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의 혼인 잔치
요한계시록 19:1-21
요절: 19:7
4-5장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을 경배하는 하늘의 예배 장면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일곱 인과 함께 두루마리를 열고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6-18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과 그리스도의 승리가 일곱 시리즈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인, 나팔, 대접, 천사,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19장에서는 짐승을 이긴 어린 양의 혼인 찬치로 하늘의 예배가 최고조에 이릅니다.
1. 요한은 무엇을 들었습니까 (1)? “할렐루야”가 몇번 반복되며, 이것의 중요성이 무엇입니까 (1-8)? 첫 번 할렐루야는 왜 선포됩니까 (1-2)? 세번 째, 네번 째 할렐루야는 첫 번 할렐루야를 어떻게 지지합니까 (3-4)?
2. 보좌로부터 어떤 음성이 나왔으며, 누구에게 말했습니까 (5)? 네번 째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임을 말해 줍니까 (6-8)?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9)? 천사는 요한이 하나님 만을 경배하도록 어떻게 도와 주었습니까 (10)?
3. 요한은 어떤 사람을 보았습니까 (11-16)? 그의 이름들은 무엇이며, 각 이름이 영적 전쟁과 주권적 통치에 관해 함축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누가 그를 따릅니까?
4. 천사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을 선포했습니까 (17-18)? 누가 전쟁에서 이겼습니까 (19-21)? 그 결과를 아는 것이 고통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격려가 됩니까?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요한계시록 19:1-21
요절: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19장에서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17-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공부했을 때, 이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긴 하지만 무거운 마음의 감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즐거운 기대로 가득하게 해 줍니다. 이는 어린 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항상 신나고 즐거운 행사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침통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웃으며 가장 좋은 옷을 입습니다. 특히 신부는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습니다. 신부의 얼굴은 광채가 나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이 혼인은 어린 양의 혼인이기 때문에 가장 즐겁고 가장 성대한 잔치입니다. 어린 양과 신부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비유합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친밀한 연합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이 본문에 유일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몰락은 우리의 축하로 시작되지만, 행사의 절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쁨의 참된 근원입니다. 이 시간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19:1-6절은 3중의 “할렐루야”와 함께 바벨론의 몰락을 축하합니다. 7-10절은 어린 양의 혼인예식에 대한 선포입니다. 11-21절은 그리스도는 왕의 왕, 주의 주로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완전하고도 영원히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 묘사합니다. 이 환상의 절정은 어린 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늘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통치를 찬양함 (1-6). 1-6절에서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네번 나오는데, 1-5절에는 바벨론 멸망에 대해 3중의 “할렐루야”가 나오고, 6절에서는 “할렐루야”가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요한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환상을 본 후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1a). 그 소리는 모든 나라에서부터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의 대합창이었습니다. 이 큰 음성은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울려퍼졌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1b-2). “할렐루야”는 히브리어의 “할랄”(halal)의 음역으로 “찬양”이란 뜻이고,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Yahweh)의 첫 음절인 “야”(yah)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이곳에 유일하게 나옵니다.1 그들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구원” (헬라어 sōtēria)이라는 단어는 노예가 해방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노예는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은 사탄의 세계 제도를 상징하는데, 철권 통치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예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힘으로 사악하고 포악한 바벨론을 멸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불공정하고 임의대로 하신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군대에서 “아군의 포격(friendly fire)”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우발적으로 아군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아군의 포격”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원수들만이 멸망당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고 그의 심판은 완벽합니다.
