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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0:32-52(섬기러 오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5 강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
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밖에 없는 고귀한 인생을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위대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원치 않게 초라하고 후회스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어떤 자이며, 어떻게 참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Ⅰ. 복음 신앙을 심으신 예수님 (32-34)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실 때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좇는 무리들은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에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실 분위기만 되어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조금도 봐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불러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은 벌써 세 번째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첫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한 후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심하게 반발하다가 사단이라는 책망까지 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였습니다. 이때는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묻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이번에는 “보라!”하시며 제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의 의미를 아주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비밀의 베일을 조금씩 벗기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말씀을 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첫째는,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일을 당하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복해서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 신앙을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은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아직 복음의 비밀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담스런 십자가의 내용보다 세상 영광과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십자가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리는 반드시 영접해야 할 절대적인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마음에 복음 진리를 심고자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세상 영광의 딱딱한 바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다른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바위를 깨시고 복음 신앙을 심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을 가장 잘 돕는 비결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들을 도울 때 사랑을 많이 베풉니다. 빵과 마실 것을 사 주고 때를 따라 말씀을 가르쳐 주며 기도해 줍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돌보듯이 섬세한 사랑으로 돌보고 섬깁니다. 이런 목자의 사랑의 수고로 양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십자가 없이 은혜만 누리고 싶어합니다. 십자가를 가르치면 힘들어져 도망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고 좋은 말만 해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십자가를 배우지 않으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목자의 사랑이 모래에 해당된다면 십자가는 시멘트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되어야만 견고한 복음의 기초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핍박이나 유혹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한 복음의 집을 지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 같이 불안합니다. 결국 은혜만 따먹고 제 갈 길로 가 버립니다.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십자가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땅히 가르쳐야 할 복음 진리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싸워서라도 심어야함을 배우게 됩니다.

Ⅱ.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 (35-4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 와 간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원하는 바가 있으면 부모님에게 꼭 사달라고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채권자와 같이 당연히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 같이 오만한 자세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으므로 마땅히 보상을 받아야 된다는 자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제자들로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고난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참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오래 참으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곧 지상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새 왕국을 건설하는데 응당 따르는 고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초조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자리를 얻는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 문제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이 강한 자였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같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칼을 가는 조용한 야심가였습니다. 이들은 형제들로서 인간적으로 능력이 많아 베드로와 함께 수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비교해 볼 때 객관적인 평가에서 한 수 아래였습니다. 무슨 일에나 베드로가 선수를 달렸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그늘에 가려 일생 동안 빛을 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항상 베드로와 비교하며 경쟁심과 시기심에 시달렸습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여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때는 뼈가 썩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을 때는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말하므로 점수를 따자 속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최고 지도자 자리를 베드로에게 결코 양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한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연합 전선을 펴서 청탁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반드시 베드로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만 없으면 최고 리더로 인정받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텐데 베드로 때문에 뒤로 밀려서 항상 속이 시끄럽습니다. 안드레는 내가 베드로만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수제자 중에 들 것인데 하는 생각으로 시달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가운데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남모르게 칼을 갑니다. 누가 주제 강사가 되고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오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심지어는 목자님의 수첩에 누구의 이름이 먼저 적혀 있는가 몰래 보고 문제에 빠지기도 합니다. 회장 출마에서 떨어지거나 사회자의 명단에서 빠져도 깊은 운명주의에 빠져 밤거리를 헤맵니다. 어떤 분은 베드로 문제 때문에 견디다 못해 다른 모임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역시 베드로는 있습니다. 베드로 문제는 반드시 신앙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신앙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에 기초한 경쟁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경쟁이 지나쳐 시기심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사단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대개 문제에 빠지는 것을 보면 정욕 문제 아니면 경쟁심과 시기심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형제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매님들에게도 심각합니다. 이런 경쟁 의식에 시달리다 보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의 경쟁심으로 늘 마음이 시끄럽고 영적으로 꽉 막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욕심으로 심령이 막히고 눈이 감긴 이들을 보실 때 심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들이 구하는 바가 너무나 세상적이고 또 그 방법도 정치적인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훈련을 걸어 영의정, 좌의정하고 구호를 외치며 갈릴리 호수를 돌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잔’은 십자가의 쓴 잔을 의미하며,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조건 ‘회개하라’고 하시므로 기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의 영적 무지를 아시고 반복해서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심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있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들은 위대한 혁명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영의정, 좌의정 자리를 보장만 해 주신다면 어떤 대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대답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대답대로 야고보는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를 당했습니다. 