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제 9 강
모세의 중보 기도
말씀: 출애굽기 32-34장
요절: 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
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시고 광야에서 여러모로 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두신 크신 뜻을 계시하시고 거룩한 율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만 백성을 품고 섬기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중죄를 범함으로 제사장 나라는 커녕 멸망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장엄한 결혼식이 거행될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을 행하므로 결혼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모세의 중보 기도로 말미암아 극적으로 수습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영적 위기를 수습한 중보자 모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요 백성들의 진정한 목자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세의 목자의 심정을 배우고자 합니다.
Ⅰ. 금송아지 사건(32장)
첫째, 범죄한 이스라엘(1-6)
32: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느라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이때까지 받은 바 은혜를 기초로 인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자가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데체 이 모세가 어디 갔지?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실 때 불에 타 죽었는가? 아니면 내려 오다가 실종했는가?” 그들은 모세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내면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아론을 재촉했습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신은 gods로써 잡신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사신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들을 만들어 섬기고자 한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대신 책임을 지고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아론은 그들의 불신과 배은망덕함과 무례함과 허망한 생각을 책망하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믿고 인내하도록 도와야 했습니다.그러나 아론은 줏대없이 그들의 제의에 승복하고 동조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타협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요구대로 금고리를 가져오게 하여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신들 가운데 이시스와 아피스 같은 신은 황소와 암소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보고 듣고 배운 그대로 흉내를 낸 것입니다. 아론은 그것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며 그 앞에 단을 쌓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공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아침 일찌기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탐욕을 신으로 삼고 방탕한 놀음을 했습니다. 그들은 죄짓는 데는 부지런했고 정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받은 영적인 훈련도 아랑곳없이 우상 숭배자로 사정없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얼마 전까지 체험했던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쉽게 잊고 하나님을 속히 떠나 우상 숭배자가 되었을까요?
첫째로, 자립적인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그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르치심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잠시 떠나자 죄악된 본성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보이는 모세만 의지하고 있다가 모세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립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목자 모세의 은혜를 배반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자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지고 그 생각이 우준하게 되어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롬1:21-23)
둘째는,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난 후 그것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육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육신을 즐겼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공부하다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그만 둡니다. 그런데 그 이면을 살펴 보면 하나님 없이 자신의 욕심과 이상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는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 모세의 제 1차 중보 기도(7-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7-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때까지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부인하셨습니다. 죄가 관계성을 파괴시켰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패하여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들을 단번에 진멸코자 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자기를 통하여 새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서 “주님, 정말 잘 보셨습니다. 제가 볼 때도 이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주님 뜻대로 이루소서.” 하며 동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는 백성 편에 서서 필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약점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예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진멸하게 되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산에서 진멸하기 위해 인도하여 내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이사야 48:11절은 말합니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에는 꼼짝 못하십니다. 모세는 무조건 떼를 쓰지 않고 근거있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여기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불길을 누그러뜨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나 한 사람이 양들을 위해 또한 백성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의 중보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약5:16b)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2백만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의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이 민족을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셋째, 대노하는 모세(15-29)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 편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백성들 앞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증거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뽕짝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세는 진에 가까이 이르러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와 그 앞에서 광란하는 모습을 보고 대노하여 증거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순 후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만든 우상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또 그들이 범한 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뼈속 깊이 깨닫도록 죄의 열매를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중죄에 빠지게 한 아론을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아론은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본래 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가져온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보니 백성이 방자하였습니다. 이는 아론이 방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방자하다는 말은 자제력을 상실하고 무절제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악된 본성은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살인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자 할 때 이를 책망하고 이것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백성들이 죄를 짓도록 방조하고 함께 동참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고삐풀린 망아지 같이 자행자지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방자한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조금도 죄를 봐주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서서 백성의 죄를 철저히 다루었습니다. 그날에 3천명 가량의 반역자들이 죽었습니다. 이는 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함으로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는 너무 잔인한 자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죄를 다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지도자와 영적인 지도자의 두 종류의 지도자상을 보게 됩니다. 아론은 백성들이 원하는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대로 하는 민주적인 훌륭한 지도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악한 마음과 타협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중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사이가 나빠질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양이 살아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죄와 타협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양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 그 몸을 굽히며 화를 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마실 물이 없어 돌로 치려고 할 때도 참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근본적으로 중심이 삐뚤어졌을 때는 무섭게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는 죄에 대한 영적 분노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와 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 편에 섰지만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오늘날은 아론과 같은 인본주의적인 지도자가 인기가 있고, 양들의 죄를 책망하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칭찬해 주면 좋아하지만 죄를 책망해 주고 훈련시켜 주면 원수처럼 대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 분위기 때문에 양들의 죄와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고 양들의 죄를 책망하는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모세의 제 2차 중보 기도(30-35)