2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양면성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셨습니다. “더럽게 하다”는 말은 누군가를 정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타락하게 한다는 뜻으로 일종의 도덕적 붕괴를 말합니다. 바벨론의 교활한 영향력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타락의 소굴이 되게 하여 사람과 자연을 망가뜨렸습니다. 바벨론의 사악하고 빗나간 흉계는 전 세계를 미혹시켰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끔찍한 범죄입니다. 이 범죄는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의가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두려운 원수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다른 측면은 그의 종들의 피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박해를 받고 심지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대주재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 심판이 없다면 믿는 자들은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외친 두 번째 할렐루야는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말과 함께 울려퍼졌습니다(3).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묘사할 때 사용된 언어와 같습니다(창 19:28). 이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최종적이고 영원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더 이상의 반역이나 거짓 종교나 부당함이나 불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제 2의 홀로코스트(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같이, 이런 악한 제도가 다시 부활한다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종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할렐루야는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들은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4). 우리가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보좌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틀림없이 구원과 심판을 집행하시는 곳입니다. 이십사 장로들과 네 생물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천사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아멘”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후에 보좌에서 한 음성이 나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5). 이 음성은 하나님의 종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는 음성이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찬양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습니다. 그후에 요한은 허다한 무리가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을 들었는데, 그 음성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천사들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은 생동감 있고 시원한 많은 물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또한 그 음성은 매우 강하고 강력한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 사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세계 종교제도와 적그리스도 제국을 통해 이 세상의 왕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그는 많은 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었지만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만물에 대한 그의 합법적 통치를 회복하셨습니다. 사탄이 통치하는 곳은 지옥이지만, 하나님은 통치하시는 곳은 낙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피조물에게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둘째, 어린 양의 혼인잔치(7-10). 4-5장에서와 같이, 이제 찬양의 초점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어린 양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자”라는 말을 들을 때 이에 반응하는 것이 힘들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고달프고, 특히 요즈음 같은 시대처럼 우울함과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즐거워합시다”라고 말하면 “당신 미쳤어?”라고 쏘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신부가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통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양”이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계시록에 27번이나 나옵니다. 어린 양에 관한 중요한 특징들이 몇가지로 묘사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린 양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5:5; 7:14; 12:11; 13:8).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창조주시며, 영화로우신 분이시고, 경외심을 갖게하는 놀라운 분이시며,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방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종류의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선한 목자로서 그들을 돌보셨습니다(7:17).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피를 흘리며,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셨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어린 양은 가장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겸손하시고, 희생적인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는 전능하시고 승리를 거두는 분이시며 위엄이 있으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어린 양의 혼인을 준비하십니다. 이는 보통 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영원한 연합을 축하하는 특별한 혼인입니다.
우리는 신랑을 만났습니다. 이제 신부를 만납시다. 신랑이 준비가 되었을 때 신부도 또한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인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신부는 신랑에게 자신을 드릴 준비를 합니다. 첫째로, 신부는 자신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님께 신실하게 충성한 것을 의미합니다(2:10,13; 13:10; 14:12; 17:14). 신부는 죄악된 문화와 타협하지 않았고, 박해를 두려워하여 굴복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는 환난을 견뎠고, 죽기까지 예수님께 충성했습니다. 신부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둘째로, 신부에게 아름다운 옷이 입혀집니다. 8a절은 말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신부들은 “드레스가 가장 중요하지”라고 말하는데 이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의 혼인 예복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 세마포는 강하고 흡수성이 뛰어나고 빨리 마릅니다. 그것은 비싸고 아릅답습니다. 그러나 이 옷은 단순히 천으로 된 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의로운 행동을 말합니다(8b). 이 의는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예식 때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완전함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신자들은 죄의 본성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교만과 정욕, 욕심과 시기심과 이기심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서 우리를 어둡게 하고 추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어느 정도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소욕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고전 15:42-44). 예수님은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엡 5:27).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입니다. 혼인예식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고전 13:12). 우리는 주의 임재의 충만함으로 영원히 연합한 가운데서 그 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관계성은 가상적입니다. 우리가 요즈음 비디오 컨퍼러스를 통해 친구나 가족이나 동료를 만나는 것처럼, 그 분의 편지, 곧 성경을 통해 만나고, 전화, 곧 기도를 통해 만납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히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면서 그분을 완전히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혼인은 영원한 낙원의 시작입니다. 이 축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입니다.
많은 여자들은 인생의 최고 순간들 가운데 결혼식이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결혼을 마음과 힘을 다하여 준비하고, 돈을 모으고, 최고의 잔치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한 후 자녀가 태어나면서 인생은 수고스러워지고 신부는 점점 흰 머리가 늘어나고 주름이 생기고 관절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여자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면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신랑이신 어린 양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드릴 영광스러운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빛나고 눈부시며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흠도 없고 질병도 없고 노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젊고 생동감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친밀한 관계성 속에서 영원히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입니다. 이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의 약속을 능히 지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입니다!
