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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5(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요한복음 제 1 강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말씀: 요한복음 1:1-5
요절: 요한복음 1:4

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1,2)
1. 태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1a)? 여기서 ‘태초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참조. 창1:1)

2. 말씀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1b,2)? 이 말씀은 곧 누구를 가리킵니까(14)?

Ⅱ. 예수님은 창조주시다(3)
1. 만물을 존재케 한 ‘제일 원인’이 무엇입니까(3a)?(시33:6) 여기서 ‘만물’은 무엇을 가리 킵니까?(골1:16) 저자는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습니까(3b)?

2. 인간과 만물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엡2:10, 시19:1)

Ⅲ.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4,5)
1. 생명의 근원이 누구입니까(4a)? 이 생명은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4b)?(요1서 1:1-3, 5:11)

2. 5절에서 어두움은 무엇을 가리킵니까?(엡6:12, 요8:12) 어두움이 왜 빛을 깨닫지 못하 고 또 이길 수 없습니까?




Message


요한복음 제 1 강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말씀: 요한복음 1:1-5
요절: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은 생명(Life)과 빛(Light)과 사랑(Love)으로 가득 찬 복음서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공부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과 참 빛과 진정한 사랑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자는 20:31절에서 이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저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8절은 요한복음의 서론으로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18절은 중요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한번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1:1-5, 1:6-18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1:1-5절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1,2). 둘째, 예수님은 창조주시다(3). 셋째,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4,5).

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1,2)

성경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인 4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같은 견해에서 보았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보았고, 마가는 예수님을 섬기는 종으로 보았으며, 누가는 예수님을 역사적인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는 데서 시작하지만, 예수님에 관해서 사실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 본 후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대전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신가를 설명해 나갑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특수한 관점에서 보았다고 하여 특수복음이라고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 1:1절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절의 ‘태초’는 우주가 창조된 시간의 출발점이라면, 요한복음 1:1절의 ‘태초’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λογο ) 인데 이는 이성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태초에 만물을 존재케 하고 지배하는 ‘이성적 원리’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격적인 실체가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말씀을 단순한 소리로 보지 않고 능력과 지혜를 가진 인격체로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곧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시편 33:6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자 요한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생각한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Word)은 대문자로써 인격화 되었고, 2절에서는 ‘그’(He)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고, 14절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2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여기서 저자는 ‘말씀’ - ‘하나님’ - ‘그’라는 삼단논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바로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생각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1절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말씀이 성부 하나님과 구별된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함께’라는 단어는 동등, 연합, 구별된 다른 주체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어디로 ‘향하여’(toward)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고 또 하나의 구별된 다른 주체로서 연합되어 있지만 성부 하나님과의 영적 질서를 지키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요17:5). 2절에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뜻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속성을 다 가지고 계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빛과 지혜와 사랑과 공의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Ⅱ. 예수님은 창조주시다(3)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말해 줍니다. 히브리서 1:2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 되는 찬란한 빛이 생겨 났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 계시록 19:13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였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저자는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물은 보이는 현상 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계도 다 포함합니다. 골로새서 1:16절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존재케 된 피조물이 아니라 존재케 하시는 창조주가 되십니다.

인간은 하늘을 나르는 점보 비행기를 만들고, 로켓트를 만들어 우주에 발사합니다. 또한 노트북만한 컴퓨터를 만들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저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에서는 아무 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창조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창조라는 단어인 ‘바라’(to create)는 하나님께만 사용 되었고, 인간이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다고 할 때는 ‘아사’(to make)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높고 푸른 하늘, 망망한 대해, 찬란한 태양, 각종 진기한 동식물들, 만물의 영장 인간, 이 모든 것을 다 창조주되신 예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만물을 존재케 한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생명체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 깊은 사색을 했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만물을 존재케 한 제일 원인을 물, 불, 공기 또는 ‘그 무엇’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다윈과 같이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아메바가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메바에서 점점 진화하여 원숭이가 되고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원숭이나 아메바의 수준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그들은 무생물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는 인간으로 발전했는가 설명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공기나 물이나 아메바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절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존재케 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시다” 이 한마디 말씀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해 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창조 신앙을 거부하고 “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나의 조상은 원숭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는 우연의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의 인생은 어쩌다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되어 그럭저럭 한 세상 살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끼리 우연히 만나 결혼하며 또 우연히 자식들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우연의 존재가 될 때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허무해집니다. 우리는 그 어디서도 인생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운명주의에 빠져 신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유명 인사나 부자가 됨으로써 운명주의를 극복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결코 운명주의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뜻과 목적 가운데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그 기쁘신 뜻을 따라 나를 창조하셨음을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하여 인생의 절대적인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복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확신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 사도 바울은 엡2:10절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일생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것입니까? 이는 오직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창조 신앙으로 우리는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 만물의 존재 의미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강으로 가서 “한강아! 너는 왜 흐르느냐?”고 묻는다면 한강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무슨 소리하고 있는거야? 하나님께서 ‘흐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흐르는 거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파아란 하늘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시편 19:1절은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영접할 때 나의 인생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이 다 오묘한 하나님의 뜻이 있게 됩니다. 3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Ⅲ.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4,5)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4a)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말해 줍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왔습니다. 새봄이 되면 죽은 듯한 나무 가지에서 모든 잎들과 꽃들이 파릇파릇 새싹을 냅니다. 어떻게 이렇게 새싹을 내는 것입니까? 이는 그 나무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생각하고 일하고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생명이 우리에게서 끊어지면 일순간에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시체가 되어사랑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 생명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오지 물질적인 것에서 결코 생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생명은 한 생명의 근원에서 나왔음을 증거해 줍니다. 많은 학자들이 생명의 기구나 생명의 현상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생명의 기원이나 본질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을 헤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1:4a)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엄숙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생명을 나타내는 단어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나타내는 비오스(βιοσ)와 정신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퓨시케(ψυχη)와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을 나타내는 조에(ζωη)가 있습니다. 요한 1:4a절에 나오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의미합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양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에는 반드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영생은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1서 5:11,12절은 말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풀장이 딸린 아름다운 저택과 멋있는 차와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세, 부와 명예 등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세상에서 소유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생명이 내 속에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요 행복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내 생명 뿐만 아니라 부모의 생명, 자식의 생명도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귀한 생명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주인이신 예수님께 돌려 주어야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생명이 자기 것인양 착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잃지 않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합니다. 이런 자들은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늘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들은 부모님과 자식들에 대해서 늘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나 긍극적으로는 그들의 생명에 대해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자식들의 생명과 부모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그 생명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합니까? 4b절을 보십시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어두움을 헤매는 사람과 같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허무와 운명주의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또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고상하게 사는 자라 할지라도 빛이 필요합니다. 괴테는 죽을 때 “나에게 빛을!”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길을 밝혀 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가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허무와 무기력과 절망 대신에 의미와 생명력과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고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마치 꽃병의 꽃과 같습니다. 꽃병의 꽃은 생명이 있지만 점점 시들다가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이 죽을 생명이 살아 나기 위해서는 영생의 나무가 되시는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어두움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어두움은 죄와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타락한 인류를 가리킵니다. 어두움은 속성상 빛을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어두움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빛되신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서 마치 온통 어두움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반면 빛은 어두움의 세력 앞에 깜박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결코 빛되신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승리를 주십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께서 한 분 한 분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