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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27-54(눈을 들어 밭을 보라!)

by Mark Yang   08/14/2019  

Question


요한복음 제 10 강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말씀: 요한복음 4:27-54
요절: 요한복음 4:35

Ⅰ. 예수님의 비젼(27-42)
1.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동안 제자들은 어디에 갔다 왔습니까? 그들은 예수 님께 왜 아무 말도 묻지 못했을까요(27)?
2.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되었습니까(28-30)?
3.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준비해 온 음식에 관심이 없었습니까(31-33)? 예수님의 양식은 무 엇입니까(34)?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요6:39,40) 예수님의 참 만족과 영적인 힘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4. 사람들이 생각하는 추수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추수는 어떻게 다릅니까(35)? 한 사마리 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 예수님이 보게 된 비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밭 을 보라!”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을까요?
5. 거두는 자가 이미 무엇을 받았으며, 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36a)? 이로써 어떤 자들이 함께 추수의 기쁨을 누립니까(36b)?
6.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각각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로써 어떤 말이 참됨이 증명되었습 니까(37)? 뿌리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곡식을 거두면서 뿌리는 자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38)?
7. 사마리아인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39)?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40-42)?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 습니까? ‘세상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오.

Ⅱ. 예수님의 두번째 표적(43-54)
1.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면서 친히 증거하신 바가 무엇입니까(43,44)? 왜 이런 증거를 하 셨을까요?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까(45)?
2. 예수님은 다시 어디에 이르셨습니까(46)? 이 때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하 셨습니까(47)?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까(48)?
3. 그런데도 그 신하는 어떻게 간청했습니까(49)?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 습니까(50a)?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시지 않고 왜 말씀만 하셨을까요?
4. 왕의 신하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에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는 무엇을 믿고 내려 갔습니까(50b)? 가는 길에서 무슨 소식을 들었습니까(51)? 이 때 그는 무엇에 대해 먼저 관심을 가졌습니까(52)? 이 사건을 통해 그와 온 집이 어떤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 까(53)?
5. 두번째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 줍니까(54)?


Message


요한복음 제 10 강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말씀: 요한복음 4:27-54
요절: 요한복음 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께서 한 병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장시간 동안 대화하신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적인 사랑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몹시 지치신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한 영혼을 살리심으로써 영적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보시고 비젼에 불타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현실에 얽매여 신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비젼을 심으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양식과 비젼을 나의 양식과 비젼으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의 양식(27-3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거의 마칠 즈음에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다가 한아름 사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한 낯선 미모의 여인과 대화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로맨스를 즐기시는 때가 있는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가 너무 진지하고 또 예수님께 대한 깊은 존경심과 신뢰심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히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여인이 물동이를 팽개치더니 치마를 잡고 쏜살같이 동네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마리아 사람들은 확신과 감격에 찬 증거를 들었습니다. 또한 여인의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났고 기쁨과 은혜가 흘러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창녀와 같은 여인이 하늘 나라의 공주로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변화시킨 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여인의 증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도 아니었고 유명인사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최진실과 같은 인기인도 아니었고 설득력을 가진 웅변가도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경력있는 죄 많은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또 여인의 증거도 미사여구가 담긴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매우 단순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의 증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여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변화된 삶 자체가 생명력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박학한 지식일까요? 뛰어난 웅변술일까요? 좋은 인상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을 위한 넘치는 열정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명성이나 지식이나 재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식과 권세와 명예와 부를 소유한 그 시대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가진 것이 죄 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위대한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로 오는 사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랍비여 잡수소서. 그동안 베고프셨지요?” 하며 은혜 분식에서 만든 도시락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준비해 온 음식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가기 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힘과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없는 사이에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영적으로 예수님과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요6:39,40, 눅19:10).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한 밤에 고뇌하는 니고데모와 대화하시고, 또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사이 없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든 영혼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죄로 말미암아 병든 영혼을 구원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힘들다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열심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의무적으로 마지 못해 인상을 쓰며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시편 40:8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마음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하셨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시고 이를 행하심으로 참 만족과 기쁨과 힘을 얻으셨습니다.

