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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으뜸이 되신 그리스도

by Mark Yang   06/26/2022  

Message


골로새서 제 2강

만물의 으뜸이 되신 그리스도

■ 말씀 :골로새서 1:15-29

■ 요절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기독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동기가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사람들이 좋아서 믿는다거나, 내가 존경하는 분이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다거나, 부모님이 믿기 때문에 믿는다거나, 모임의 분위기가 좋아서 믿는다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모임에 열심히 잘 나오다가 힘든 일이 생기거나 손해 볼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미련 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있는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본문이 나오게 된 사상적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골로새는 소아시아에서 수리아로 가는 중요 무역로상에 위치한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서 많은 상인들과 여행객들의 출입으로 인해 각종 철학과 종교 사상이 혼합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는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루었던 헬레니즘의 계승자였습니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문화적으로 헬라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가정교사도 헬라인들을 구했고, 유학도 헬라로 보냈습니다. 헬레니즘은 로마가 지중해 연안에 이루어 놓은 광대한 제국에 헬라인들과 동양인들의 인종적 혼합과 헬라 사상과 동양의 문화와 종교를 융합시켜 이루고자 했던 혼합문화를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떠돌이 철학자들이 상인이나 노예들, 그리고 군인들과 더불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면서 자기들의 철학사상, 관습, 종교들을 전파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서로 뒤섞여 문화적, 종교적 혼합주의가 팽배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적 배경 가운데서 골로새 교회에 이단 사상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단들은 기독교가 너무 단순한 것에 불만이었습니다. 사실 복음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로마서 10:9절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니리”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롬 10:12,13).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진리는 단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어리석고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고 복잡한 것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상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로 복잡하게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에 신비한 무엇이라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미혹을 받게 됩니다. 이단들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그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보자요 구주가 아니라 여러 중보자 중의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당시 유행하는 헬라 철학과 유대 율법과 동방의 신비주의와 혼합하여 혼합주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유일성과 완전성에 대해 공격한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완전성과 충족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계열 중의 하나도 아니고, 다수 중의 하나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분도 아니고, 온전한 독자적인 분이요,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함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유일하고 완전하고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유일하시고 완전하시고 절대적인 구주가 되심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유일하시고 완전하시고 절대적인 구주가 되십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15a), 그리스도와 만물(15b-17), 그리스도와 교회(18-23)와의 관계를 기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15a).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것입니다. 형상은 영어로는 이미지(image), 헬라어로는 에이콘(εἰκών)으로 이는 본래의 모양인 원형(prototype)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는 ‘본체’ 곧 ‘모르페’(μορφὴ)라고 하였는데 이는 변할 수 없는 본질적 형체(essential form)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또 요한복음 1: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빛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또 보면 죽습니다. 디모데전서 6:15,16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육신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는 일반계시가 있고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만드신 만물에 나타난 자연계시와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내재적 욕구를 말합니다. 이런 일반계시를 통하여서는 아주 희미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신성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달을 보면서 신성을 느끼고 달을 신으로 삼아 섬깁니다. 썩은 고목나무를 보고 새벽부터 정화수를 떠놓고 정성스레 소원을 아룁니다. 그런데 그 고목나무는 해결해 줄 능력이 없어서 고민 고민하다가 속이 다 썩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God made Him small.’ ‘하나님께서 당신을 작게 만드시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크고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번은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신 완전한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부인하면 이단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십니다(15b-17).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듯이, 우주 만물도 그리스도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15b-17절은 예수님은 만물과의 관계에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말해 줍니다. 15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하신 것은 시간적으로 첫째라는 뜻이 아니라 존재에 있어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구절로 인하여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주후 4세기 초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논쟁은 유명합니다. 여기서 325년에 유명한 니케아 신조가 나왔습니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무에서 창조된 존재로서 성부와는 다른 본질을 가졌으며 성부와 동등한 본질을 지닌 존재가 아니고 영원한 존재도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정죄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등하며 동등하게 영원하며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나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불변하신 이에게서 영원하고 불변하신 분이 나신 것입니다. ‘먼저 난 자’란 ‘우두머리’, ‘장자’, ‘상속자’, ‘주’의 비유적인 대명사로서 메시야의 칭호를 말합니다(시 89:27). ‘그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난 자’란 만물의 창조의 원인 곧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가 되십니다.

