지 못한 이야기 듣기를 더 좋아하는 묘한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좋은 행동을 본받기에 힘쓰기 보다 나쁜 행동에 영향을 잘 받아 쉽게 물들어 버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쓴뿌리를 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신앙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쓴뿌리가 나서 자라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에 쓴뿌리가 생기면 생기는 즉시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감사함이 없고 불평 불만을 일삼는 자를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하지 않고 불평 불만을 일삼았을 때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광야에 다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가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음행하는 자는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4b절을 보면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망령된 자는 어떤 자를 말합니까? 저자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어떤 흉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 장자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을 가볍게 다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겼습니다. 이삭으로부터 물려받을 장자권은 보통 장자권과는 달리 그 씨에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자의 명분보다 우선 배고픈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생각하고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창 25:32-34). 에서가 영적인 축복을 가볍게 여긴 것이 바로 망령된 일이었습니다.
그가 영적인 것을 가볍게 여긴 결과 나중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였으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축복을 빼앗긴 것을 비통해 하는 회한의 눈물이요, 죄의 결과로 고통을 되씹는 후회의 눈물이었습니다. 그가 찾고 있었던 회개는 그 자신의 회개가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회개였습니다. 에서는 비통하게 울면서 그의 아버지의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애썼으나 그의 아버지의 마음을 변경시킬 수 없었습니다. 때는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에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고 자신들의 장자권을 경시하는 실리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세상은 온통 에서족속들로 가득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나는 먹고 살기에 너무 바빠서, 영적인 일을 할 시간이 없어,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이야”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런 자들은 마음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영영히 하나님께 버린 바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기회가 늦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영적인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가 예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곧 빛의 세계, 소망의 세계, 은총의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II.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 (18-29)
저자는 옛언약을 대표하는 시내산과 새언약을 대표하는 시온산을 대조함으로써 히브리 크리스천들이 받은 바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며, 또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내산과 시온산(18-24).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후 시내산으로 인도하사 그들에게 두신 크신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시내산에 강림하사 모세를 통하여 거룩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장면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백성들로 하여금 옷을 빨고 성결케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내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하였습니다. 만일 산을 범하는 자는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즉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제 삼일 아침에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우르릉 쾅쾅! 번쩍! 번쩍! 하며 우뢰와 번개가 온 산을 진동하고 심히 큰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후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더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너무 두려워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간청했습니다. 모세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많은 인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 놓여 있어서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도 없고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시내산은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시온산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22절에서 “너희가 시온산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언약하에 들어오게 되었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시온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천만천사들과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가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장자들은 믿음으로 산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총회는 헬라어로 ‘파네기리스’(παν?γυρι )로서 ‘축제모임(festal gathering)’을 의미합니다.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란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성도들의 영으로서 예수님의 완전 속죄로 온전케 된 자들입니다. 시온산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새언약의 중보자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온전한 화목제물이 되시고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입니다. 아벨의 피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수 갚아 주기를 호소하는 피이지만, 예수님의 피는 죄를 없이할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죄인들을 대속하는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 화해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 인간들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19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해결되지 아니할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해결되지 아니할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때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하늘나라의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 때 우리 영혼은 기쁨으로 뛰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하고 시온산에 이르러 축복된 생명 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내산은 공포 분위기였지만 시온산은 화해와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시내산은 접근하면 죽었지만 시온산은 믿음으로 접근하면 환영받고 살게 됩니다. 시내산은 두려움의 장소였지만 시온산은 은총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시온산에 이르러 이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시온산에 들어가 생명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왜 다시 공포의 시내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자(25-29). 2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땅에서 경고하셨다는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경고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불순종함으로써 광야에 모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신 복음을 불순종하게 되면 그 형벌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소리로 인하여 땅만 진동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한번 땅 뿐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이라는 말씀은 ‘단번에,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는 하늘과 땅이 다 진동하게 됩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흔들려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영원할 것 같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도 빛을 내지 않게 되고, 하늘의 무수한 별들도 가을 낙엽과 같이 우수수 떨어지게 되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됩니다(막 13:24). 이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흔들리는 것은 진동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존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리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건설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 저자도 102:25-27절에서 이 사실을 잘 묘사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다니엘서 2:44절도 이를 잘 증거해 줍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는 것은 세상에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해 줍니다. 과거 사람들은 부동산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동산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동산을 의지하게 되면 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돈을 의지하고 특히 달라를 의지하고 세상권세와 지위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과 보장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하게 될 때 결국에는 영원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의지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동치 못할 하나님의 나라를 받은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첫째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은혜를 받자”는 말씀은 “감사를 드리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매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아무리 해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좀 힘들다고 해서 불평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사단이 내 마음에 역사하게 되어 사단의 종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할지라도 감사제목을 찾아서 감사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역경이 은총으로 바뀌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둘째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만족이나 자기 행복을 위해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그 영혼에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현대인들이 온갖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 헛된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조차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자행자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로부터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날도 당신을 진실되게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한이 없으셔서 진실되게 회개하는 자에게는 그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지만,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의 칼을 갈고 계시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넘치도록 축복하실 것입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무엇보다도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