7-8절이 교회 전체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9절은 믿는 개개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천사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9a). 이 축복은 미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초청을 받는 순간부터 누리게 되는 축복입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행복하고, 즐겁고, 만족스럽고, 성취된다는 의미입니다. “청함을 받다”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할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혼인예식에는 초청 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만이 그곳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이 초청은 아무 값없이 주어지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가장 즐겁고 멋진 져녁 식사를 즐길 것입니다. 이 초청을 받은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가 하신 말씀을 이루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9b). 당신은 믿음으로 그 초청에 응답하셨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가장 복받은 자요 특권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행한 일 때문에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기쁘고 즐겁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 천사는 너무 눈이 부시고, 거룩하고 강력하여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요한은 즉시 “삼가 그리하지 말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나 천사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데 함께 종된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종들,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마음이 끌려서는 안됩니다. 예언의 영이 예수님께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10).
셋째, 백마를 탄 자(11-21). 이 본문에서 환상은 어린 양의 혼인에서 세상을 정복할 왕께로 다시 한 번 전환됩니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4:1절에는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났고, 11:19절에는 하나님의 성전과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이제 1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탄 자, 즉 세상을 정복할 왕으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나귀의 새끼를 타신 겸손한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분은 권세와 승리를 상징하는 백마를 타십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이름을 갖고 계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충신과 진실”입니다. 이는 1:5절에서 “충성된 증인”이라고 한 것과, 3:14절에서 “충성되고 참 된 증인”이라고 불리우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이름들은 박해를 받지만, 그의 이름을 증언하는 그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2:13; 11:3). 그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십니다(11b). 불꽃 같은 그리스도의 눈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판단하심을 말해 줍니다. 그 머리에 많은 관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왕권을 가리킵니다(12a).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는데 이는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12b). 이 점에서 그 분은 기묘자, 곧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삿 13:18).
1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암시해 줍니다. 그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원수들과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하시고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전사로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4-16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입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이 왕을 따릅니다(14a). 그의 백성들은 반역한 나라들을 대항하여 전투에 참여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또한 그의 백성들은 백마를 타고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14b). 그리스도의 입에서 예리한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서 그것으로 만국을 치십니다(15a; 딤후 2:8). 그는 시편 2:9절에 예언된 것처럼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철장은 원수를 멸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습니다(15b).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는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습니다(16). 그는 모든 원수들을 이기는 만유의 주권자이십니다.
17-18절은 하나님의 큰 잔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와 대조를 이룹니다. 요한은 한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함을 나타내는 태양 안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천사는 모든 새들을 맛있는 식사에 불렀습니다. 그 메뉴는 왕들과 장군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과, 자유인이나 종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이 될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잔치입니다. 이 사람들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한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19-21절은 16:16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아마겟돈에서의 최후의 전투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킵니다(19). 그러나 짐승이 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습니다(20a). 악의 세력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 전투는 서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순간에 전투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는데 이는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20b). 거기서 그들은 영원토록 고통할 것입니다. 반란군의 나머지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의 살은 모든 새들을 위한 최고의 음식이 됩니다(21). 이는 소름끼치는 장면이지만 그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악은 반드시 멸망되어야 하는데 이는 정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순결함을 위한 것입니다. 악과 부정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더 이상 악한 사람은 없을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좋은 소식을 듣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과 사악한 책략과 같이 말세의 징조들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우리는 매일 사람들이 죽어가는 슬프고 비통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장래에 대해 걱정합니다. 우리는 늙어감에 따라 질병과 우울증으로 인해 고통하고 자녀들과 손주들에 대해 걱정합니다. 우리가 현실을 볼 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어린 양의 정결하고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 그리스도와 친밀하고 영원한 관계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활기차고, 젊고, 생동감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한국어 개역개정에는 시편에서 “할렐루야”가 나오는데 (146:1,10...150:1,6 등) 이는 같은 의미인 “Praise the Lord!”를 번역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