16절은 창조의 범위와 방법과 목적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주 만물은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특별한 목적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설명하고자 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 해지고 혼돈과 공허로 가득차게 되며 그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왜 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비롯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을 때 모든 것이 의미가 있게 되고 분명해집니다. 그때 나의 삶에는 질서가 생기고 생명의 빛이 약동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 곧 물질계가 창조되었고, 보이지 않는 것들 곧 영계가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보좌들, 주관자들, 정사들, 권세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천사들의 이름으로서 천사들은 피조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창조의 방법인 동시에 목적이 되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목적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17절은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섭리를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곧 자리를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유지시키시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창조의 시작이요 마지막이요 창조한 모든 것을 유지하시는 보존자가 되십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막을 수 없는 상승적 발전을 통하여 인간의 신격화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세상은 점점 악해 지고 있으며, 인간은 점점 더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국적인 지향점은 인간의 신격화가 아니라 모든 것을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세우실 것입니다. 로마서 11:36절은 말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예수님만이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시고 절대적인 구주가 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18). 18절은 교회와의 관계를 기초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주가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여기서 교회는 지역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믿는 자들을 총칭하는 우주적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머리와 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요 생명의 관계입니다. 손과 발은 잘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머리를 자르면 죽습니다. 머리는 몸의 모든 것을 지시합니다. 몸은 머리가 지시하는 데로 움직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라서 그 생명력을 공급 받아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교회는 좋은 일하고 구제 사업하고 친교를 나누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제를 하지만 구제기관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지만 자선 기관이 아닙니다. 봉사를 하지만 봉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친교가 교회는 아닙니다. 외국에 있는 많은 한인교회를 보면 외국에서의 삶이 외로우니까 한국 사람들이 모여 교제를 나누고 정보도 나누고 김치도 얻어먹기 위해 다니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이루어지는 친교를 중히 여기면서 그리스도가 빠진 친교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바른 정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는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존재케 하신 창조주로서 모든 것의 원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최초로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였지만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서 부활했다기 보다는 소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잃었던 생명을 되찾았지만 그 생명은 죽기 전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상 생활은 연기되었지만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산 것이 아니고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6:9절은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7b,18)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권세를 파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한 부활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자보다 먼저 난 자’란 시간적으로 먼저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차 있게 될 부활의 동인이요 패턴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분이 되시며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다시는 죽음이 지배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 붙어 있는 모든 자들의 부활을 보증해 줍니다(고전 15:20-23).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앞으로 올 수많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목적은 만물의 으뜸이 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만물의 으뜸은 'supreme Lordship' 곧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엡 1:20-23).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 것은 봐 주어서 된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실력으로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교회의 전 사상과 전 신앙과 전 경험의 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영웅이나 과거의 창설자가 아니십니다.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항상 현재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 어느 때든지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19). 1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이 말씀은 만물의 으뜸이 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충만은 완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분이 아니라 아무 부족한 것이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단들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그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9,10절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증거한 후에(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요 1:16)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도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무엇인가 2% 부족한 것을 느끼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원하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음으로써 부족함을 채우고자 합니다. 또한 연애를 하거나 음란물을 통해서, 게임이나 영화나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을 통해서 부족함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죄를 짓고 죄의식과 공허함에 시달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2% 부족한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또한 배고픈 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생각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을 능히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어디서도 마음에 공허함과 부족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맵니다. 이해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것으로 마음이 슬프고 괴로워서 남몰래 웁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나를 깊이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깊이 이해하시고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나아가 깊은 이해와 무한한 사랑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만이 참된 마음의 쉼과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만이 참된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5:1,2).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이해와 사랑과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이십니다(20-23). 20-23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역사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의 관계는 완전한 조화와 질서 가운데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조금의 불협화음이나 무질서나 혼란이 없는 완전한 낙원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세우신 완전한 조화와 질서 속에서 무한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조화와 질서가 무너지고 동시에 행복과 자유도 사라졌습니다. 죄가 모든 관계성을 파괴하고 행복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죄로 인해 인간 상호간에도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기보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복수심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화해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원하신 것은 죄로 인해 멸망해 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인간과 화목케 하신 것만이 아니라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 곧 우주 만물이 다 자기와 화목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무너진 만유의 질서를 회복시키심으로 만유의 주가 되고자 하신 것입니다.

화해의 방법은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심으로 하나님과 만물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화해의 매개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게 됩니다.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됩니다. 이로써 우주적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21-23절은 화목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우리는 과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는 놀라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후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성결한 몸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실수가 많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되고자 애를 써도 지내놓고 보면 허물과 실수투성이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흐른다고 우리의 죄가 씻겨지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선행이 죄를 덮지도 못합니다. 이는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고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24-29절에서는 바울이 복음의 일군으로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했습니다(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을 말할까요? 만일 바울이 그 고난을 채워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난은 온전치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대속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고난을 100%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유일무이한 것으로써 어느 누구도 관여할 수 없고 조금도 보탤 것도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반면에 두 번째 고난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고난을 말합니다. 이 고난은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함께 나누어야 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34). 바울은 바로 이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고난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을 위해 마음을 졸이며 애타하고 또 물질과 시간과 청춘을 희생하면서 양들을 섬길 때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양들이 말을 잘 듣고 잘 따라 주면 그래도 괜찮은데 말도 안 듣고 속만 썩일 때 힘든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에 힘썼습니다(25-29). 바울이 교회 일군이 되어 고난을 받는 것은 교회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25).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26).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로서 영광의 소망입니다(27).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는 목적은 자기 사람을 만들고자 하거나 단체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28). 그는 이를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힘을 덧입고 이 일을 감당하였습니다(29).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존재케 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신 분으로서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만물의 으뜸이 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분이 아니라 아무 부족한 것이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무너진 만유의 질서를 회복시키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만이 유일하시고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절대적인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에서 만족과 기쁨을 구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뿐만 아니라 결혼생활, 자녀양육, 돈버는 것, 쇼핑하는 것,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 권세를 부리는 것 등에서 만족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하고 또 죽음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립니다. 인생을 결산하는 최후의 날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날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만족과 기쁨이 되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만족과 기쁨을 구하고자 했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함으로 진정으로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