또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십자가를 지고 복음 역사를 섬기다가 후에는 밧모섬에 귀양을 가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을 아시고 긍정적으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높은 자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의리 없는 놈들 그럴 수가 있는가’ 펄펄 뛰며 분개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이들의 정신이 올바른가 의심하며 분개했을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그들도 똑같은 권력에의 욕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적이요 사고 방법도 세상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인간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참으로 위대한 자가 되려면 영적인 세계를 알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문제로 고뇌하고 갈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참으로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Ⅲ. 섬기는 종의 도리를 가르치신 예수님 (42-52)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권력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3년간의 훈련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듯한 절망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치 않으시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져야 할 영적 가치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군대의 힘으로 마음대로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힘이 곧 법이었습니다. 권력은 본래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 잡은 자들은 그 권세로 백성들을 공과 의에 기초해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임의로 행사하는 것입니다.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합니다. 세상에서는 동직원만 되어도 그 동네에서는 권세가 대단합니다. 군대에서는 별이 되면 별의별 권세가 주어집니다. 사람이 대권을 잡기만 하면 밑의 사람들이 “각하”하며 모든 시중을 듭니다. 그 맛에 한 번 권력을 잡으면 놓고 싶지 않습니다. 또 권력을 잡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을 보면 아니꼬운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멋있게 보이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제자들은 권세를 남용하는 이방 집권자들을 비판하고 미워하였지만 자신들도 어느새 그들의 영향을 받아 그런 자가 되고자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Not so with you)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만 교회를 왔다 갔다 한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합니까?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받고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가 크고 위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종과 같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타이틀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야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대하게 된다는 것은 타이틀이나 지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 ‘종’이라고 하시므로 소유보다 존재 자체, 인격 자체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정말 위대한 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인 내면이 변화되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내면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관심이 자기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바뀝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이 가까운 동역자로 시작해서 멀리 이방 땅에 나가 계신 선교사님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섬기고자 합니다. 또한 자기 양에게는 물론이요, 다른 요회의 양, 멀리는 이방 땅에서 자라고 있는 양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만큼 넓은 내면을 소유하게 됩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만한 깊고 넓은 내면성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의 영적 투쟁이 필요하고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얻고자 노력하는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만한 내면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타이틀이나 직분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과 그냥 대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얼핏보면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고 그냥 훌륭한 것 같은데, 관심을 가지고 보면 도움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었건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학식이 많다 하더라도 위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자기 중심적인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 만민들을 품고 섬기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높이시고 당신의 종으로 귀하게 쓰십니다.

둘째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남을 섬긴다고 해서 맛있는 것을 사주고 듣기 좋은 말만 해주므로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죄를 회개하고 그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양들은 쉽게 말씀을 영접치 않고 빛 가운데 나아 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소원이 없는 자는 소원을 심고, 연약하게 드러누워 있는 자는 찾아가 격려하고, 또 말씀으로 정욕, 허무, 교만, 야심 등 내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랑과 격려가 필요한가 하면, 교만과 욕심과 불신에 사로잡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자는 책망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므로 결국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하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다니엘서 12:3절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은혜와 진리로 섬겨서 그 영혼을 살리고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 안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라고 하시므로 여기에는 예외가 없고 제한이 없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타이틀이나 지위는 제한되어 있어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낮아져 섬기는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나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정받고 높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외적 투쟁에서,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내적 투쟁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본받도록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인생들을 섬기셨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분으로서 모든 천군 천사들과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섬김 받고 싶은 본성을 부인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도리어 섬기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이 땅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인생들을 섬기시기 위해 사람들보다 더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무기력하게 된 중풍병자도 섬기시고, 이기심으로 병든 세리들도 섬기시고, 반항심으로 병든 거라사인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하여 서로 경쟁만 하고 세상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제자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섬김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본성대로만 살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이 마음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시고자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삶의 절정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전폭적으로 희생하시기까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죄인들이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두 예수님의 섬김의 열매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속 역사의 대원칙입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낮아져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섬기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자기의 꿈이 있습니다. 세상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자기를 귀히 여기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섬김 받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희생하여 겸손히 낮아져서 남을 섬길 때 반드시 생명이 살아나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46-52절에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생활은 이 하찮은 소경 거지 한 사람을 섬기시는데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이름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천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자기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단순한 믿음으로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요한 때에도 한 사람의 하찮은 소경 거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도와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각종 죄인들을 다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리고 무지한 제자들을 끝가지 품고 섬기시므로 그들이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므로 온 인류를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는 인생을 살므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