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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36(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요한복음 제 8 강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말씀: 요한복음 3:16-36
요절: 요한복음 3:16

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16-21)
1. 세상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롬3:19, 엡2:1-3) 이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 합니까(16a)?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16b)? 독생 자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2.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16b)? 어떤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 습니까? 이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에 대해 말해 보시오.
3.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17)?
4.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각각 어떻게 됩니까(18)? 믿지 않는 자는 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18b)? 이들이 이미 받은 정죄는 무엇입니까(19,20)? 이들이 빛되신 예수님께로 나 오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어떤 자가 빛으로 나옵니까(21)?

Ⅱ.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22-36)
1.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각각 어디에서 세례를 주고 있습니까(22-24)?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 에게 무슨 불평을 했습니까(25,26)?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권위와 자기 제자들의 사명이 무엇임을 일깨워 주었습니까(27,28)? 그 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왜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29)? 요한은 예수님과 자 신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30)?
3. 요한은 예수님과 자기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르다고 말했습니까(31)? 예수님은 무엇을 증 거 하십니까(32-34)? 예수님의 증거를 받는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33)?
4.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떠합니까(35)? 하나님은 예수님께 무엇을 위임하셨습니까(35)? 그를 믿는 자(순종하는 자)와 믿지 않는 자(순종치 않는 자)는 각각 어떻게 됩니까(36)?


Message


요한복음 제 8 강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말씀: 요한복음 3:16-36
요절: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요한복음 3:1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영원한 멸망 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요한복음 3:16절을 “작은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부은 바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16-21)

첫째,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동기(16a)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16a)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동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스러운 사람과 사랑스럽지 못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은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힘듭니다. 우리는 불순종하고 대들고 반발하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또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얄미워서 애정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지 못한 자들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의 자식이 되고 반발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고, 문둥병 환자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가 되고, 세리와 같이 이기적인 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21-31절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되고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자유롭게 되기는 커녕 우상 숭배자가 되고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남녀 간의 정상적인 관계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변태성욕주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 그들은 여러 가지 악을 창조해 내는 자가 되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었습니다(엡2:1-3).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를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용서하셨습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진실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것입니다. 독생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아들로서 분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저에게는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외아들을 마음으로부터 끔찍히 사랑하고 귀히 여깁니다. 만일 누가 이 외아들을 양아들로 달라고 하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1서 4:9,10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처럼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죄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내 버려 두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때가 되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6-8).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끊임없이 재난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또 욥과 같이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는다 할지라도, 질병에 걸려 고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를 기초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구나 생각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심령에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면 무기력하게 되고 절망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진실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와 같이 깊고 넓어서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고 감사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물질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축복해 주시거나 병을 고쳐 주시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고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현실적으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별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암환자와 같이 영적으로 불치의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고통하는 영원한 형벌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주심으로 영원한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 힘으로 형제를 도저히 품고 사랑할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주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포기치 않는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제를 용서치 못하여 인간적인 갈등으로 고통하고 있을 때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고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하나 체험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심령은 딱딱해지고 피곤해지고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아서 만족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람을 병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둘째,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16b,17)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3:16b절은 말합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죄로 인해 멸망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기 위해 저주 받은 세상에서 얼굴에 땀을 흘리며 종신토록 죽도록 수고하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아무런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마쳐야 하는 것은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할 때 더욱 절망하게 됩니다. 인간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이 근본적으로 아무 희망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 독생자를 심판주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죄의식에 시달리며 두려워 합니다. 하나님을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이전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담당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심판의 하나님 이전에 구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하나님은 이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셋째,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18)
이슬람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다섯가지 까다로운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하루에 다섯번 기도를 해야 되고, 일년에 한달간 금식을 해야 됩니다(라마단). 또 구약에서 금지된 음식을 먹지 않아야 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해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 규칙을 절대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에서는 구원을 얻는데 매우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깨닫고 해탈해야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아무런 기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와 업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깨달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겸손한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약속은 멸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는 최대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축복을 아무 값없이 단지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다니 이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빈부귀천, 국적, 신분, 인종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영생을 거절하는 것이요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때만이 정죄를 받지 않게 됩니다.(롬 8:1)

넷째, 믿지 않는 이유(19-21)
19절을 보십시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않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몰라서 못믿겠다.” “바빠서 못믿겠다.” “기독교에 대한 좋지 못한 선입감 때문에 못믿겠다.” 그러나 믿지 않는 정말 이유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죄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믿고 신앙 생활 하면 죄를 즐길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고자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나쁜 줄 알지만 죄를 즐기는 마음 때문에 빛으로 나아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어두움의 길은 우리를 정죄와 죽음과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빛의 길은 우리를 구원과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두 길 중에서 어느 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꺼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기쁨으로 성경 공부를 하다가 조금 지나면 부담을 느끼고 말씀공부를 그만 두고자 합니다. 이는 말씀의 빛 가운데서 자신의 죄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아픔이 있지만 그 후에는 놀라운 사죄의 은혜가 있습니다.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은 생명과 자유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진리를 좇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 옵니다. 진리를 좇는 자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진실되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Ⅱ. 예수님에 관한 세례 요한의 증거(22-36)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유하시며 세례를 주셨습니다(22).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23).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은 때로서 구속 역사가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께로 넘어 가는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24). 요한은 한 때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 중 하나가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해서 변론을 하였습니다. 결례는 세례와 동의어로서 죄나 더러움을 씻어 정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한 유대인이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보다 못하다고 비판한 것 같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스승의 역사는 점점 줄어들고 예수님의 역사는 점점 흥하자 마음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생겼습니다. 시기심은 관계성을 파괴하는 가장 유해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무모한 정신적인 소모를 하게 하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면 반드시 이런 인간 갈등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할 때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하고 아무런 영적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시기할 일이 아니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시기심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더 나아가 신랑의 친구로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신랑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신부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신랑이 신부를 취할 때 신랑의 친구는 이를 크게 기뻐합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그리스도께로 갈 때 그의 기쁨은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 이것은 그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슬프고 운명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그리스도께서 높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죽고 자기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내가 쇠하여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31,32).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위로부터 오신 분이요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땅에 속한 자로서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증거를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심을 알게 됩니다(33,34). 33절을 보십시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증거의 말씀을 겸손하게 영접할 때, 우리의 영적 눈이 떠져서 하나님이 참되시고 예수님의 말씀도 참되심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34).

셋째로, 만물이 예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35,36).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과 구원의 권세를 위임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이 있지만, 예수님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이는 시제가 현재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현재 영생을 맛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아니할 때 현재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3: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 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할 때 마음에 모든 어두움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심령에 기쁨과 행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8).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심령 깊이 영접할 때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롬 8:37). 인간의 문제는 결국 죄 문제와 사랑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메마른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랑의 사도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