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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25(예수님의 처음 표적)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요한복음 제 5 강

예수님의 처음 표적

말씀: 요한복음 2:1-25
요절: 요한복음 2:11

Ⅰ.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1-11)
1. 사흘되던 날 예수님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셨으며, 또 그곳에 누가 초청을 받았습니까(1,2)? 그곳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것은 무 슨 의미가 있을까요?
2. 그곳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까(3a)? 마리아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 까? 이런 마리아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3.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왜 이 문제에 상관하기를 원치 아 니하셨습니까(4)? 예수님의 때는 마리아의 때와 어떻게 다릅니까?(요7:6,8, 12:23, 17:1)
4. 마리아는 하인들을 어떻게 준비시켰습니까(5)?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5. 예수님은 바쁜 하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명령하셨습니까(6,7a)? 이 말씀은 어떤 점에서 순 종하기 힘듭니까? 그러나 하인들은 어느 정도까지 순종했습니까(7b)?
6.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얼마나 더 순종하기 힘든 명령을 하셨습니까(8a)? 그러나 그들은 어떻 게 했습니까(8b)?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을 통해 순종에 대해 무엇을 배웁니까?
7. 결국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9)?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 회장의 소감이 무엇입니까(10)? 이 사건을 통해 하인들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8. 처음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까(11)? 이를 통해 제자들의 내면에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Ⅱ.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25)
1. 예수님은 언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까(12,13)?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어떤 광경을 보 셨습니까(14)? 이때 예수님의 분노가 어떠했습니까(15,16)? 왜 이토록 분노하셨습니까(17)? 2.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이실 표적이 무엇입니까(18,19)?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20,21)?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전이 되셨습니까(22a)?(히9:11-14,10:20) 3. 제자들은 언제 예수님이 성전되심을 믿었습니까(22b)? 이들의 믿음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에게 왜 그 몸을 의탁지 아니하셨습니까(23-25)?


Message


요한복음 제 5 강


예수님의 처음 표적


말씀: 요한복음 2:1-16
요절: 요한복음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두 사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이 인생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임을 보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쓸모있는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변화의 능력자가 되심을 보여 줍니다. 두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의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사건은 메시야의 양면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Ⅰ.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1-11)

첫째,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1,2)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첫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로부터 사흘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라는 작은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미 그곳에 가 계시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혼인 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신 것은 예수님이 금욕주의자나 은둔주의자가 아니라 인생들과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식욕이 왕성하여 항상 배고픈 제자들은 잔치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생각을 하며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장막장인 안드레는 남은 음식을 가져오고자 비닐봉지를 준비하고 있었고, 빌립은 결혼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가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위가 커서 위대한 베드로는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생각하면서 벌써부터 입에서 군침이 돌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혼인 예식은 인생에서 가장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전통적으로 수요일에 시작해서 보통 1주일 간 계속되었습니다. 혼인 예식은 잔치가 시작되고 첫 날 저녁 늦게 거행되었습니다. 혼인 예식이 끝나면 신랑 신부는 횃불을 따라 신혼집으로 갔습니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은 신혼부부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축시를 낭독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신랑 신부는 오늘날과 같이 바로 신혼 여행을 가지 않고 일주일 동안 집에 거하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화관을 쓰고 보석으로 꾸민 화려한 옷을 입고 왕과 왕후와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슬픈 행사는 금지되고 금식과 같은 종교상의 의무도 면제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혼인 예식은 삶의 수고와 고뇌가 가득 찬 세상에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신랑 신부는 결혼을 해서 기쁘고 손님들은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어서 기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가운데 결혼을 창설하심으로써 인간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안에서의 결혼은 에덴 중의 에덴이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축복하시는 축복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젊은 청춘 남녀들은 결혼하고 싶어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때(3,4)
혼인 잔치집에 웃음꽃이 만발하고 기쁨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포도주가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상 외로 축하객이 많이 왔는지, 아니면 제자들이 너무 많이 마셨는지 포도주가 빨리 동이나 버렸습니다. 잔치 집에서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 때문에 필수적입니다(시104:15, 전10:19).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세상의 기쁨이나 쾌락이 다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기쁨이나 쾌락이 영원할 것처럼 즐기지만 반드시 끝이 날 때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짐으로써 혼인 잔치 집의 흥은 깨어지고 이로 인해 신랑 신부는 큰 수치를 당할 판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여자여” 이 말은 무례한 말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황후를 부를 때 사용하는 최고의 존경어였습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애굽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에 따라 움직이시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내 때”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때를 말합니다. “때”사상은 요한복음 저자가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7:6,8,30; 8:20; 12:4,23,27; 13:1; 17:1). 이 “때”는 십자가를 향하여 진행되고 예수님께서 인류 구속 역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시지 않고 늘 하나님의 때를 의식하며 행동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셨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때 인생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최선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해서 시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시간 계획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셋째, 마리아의 기도(3-5)
예수님께서 “내 때”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거절하는 듯한 대답을 하셨을 때 마리아는 화를 내며 토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기도의 단계를 배웁니다.