이튿날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범한 죄악을 인해 슬픈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31, 32절을 보십시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우리에게 있어서 영적 생명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희생할 수 있어도 영적 생명만은 희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영적 생명까지 희생하고서라도 백성들의 죄악을 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망없는 백성들을 짤라 버리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구원 받으면 자기야 어떻게되든 상관 없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백성들의 선한 목자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9:3절에서 이와 동일한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시면서까지 인생들의 죄악을 담당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24). 우리도 이와 같은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주의 은총을 구하는 모세(33:1-34:35)
33: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만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은 하겠지만 같이 살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치 아니했습니다(6).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심각한 영적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첫째, 회막으로 나아간 모세(7-11)
모세는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심으로 백성들을 근본적으로 용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모세의 제 2단계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진 밖에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하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기뻐하시고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깊은 밀월의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모세는 문제가 있을 때 문제 자체에만 집착하지 아니했습니다. 모든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기에 힘썼습니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사람들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뿐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 때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우리 가운데 문제가 있습니까? 모든 문제를 뒤로 두고 회막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영적교제에 힘씁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주의 은총을 구하는 모세(12-18)
모세가 회막에서 하나님과 영적 사귐을 가지면서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는 주의 은총 입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축복보다도 축복 주시는 하나님을 원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지 않을 때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도 지옥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은 광야라도 천국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자신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기뻐하시고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영광을 보기 원하는 모세를 통해 불타는 영적 소원을 배웁니다. 모세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알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알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요,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25년만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삭보다도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비밀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삭을 놓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도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더 구하기 쉽습니다. 아버지보다도 아버지 가방을 더 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축복을 주시지만 우리와 더 이상 함께 하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축복도 결국에는 저주로 변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의 인격과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했습니다(빌3:10).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그의 불타는 영적 소원은 그를 지칠 줄 모르게 하는 불사조가 되게 했습니다. 영적 소원은 그 사람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피곤한 것은 영적 소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떄 모든 피곤이 사라지고 심령에 영적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내면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 모세에게 은총을 입히신 하나님(33:19-34:35)
33: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주의 영광을 구하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만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33:20).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다시 처음과 같이 돌판을 깎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34:1).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허락하시고 말씀으로 관계성을 새롭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중죄로 말미암아 말씀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모세의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가 증거판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그 이름을 반포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죄를 미워하되 철저히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 앞에 급히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9).” 모세의 기도 가운데서 우리는 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32:32절에서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의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34:9절에서 모세는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자신도 백성들과 동일한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모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가 섞인 기도를 받지 않으시고 죄인으로서의 겸손한 기도를 기뻐받으십니다.
34:10-28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시고 주의 기업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회복된 것입니다. 이는 모세의 중보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중보자는 양편을 위한 것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백성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보자는 백성 편을 위한 것이라고 해서 중간에 서서 양쪽의 비위를 맞추는 자가 결코 아닙니다. 중보자가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그들의 죄에 도전하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세와 같이 성숙한 내면성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중보직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중보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딤전2:5)
하나님과 깊은 영적 사귐을 가진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 광채는 하늘 나라의 영광스러운 광채였습니다.
오늘날은 모세와 같이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중보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모세는 구언약의 일군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직분입니다. 이 새 언약의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보다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18,1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우리게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화목케 하는 중보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이 시대의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