양식이란 먹음으로써 힘을 얻고 만족과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힘이 없고 무엇인가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 힘이 나고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평소 기도할 때는 힘이 없이 ‘아멘’ 하다가도 식사 기도할 때는 ‘아멘!’소리가 힘찹니다. 사람들이 육의 양식을 먹고 힘을 얻는 것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시고 이를 통해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지친 가운데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1대1을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하심으로 새로운 힘과 영혼의 만족과 쉼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고도 조금도 지치지 않으시고 힘있게 복음역사를 감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 자체가 힘을 얻는 양식이요 쉼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서 힘과 영혼의 만족과 쉼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잠을 자거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거나 술을 마시므로써 힘과 만족과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또 요즈음 대학생들은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름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근본적으로 마음의 피곤과 공허함은 사라지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인 힘과 영혼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Ⅱ. 예수님의 비젼(35-42)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함으로써 영적 힘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그후에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보시고 비젼에 불타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하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곡식을 추수하는 데는 씨를 뿌린 후부터 추수하기까지 일정 기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추수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씨를 뿌린 후 곧 추수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바라보시고 추수할 비젼에 불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젼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과 민족적인 감정 문제에 얽매여 비젼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전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또 이곳에는 복음을 전해도 안받아 들일 것이라는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는 척박한 땅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먹고 사는 현실 문제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밖에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먹는 것과 연관시켰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누룩을 떡과 연관시켜 염려했습니다(막 8:15,16). 먹고 사는 현실문제는 삶의 안정 문제입니다. 물질 문제, 결혼 문제, 논문 문제, 취직 문제 등은 다 삶의 안정 문제입니다. 현실 문제에 매이게 되면 자기 중심적이 되고 마음이 좁아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양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도 보이지 않고 세계 선교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현실 문제가 우주 만큼 크게 보여서 나의 눈을 가로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현실 문제에 얽매여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실 문제에 얽매인 데서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하게 된 영적 세계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좁은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넓은 하나님의 세계로 눈을 들라고 하십니다. NIV영어 성경을 보면 Open Your eyes 즉 눈을 뜨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자기 세계에 갇혀서 신음할 것이 아니라 눈을 떠서 넓고 광활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볼 때 가슴이 탁 트이고 우리의 심정은 활화산과 같은 비젼으로 불타게 됩니다. 그때 나를 얽어매고 괴롭히던 현실 문제는 조그맣게 보이고 모든 문제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또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 볼 때 생각하고 계획하고 마음 쓰는 스케일이 커지고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비젼이 없는 사람은 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취직할까? 어떻게 진급할까? 하는 조그만 문제에 얽매여 마음을 쓰고 갈등하고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비젼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젼이 없기 때문에 소시민화 되어가고 생각하는 폭이 작습니다. 그래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비젼이 있을 때 부왕부왕하게 보이지만 생각하고 마음쓰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스케일이 크고 큰 인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잠언 29:18절 말씀은 비젼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비젼이 없는 백성, 비젼이 없는 모임, 비젼이 없는 개인은 자기 중심적이 되고 점점 내면이 부패해져서 망하게 됩니다.

William Carey는 쿡 선장의 항해라는 책을 읽고 세계선교를 영접했습니다. 그후 그는 방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늘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구두 수선공으로서 일하면서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불타는 세계선교 비젼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원대하신 소원을 영접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계획하고 그 안에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크게 쓰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실문제에 얽매여 있는 제자들에게 비젼을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는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36).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거두는 자는 열매를 거두기 때문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지만 자신이 거두지 못할 때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손해의식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뿌린 씨는 결코 헛되지 않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당장에 열매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확신있게 말씀의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말씀을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 심고 다 거두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 피를 흘린 수 많은 순교자들과 말씀의 전파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이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또한 거두는 자는 내 노력으로 열매 맺었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여인의 증거를 듣고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예수님께 찾아와 자기들과 함께 유하며 성경공부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에 기꺼이 응하셔서 이틀을 더 유하시며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립적이고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42) 그들은 비천한 여인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자는 사마리아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배척받고 소외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주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종, 신분, 국적을 초월하여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십니다.

Ⅲ. 두번째 표적(43-54)

이틀 후에 예수님은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인간적인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이르시자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기초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치 아니하셨습니다(48).(요2:23,24)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자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왕의 신하는 세상 권력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죽어가는 아들에 대한 부성애가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34Km되는 먼 길이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단숨에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한시가 절박했으나 낙심치 않고 다시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우리는 이런 왕의 신하에게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양들에 대해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을 때 체면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가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0a절을 보십시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예수님께서 왜 직접 가시지 않고 말씀만 하셨을까요? 이는 표적에 기초한 믿음을 바로 잡아 주시고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표적에 기초한 믿음은 샤마니즘적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자들은 축복받기 위해서 믿고 병낫기 위해서 믿습니다. 또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성경공부합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 공부를 하고 두통이 낫고 마음이 안정되면 떠나 갑니다. 표적신앙은 뿌리가 없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말씀에 기초한 믿음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납니다. 이러한 믿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철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합니다.(시1:3)

그러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의 신하는 절박한 인생문제를 안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예수님께서 주신 방향은 너무나 쉽고 단순하였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단순하여 믿기 힘들었습니다. 또 그렇게 절실히 간청했는데도 함께 가시지 않고 말씀만 하실 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낙심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만을 굳게 붙들고 내려갔습니다(50b). 그의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는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께 순종하듯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믿고 내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내려가는 길에서 종들로부터 아이가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기쁨에 도취되어 은혜를 잊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보다도 예수님께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하인들에게 낫기 시작한 때를 묻고 바로 그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인 줄 알고 그와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피상적인데서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었습니다. 두번째 표적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말씀 한마디로 죽어가고 있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현실문제로 마음이 좁아져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세계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세계는 추수할 일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는 빼어난 1대1 성경선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는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연단된 복음의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