기도의 첫번째 단계: 마리아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 왔습니다. 사람들은 잔치집에서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인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잔치 집에 무엇이 부족한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문제를 발견했을 때 이를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에 주인의식이 있는 자는 어딜 가나 방관적인 자세나 비판적인 자세보다 역사의 주체자가 되어 부족한 것을 살피고 적극적으로 섬깁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준비성이 부족한 주인을 판단하며 잔소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히려 조용히 이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가서 아뢰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 기도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누구 때문인가를 따지고 서로를 비난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손님들은 주인이 포도주를 적게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주인을 비난합니다. 반면 주인은 손님들이 염치도 없이 포도주를 많이 마셨기 때문이라고 손님들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조용히 주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문제가 생기면 걱정하느라 주님께 들고 나가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보고자 애쓰다가 낙심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빠짐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됩니다. 그 때 주님께서 선하신 뜻대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발견하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이를 위해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종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물질적인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참된 영혼의 기쁨과 영혼의 안식이 없이 피곤하고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캠퍼스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말씀의 포도주, 복음의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두번째 단계: 마리아는 예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리아는 기도가 즉시 응답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거절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기 쉬웠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하며 원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의 때에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두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후 기도가 쉽게 응답되지 않으면 주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주님의 때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의 세번째 단계: 마리아는 역사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마리아는 때를 기다린다고 해서 막연히 앉아 있지만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역사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든 안되든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그 뜻대로 쓰실 수 있도록 하인들은 순종의 사람들로 준비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들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머리가 명석하고 능력이 많아도 반발하는 자나 불순종하는 자는 결코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순종하는 자를 귀하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사람을 키울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함을 배웁니다. 마리아가 하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 줄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 자신이 순종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눅1:38). 순종의 사람만이 순종의 사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이요, 기도의 여인이요, 순종의 여인이었습니다.

넷째, 하인들의 아름다운 순종(6-10)
예수님은 때가 되자 마리아의 간구를 들으시고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마침 그곳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습니다. 결례란 식사 전후와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손 발을 씻는 정결 예식을 말합니다(막7:3,4). 7a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 말씀은 문제해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주 엉뚱한 명령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실상은 문제 해결의 첩경이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때로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역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찌라도 이성과 경험의 세계를 뛰어넘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기 힘든 이유가 많습니다. 현재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기 때문에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 같이 보입니다. 또한 약 세 드럼통이나 되는 많은 양의 물을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서 채우려면 큰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잔치 집에서 하인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될지 모를 만큼 몹시 바쁩니다. 바쁜 때에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일을 시키면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디 불평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마리아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구까지 채우니” 라는 말씀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심정으로 순종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온 마음을 바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90% 순종하지 아니하고 120%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빈 심령에 1대1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라.”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이 말씀은 첫번째 명령보다 더 순종하기 힘듭니다. 여기에는 희생과 위험이 따릅니다. 손 씻는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다가는 태장을 맞을 일입니다. 이처럼 순종에는 불이익과 아픔과 오해와 희생과 위험이 따릅니다.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순종하는 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하인들은 이 번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종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을 낳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지쳐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튕기지 않았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한 후 순종하였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는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자신 하나도 잘 감당 못하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세계 선교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부족하지만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역사에 귀히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순종 문제는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로마서 5:19절은 말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불순종을 통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순종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인들의 순종은 예수님의 순종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순종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의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몇 번 해보고 잘 안되면 나는 체질적으로 순종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배워야 합니다. 히 5:8절은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우리가 영적 세계를 알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반드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은 하지 않으면서 변화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고 자학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사를 발하며 신랑을 불러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술에 물을 타서 낮은 것을 내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맛과 향기와 색깔에 있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도 안될 만큼 뛰어난 최상급 포도주였습니다. 이 포도주로 인해 잔치 집의 흥은 더욱 고조되고 사람들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회장과 신랑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순종을 통해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생수를 마시고 즐거워 했다면 하인들은 생수의 원천이 되는 샘을 발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하인들은 그 마음에 영생의 샘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쁨을 길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다섯째, 처음 표적의 의미(11)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처음 표적은 메시야 사역의 성격을 잘 말해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인생들을 축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에덴 동산을 만들어 주시고 또 결혼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낙원을 상실했습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은 참된 기쁨과 행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죽도록 수고하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표적을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행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생활을 심각하고 금욕적이고 하나도 재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변화되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하는 염려 때문에 변화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변화되면 육신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영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혼인 잔치 집에서 기뻐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 잔치와 같이 가장 기쁘고 축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가 되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물리적은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로서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포도주와 같이 쓸모있는 인생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부모가 자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제도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는 오직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외쳤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세상에는 이기적인 자, 교만한 자, 정욕적인 자, 무정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더러운 물입니다. 이런 자는 육신의 본성을 좇아 사는 변화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과 그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Ⅱ.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25)

때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해방 기념일입니다. 이 날은 전국 각지와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에수님과 제자들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는 1대1 말씀공부와 기도 소리 대신에 장사하는 자들의 외치는 소리, 짐승의 우는 소리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남대문 시장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눈에는 불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를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돈을 쏟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분노하신 것입니까? 이는 그들의 중심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요 죄인들이 나아와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는 곳이요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입니다(막11:17). 그러나 그들은 성전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나 양들보다 물질에 있었습니다. 성전은 세속화되어 그 중심이 썩어 있었습니다. 썩은 것은 칼로 도려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과의사로서 사정없이 메스를 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에수님의 행동을 보고서 시69:9절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성전을 사모하는 열정이 예수님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충만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만큼 분노도 불탔습니다. 이 분노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영적 분노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케 하시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무섭게 분노하시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기억했습니다(17). 또 그들은 예수님이 사흘만에 성전을 일으키겠다는 말씀을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배척하지 않고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그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22). 제자들의 믿음의 기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어리고 부족했지만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말씀을 기초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에 기초한 믿음은 인정치 아니하십니다(23-25).

반면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 보다 예수님께 메시야의 표적을 요구하며 정면으로 대들었습니다(18).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당시 성전은 46년 동안 지은 것으로 웅장하였습니다. 또한 성전은 절대시 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 하신 것이었습니다(21).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이를 구분하는 것이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막15:38).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합니다(히10:20b).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The new and living way)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10:19,20). 예수님은 친히 성전이 되사 인간의 근본 죄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죄문제가 해결되어야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변화의 능력자 예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